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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호는 강구, 이명은 조청해, 최국선이다.2. 생애
1884년 11월 7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진면 남제동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이듬해 세려를 받았으며, 1914년부터 의주군 고진면 남제, 용상, 낙원 등 세 교회 조사로서 목회 활동을 벌였다. 1916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9회로 졸업하였으며, 그해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남제, 용상, 낙원 세 교회 목사로서 계속 시무하였다.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였고,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 참석했다.1919년 8월부터 상해한인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김병조, 송병조, 장덕로, 방효원 목사 등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끌었다. 1920년 임시정부 특파원으로서 서간도 일대를 돌며 연통제 및 교통군 활동상황을 점검했다. 당시 과격한 무장항일투쟁을 주장했기 때문에 '군인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921년에는 대한적십사회 상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22년 12월 18일에 개최된 중한호조사 제3회 이사회에서 주임을 맡아 자금 3천원을 조달하여 '고려인산팜매점'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토의 결과 먼저 호조사에서 약간의 자금을 모아 시험적으로 판매하여 그 성공 여부를 본 다음 계획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고려인삼의 중국수출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이용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1]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점진적으로 개조하자는 '개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이승만이 이끄는 구미위원부가 독립군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을 적용하여 이유필, 최창식 등과 함께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이후 인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상해 동포 자녀 교육을 맡았으며,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위해 김구, 여운형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한국노병회'를 설립, 이사 겸 교육부장을 맡아 군인 양성 및 독립운동 비용 조달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원창공사를 설립, 한국의 인삼, 사과 등으 수입하여 팔고 중국산 물건을 한국으로 수출해서 벌어들인 자금으로 군자금에 충당하였다.
1924년 3월 27일 윤기섭이 의정원 의장직을 사면하자, 부의장이었던 그가 제8대 의장을 맡았으나 얼마 안가 사임하였고, 12월 17일부터 1925년 7월 8일까지 제3대 학무부장을 맡았으며, 1925년 3월 27일부터 1925년 7월 7일까지 제 10대 교통부장, 1926년 8월 30일부터 12월 9일까지 제8대 법무부장, 1927년 8월 19일부터 1928년 즈음까지 제10대 법무부장을 맡았다. 1927년 4월 11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에 참석해 홍진, 이동녕, 조완구, 송병조, 김규식, 조봉암, 정백, 안태근 등 25명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1929년 상하이에서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직접적인 독립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기독교 신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고, 1932년 4월 훙커우공원 의거 직후 진심으로 존경하던 안창호가 전격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자 세상에 대한 미련을 잃었다고 한다.[2] 이후 그는 독립운동에 관심을 끊고 인삼 공사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가 변절하여 일제에게 아첨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급기야 1933년 6월경, 아나키스트들은 조상섭의 집에 잠입하여 일가족을 위협해 인삼 2상자를 강탈하여 도주했다. 조상섭이 이에 분노하여 아나키스트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자, 아나키스트들은 다시 조상섭의 집을 습격하여 조상섭으로부터 사죄를 받아내는 동시에 그의 재산을 추가로 강탈하려 하였다. 그들은 1935년 1월 21일 조상섭의 집을 재차 습격하였으나,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조상섭이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했다.[3] 이후 일제 치하의 상하이에서 쭉 지내다 1941년경 한 차례 귀국해 안창호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1942년경 상하이에서 사망하였고, 쑹칭링 능원의 외인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 바로 옆에 안장되었던 안태국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봉환되었지만, 그는 말년에 변절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아서 현재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예우 비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4]
3. 참고 문헌
- 김광재, <일제시기 상해 고려인삼 상인들의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1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기독신문
-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유해 15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