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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함안 조씨[1] |
출생 | 1876년 7월 7일 |
경상도
함안도호부 대곡면 사랑목 (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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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9월 20일 (향년 74세) |
경상남도 함안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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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6년 7월 7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대곡면 사랑목(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19일 조성규는 함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같은 마을인 사촌리의 조경식· 조상규(趙相奎)· 조형규(趙炯奎)·조용효(趙鏞孝)·조정래(趙正來) 및 소포리의 이재형(李在蘅) 등과 함께 피신하여 군북면 장날인 이튿날 20일을 이용,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군중이 3천여명으로 불어나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부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탄을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조성규도 이때 체포되어 이후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9월 20일 사망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27세 규(奎)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