성명 |
존 피츠앨런 John Fitzal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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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408년 2월 14일 ~ 1435년 6월 12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도싯 리쳇 매트라버스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보베 | |
아버지 | 존 피츠앨런 | |
어머니 | 엘레노어 버클리 | |
형제 | 윌리엄 피츠앨런 | |
아내 | 콘스탄스 콘월, 모드 로벨 | |
자녀 | 험프리 피츠앨런 | |
직위 | 아룬델 백작, 투렌 공작, 가터 기사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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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맞섰지만 제르베로이 전투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생포된 뒤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2. 생애
1408년 2월 14일 잉글랜드 왕국 도싯 리쳇 매트라버스에서 3대 말트레버스 남작 존 피츠앨런과 베버스톤 성의 기사 존 버클리의 딸인 엘레노어 버클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윌리엄 피츠앨런이 있었다. 1415년 10월 12대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이 병사한 뒤, 그의 사촌이었던 아버지 존이 13대 아룬델 백작이 되었다. 1416년 아버지 존 피츠앨런은 아룬델 백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미망인이었으며,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피츠앨런이 자신이 아룬델 여백작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자녀들이 아룬델 백작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1421년 아버지 존 피츠앨런이 사망한 뒤에도 쭉 이어지다가 1433년이 되어서야 존 피츠앨런이 의회에서 아룬델 백작으로서의 직위를 확인받았다.1426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때 왕실은 아룬델 백작위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던 걸 감안해 '아룬델 경'이 아니라 '말트레버스 경'으로 지칭했다. 1249년 여름 의회에 소환되었는데, 이번에는 '아룬델 경'으로 일컬어졌다. 1430년 4월 23일 베드퍼드 공작 존의 휘하에 발탁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고, 그해 6월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후 부르고뉴군과 함께 앙글루르 공방전을 치렀으며, 1431년 12월 17일 헨리 6세가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참석했고 이후에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431년 11월 루앙 수비대장이 되었고, 뒤이어 베르농의 대장이 되었다. 1432년 1월 베르뇌유 대장에 선임되었다. 1432년 2월 3일 밤에 루앙 성의 대탑에서 취침하고 있던 그는 인근의 리카르빌에서 온 프랑스 군인 무리가 루앙 시를 기습 점령하자 바구니를 타고 벽 아래로 내려가 탈출했다. 이후 병력을 규합한 뒤 반격에 착수했고, 기욤 드 리카르빌이 이끄는 프랑스 습격대가 12일 만에 항복하면서 루앙을 탈환했다. 1432년 4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루아르 원정 당시 생포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을 대신해 프랑스군 야전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432년부터 일드프랑스 요새를 탈환하거나 강화하는 임무를 맡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휘하에 라니쉬르마른을 공략하는 데 실패한 것 외엔 대체적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로어 노르망디와 어퍼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수비대를 강화하고 빼앗겼던 요새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기병대 수장으로서 메인과 앙주 지역에서 습격 작전을 연이어 벌여 많은 프랑스 농민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해 프랑스인들의 증오를 샀다. 1434년 5월 말에 어퍼 노르망디의 보안관 직위를 초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에게 넘겼고, 그 대신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 지역의 지휘권을 맡았다. 두 사람은 보몽쉬르루아르좌 크레유를 공략하는 작전을 수행해, 1434년 6월 20일 크레유를 공략했다. 그 해 여름에는 망트 샤르트르 지역 요새를 공략했다.
1434년 9월 8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지역인 투렌의 공작으로 선임되어 해당 지역을 공략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해 10월 생로의 대장이 되었고, 생로의 베생 지역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이때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은 아브랑슈를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 했지만, 그는 프랑스군의 진군을 저지하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노르망디 전역에서 세금 인상에 반발한 농민들이 반 잉글랜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프랑스를 향한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반란 진압에 몰두해야 했다.
잉글랜드군이 점령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사이,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받드는 아르마냑파는 일드프랑스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골몰했다. 그들은 노르망디로 진출할 교두보인 제르베로이를 점령하고 요새화하기로 했다. 사실 프랑스군은 1432년에 제르베로이를 장악했지만, 이를 유지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요새를 파괴한 뒤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이제 잉글랜드군의 일드프랑스 지배력이 현저히 약해지고 반란 진압에 힘쓰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자, 샤를 7세는 1435년 봄 제르베로이를 다시 점령하고 요새를 재건하기로 했다. 1435년 5월 초,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 1,000여 명이 제르베로이에 도착한 뒤 요새 재건에 착수했다.
한편,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은 제르베로이에서 12km 떨어진 노르망디 국경 도시인 구르네앙브레이에 집결한 뒤 솜 강 인근의 도시이며 샤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한 루 시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피츠앨런은 제르베로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5월 8일 밤 구르네에서 출발한 피츠앨런은 1535년 5월 9일 아침에 선봉대와 함께 제르베로이 외곽에 있는 발 다롱델 평원에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고원에 자리잡은 제르베로이 시에서 적 선봉대가 온 것을 확인한 라 이르와 생트라유는 저들이 선봉대이고 대규모 적군이 이곳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요새를 막 재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행군 중인 적을 급습하기로 결의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는 제르베로이 시를 떠나 적 선봉대가 자리잡은 위치를 우회해 적의 감시를 회피한 뒤 라우덴쿠르 마을 인근 도로에서 행진 중이던 적 본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생트라유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룬델 백작과 함께하는 잉글랜드 선봉대를 공격했다. 잉글랜드 궁수병들은 말뚝을 박아 스스로 보호하려 했지만, 프랑스 병사들이 컬버린(Couleuvrine: 핸드 캐논의 일종)으로 공격을 퍼붓자 점차 움츠러들었다. 이때 피츠앨런은 컬버린에서 발사된 총탄이 한쪽 다리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라 이르가 적 본대를 모조리 쫓아낸 후 제르베로이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고립된 잉글랜드 선봉대는 항복했다.
피츠앨런은 생포된 뒤 보베로 끌려갔고,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부상이 악화되어 1435년 6월 12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보베에 안장되었다가, 종자인 풀크 에이튼이 1454년 후반에 확보한 뒤 잉글랜드로 가져가 아룬델 성의 피츠앨런 예배당에 안치했다. 그는 생전에 팬호프 남작 존 콘월의 딸 콘스탄스 콘월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했고, 1429년 제5대 티크마쉬의 로벨 남작 존 러블의 손녀이며 기사 로버트 로벨의 딸인 모드 로벨과 재혼한 뒤 외아들 험프리 피츠앨런을 낳았다. 그가 죽은 뒤 험프리 피츠앨런이 아룬델 백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1438년에 9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존 피츠앨런의 남동샌인 윌리엄 피츠앨런이 아룬델 백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