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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43:26

조지 허버트(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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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222><colcolor=#fff>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파일:George-Edward-Stanhope-Molyneux-Herbert-5th-Earl-of-Carnarvon.webp
출생 1866년 6월 26일
영국 런던
사망 1923년 4월 5일 (향년 56세)
이집트 왕국 카이로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재임 제5대 카나본 백작
1890년 6월 29일 ~ 1923년 4월 5일
작위 5대 카나본 백작
포체스터 경(1890년까지)

1. 개요2. 생애3. 저주?4. 여담

[clearfix]

1. 개요

영국 백작. 하워드 카터를 후원해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걸로 유명하다. 풀네임은 '조지 에드워드 스탠호프 몰리뉴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카나본 경 혹은 카나본 백작이라는 작위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조지 허버트는 1866년 6월 26일 런던 메이페어 그러스베너 가 66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토리당 정치인 헨리 허버트 경, 어머니는 에블린 스탠호프였다. 헨리 허버트의 카나본 경 작위를 이을 유일한 외아들이었던 덕에 어렸을 때부터 매우 유복한 생활을 영유했다고. 이튼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외할머니로부터 더비셔의 사유지를 물려받는 등 전형적인 영국 상류층답게 자라났다. 1890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제5대 카나본 백작으로 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조지 허버트, 즉 카나본 경은 1895년 6월 26일 로스차일드 가문의 백만장자 은행가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의 사생아, 알미나 빅토리아 마리아 알렉산드라 웜벨과 결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최고의 부호 가문으로 꼽히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신붓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났던 셈. 장인 가문이 된 로스차일드 가문은 카나본 경이 지고 있던 50만 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모두 갚아줬다.[1] 어쨌든 카나본 경은 웜벨과 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생활을 했다고 한다.

결혼을 잘한 덕에 영국에서도 알아주는 거부가 된 카나본 경은 이후 경주마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1902년에는 경마용 말들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쳐주는 서러브레드 종마를 키우기 위해 클럽을 여는가 하면 여러 경마장들에서 관리인으로 활동했다.[2] 그러나 한창 말과 경마 등 전형적인 부자 취미에 열을 올리던 카나본 경에게 고난이 찾아왔으니, 바로 1905년 독일 슈발바흐에서 심각한 자동자 사고를 당한 것. 카나본 경의 건강이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의사들은 따뜻한 이집트에서 휴양하기를 권했고, 이때 여러 이집트 유적과 유물들을 접하면서 카나본 경은 열렬한 초짜 이집토마니아로 빠져들었다.

1907년 카나본 경은 룩소르 근처의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귀족들의 무덤 발굴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때 만난 사람이 그 유명한 하워드 카터. 당시 하워드 카터는 프랑스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일자리에서 잘린 채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열정을 알아봐준 가스통 마스페로[3]의 추천으로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14년에는 고고학자 시어도어 데이비스 왕가의 계곡 발굴 작업에서 손을 떼자 잽싸게 왕가의 계곡 발굴권을 따냈다. 하워드 카터는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아 1914년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발굴 작업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1917년 후반에 다시 재개했다. 하지만 1922년까지 무려 5년 동안 그 어떠한 성과도 나오지 않자 제아무리 돈이 넘쳐나던 카나본 경조차 점점 회의적으로 변했고,[4] 나중에는 하워드 카터와의 후원 계약을 해지할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파일:Howard_Carter_Lord_Carnarvon_and_Lady_Evelyn_Herbert_at_Tutankhamens_tomb.jpg
왼쪽부터 카나본 경, 그의 딸 에블린 허버트 양, 하워드 카터다.

카나본 경이 작업에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하워드 카터는 안절부절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워드 카터는 카나본 경에게 애걸복걸하면서 단 한번만 더 후원해달라고 요청했고, 카나본 경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면서 자금을 지원해주었는데.... 이 마지막 후원에서 대박이 터지고야 만다. 바로 수 천년간 잊혀져 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던 것이다.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가 영국에 있던 카나본 경에게 이 놀라운 발견에 대해 전보를 쳤고, 극도로 흥분한 카나본 경은 그의 딸 에블린 허버트 양과 함께 그해 11월 23일 룩소르에 도착했다.

카나본 경은 11월 26일 하워드 카터가 무덤 전실을 가로막던 얇은 벽에 구멍을 내서 안을 살펴볼 때도 바로 곁에 있었다. 이때 탄생한 명대사가 바로 그 유명한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이로써 하워드 카터와 카나본 경, 그의 딸 에블린 허버트 양, 카터의 조수 아서 캘린더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을 따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이집트 관리가 입회한 하에 공식으로 무덤을 개방했고 왕좌, 조각상, 향유, 보석 등 무려 5,000여 점이 넘는 온갖 종류의 유물들이 쏟아져나오는 걸 실시간으로 직관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언론의 집중관심을 받는 유명인사가 된 카나본 경은 1922년 12월에 영국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다음해 1월에 이집트로 귀환해 2월 16일 관이 있는 매장실 공개 행사에 참석했다.[5]

2월 말에 무덤 발굴과 관련해 하워드 카터와 의견 불일치가 생겨 잠시 동안 발굴을 중단했지만, 카나본 경이 결국 먼저 사과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초에 다시 재개했다. 카나본 경은 1923년 3월 19일에 모기에 물려 부풀어오른 환부를 면도하다가 잘못해서 베는 바람에 상처가 감염되고야 말았다. 병은 심각하게 나빠졌고 결국 한달도 못된 4월 5일 카이로의 컨티넨탈-사보이아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4월 14일에 그의 유해가 영국으로 이송되었고, 그 유해는 햄프샤이어 북부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로 카나본 경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 묘를 발굴하는 데에 진력했다.

3. 저주?

파일:Lord_Carnarvon_Grave.jpg
햄프샤이어 북부 언덕에 위치한 카나본 경의 무덤.

카나본 경의 죽음과 관련해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투탕카멘의 저주다. 소년왕 투탕카멘의 잠을 깨운 것에 벌을 받아 죽었다는 소문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근거 없는 호사가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6] 투탕카멘의 저주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내용은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는 것. 하지만 실제로 이런 문구는 무덤에 쓰여있지 않았고, 공포심을 자아내기 위한 언론들의 과대 포장에 불과했다.

허버트 경은 발굴 당시에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1922년 11월에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고 최대한 빨리 와 달라며 특급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몸이 아파서 마음은 급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답장했다. 허버트 경은 몇 해나 거액을 후원하며 애타게 찾던 파라오의 무덤을 빨리 보고자 당시의 교통수준을 기준으로 대단히 빠르게, 3주 만에 이집트로 갔는데, 이때 안 그래도 나빴던 건강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래에 나오듯이 정작 그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여러 가지 원인이 겹친 상황이었기에 건강을 잃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환부에 상처가 생겨 덧나 죽었다는데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이런 덧난 상처로 패혈증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그는 그로부터 반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 외에도 발굴 현장에서 코브라가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와 카나본 경이 죽자 그의 애견이 구슬프게 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 죽었으며 카이로에 정전에 발생했다는 괴소문도 떠돌았다. 하지만 전자는 기자가 지어낸 이야기였으며, 주인을 따라 곧 죽었다던 허버트 경의 애견도 실은 주인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카이로에서 정전이 발생했다는 것 역시 전력 기술력이 미비한 1920년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허버트 경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를 받은 듯이 운이 나쁘기는 했다. 19세기만 해도 이집트 측은 발굴 기술이 없다며 유물을 찾아내면 절반 이상은 그 발굴단의 조국으로 가져가게 했었다. 게다가 이집트는 프랑스를 상대로 오벨리스크를 시계와 교환[7]했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 유물을 우습게 봤기에, 19세기에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었다면 대부분의 유물들이 지금쯤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시 이집트인들은 이슬람교와 무관한 고대 이교도의 흔적은 마음대로 하라고 할 정도로 유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이집트인들도 자국 문화재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투탕카멘의 모든 유물은 해외로 반출할 수 없었다. 허버트 경은 한때 발굴을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로 재정 상태도 안 좋았는데, 병든 상태에서 발굴 현장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이집트로 왔다가 유물은 못 가져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8]

4. 여담


[1] 2021년 기준 한화 약 935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2] 그의 손자인 7대 카나본 경은 1969년부터 2001년까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승마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을 정도다. [3] 당시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이었다. [4] 심지어 이때 카나본 경은 사업 실패가 겹치면서 재정 상태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5] 참고로 이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 직전 더 타임스에 무덤 발굴과 관련된 독점 보도권을 팔아치워버렸는데, 이때문에 심지어 이집트 현지 언론들조차도 빨리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이집트 고고당국으로부터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6] 특히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 경이 이 소문을 대거 부풀리면서 더더욱 신빙성을 얻으면서 퍼져나갔다. [7] 해당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참고로 해당 시계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고장났다. [8] 당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장 알 이븐 하지 라우드의 고집이 워낙 강했다. 참고로 그는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조수를 지낸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