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명신 趙范 | 조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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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충헌(忠憲) |
성 | 조(趙) |
이름 | 범(范) |
자 | 무중(武仲) |
호 | 중암(中庵) |
생몰 | 1183년 ~ 12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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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송의 장군으로 조방(趙方)의 장남이며 조규(趙葵)의 형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자를 배출하였지만 그는 동생과 함께 장군이 되어 항 금(抗金)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항 몽(抗蒙)전쟁에서 대응에 실패하여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2. 생애
조범은 어렸을 때부터 군대에서 자랐다. 가정(嘉定) 13년(1220년), 조범은 조규와 함께 고두(高頭)에서 금군을 공격해 전멸시켰다. 그 이듬해에 남송에서 군대를 일으켜 금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당주(唐州), 등주(鄧州)를 공격하자 조범은 조규와 함께 남송의 감군(監軍)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금군을 또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조범 형제가 금군을 거듭 격파하자 조정에서는 형제에게 나란히 제치안무사(制置安撫司)의 일을 맡게 하였다.가정 15년(1222년), 부친 조방이 죽자 조범은 직비각(直祕閣), 통판양주(通判揚州)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군기감승(軍器監丞)이 되었으며, 또 그 다음 해에는 지광주(知光州)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가정 17년(1224년),조정에서 조범을 불러들이고 그를 지대종정승(知大宗正丞), 형부시랑(刑部侍郎), 식장작감(試將作監) 겸 권지진강부(權知鎮江府)에 임명하는 한편 직휘유각(直徽猷閣), 지양주(知揚州), 회동안무부사(淮東安撫副使)의 관직도 더해주었다.
이 무렵에 유전(劉全)과 왕문신(王文信)은 군대를 이끌고 가족들과 함께 양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지양주에 임명되어서 양주로 부임하게 된 조범은 그들의 군대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범은 두 사람이 거느린 병사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여 흩어지게 될 것을 걱정하였고, 이에 먼저 군대에 음식을 베풀어서 병사들을 먹였다. 유전과 왕문신이 매우 기뻐하자 조범은 그들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초주(楚州)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조범이 서희직(徐晞稷)에게 편지를 건네주고 두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니 과연 두 사람은 조범의 뜻대로 돌아갔고, 조범은 두 사람에게 두터운 포상을 내려주었다.
손해(孫海)라는 자 또한 8백여 명을 이끌고 양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조범 또한 마찬가지로 그를 돌려보냈다. 또한 조범은 양주의 병장기와 군마, 병사를 각각 3천씩 더해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힘과 기운이 강한 자들을 직접 차출하여 노역에 충당하였다. 조범은 양주의 백성들에게 봄과 가을은 농사를 짓고, 가을과 겨울에는 군사훈련을 하게 하여 그들을 반년 동안 병사로 만들었는데, 이로써 외적을 방비하였다.
팽의빈(彭義斌)이 그의 부하인 통령(統領) 장사현(張士顯)을 조범에게 보내와서 이전(李全)이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렸고, 함께 방법을 마련해서 이전을 토벌하자고 요청해왔다. 이에 조범은 제치사(制置使) 조선상(趙善湘)과 승상(丞相) 사미원(史彌遠)에게 이전을 토벌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두 사람 모두 듣지 않았다.
보경(寶慶) 2년(1226년) 봄, 조범은 봉사(奉祠)의 일을 맡았고, 그 이듬해에 지안경부(知安慶府)로 임명되었으나 임지로 가기도 전에 지지주(知池州)로 관직이 고쳐졌다. 또한 조정에서는 조범에게 강동제거(江東提舉)의 관직을 예전처럼 계속해서 맡도록 하였다.
소정(紹定) 원(元)년(1228년),시장작감(試將作監), 지진강부(知鎮江府)로 관직이 옮겨졌다. 소정 3년(1230년),모친상을 당하게 된 조범은 관직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조정에서 거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직휘유각, 회동안무부사 등 조범이 이전에 맡은 바 있던 관직들을 모두 복구시켰으며,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의 관직을 더해주고 장복(章服)과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이때 이전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조범은 외적에 대비해야 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니 조정에서 2만 명을 넘지 않는 선에서 군대를 이끌도록 허락하였다.
조범은 조선상에게 글을 보내서 이전에 대해 경고했으나, 이 무렵에 조범은 이미 이전을 토벌할 채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결국 조범 형제가 이전을 토벌하여 죽이자 조정에서는 조범을 병부시랑(兵部侍郎), 회동안무사(淮東安撫使) 겸 지양주 겸 강회제치사참모관(江淮制置司參謀官)으로 승진시키고 이전의 본거지였던 회동 지역을 수복하게 하였다. 그 뒤에 이부시랑(吏部侍郎)의 관직이 더해졌으며, 또 공부상서(工部尚書), 연강제치부사(沿江制置副使), 권리사(權移司) 겸 지황주(知黃州)로 승진하여 회서제치부사(淮西制置副使)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서 조범은 양회제치사(兩淮制置使)로 임명되어 회수(淮水) 일대의 모든 군대를 절제(節制)하게 되었으며, 연강제치부사의 관직도 계속해서 맡았다.
단평(端平) 원년(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조정에서는 금나라가 차지했었던 북송의 옛 수도들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신중론자였던 조범은 원정을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경하관섬선무사(京河關陝宣撫使), 지개봉부(知開封府), 동경유수(東京留守) 겸 강회제치사(江淮制置使)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입락군(入洛之師)이 몽골군에게 크게 패배해 궤멸당하여 원정이 실패로 끝나게 되고 몽골군의 침공이 기정사실화되자 조범은 관직이 경호안무제치사(京湖安撫制置使) 겸 지양양부(知襄陽府)로 옮겨져 양양에 부임하게 되었다.
조범은 양양에 부임하자 왕민(王旻), 번문빈(樊文彬), 이백연(李伯淵), 황국필(黃國弼) 등에게 의지하고 그들을 심복으로 삼았는데, 몽골군이 양양으로 침공해오자 번문빈은 형편없는 군대 지휘로 허점을 보여주었고, 왕민과 이백연은 아예 몽골군에 투항하니 결국 양양이 함락되었다. 조범은 이 일로 탄핵을 당하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물러났으며, 조정의 명령에 따라 견녕부(建寧府)로 옮겨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가희(嘉熙) 3년(1239년), 조정에서 조범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입궁하여 황제를 알현하게 하였다. 가희 4년(1240년), 조범은 지정강부(知靜江府)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에 집에서 죽으니 향년 5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