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마리조르주 피카르 Marie-Georges Picqu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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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4년 9월 6일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 |
사망 | 1914년 1월 19일 (향년 59세) |
프랑스 아미앵 |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프랑스 육군 |
1872년 ~ 1902년 1906년 ~ 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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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계급 | 육군 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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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 드레퓌스 사건 당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드레퓌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2. 생애
1854년 9월 6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리 샤를 프랑수아 위베르 피카르(Marie Charles François Hubert Picquart)와 루이즈 앙리에트 멜라니 드브네스(Louise Henriette Mélanie Debeness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트라스부르의 군사 책임자였다.1856년 아버지가 게데르트하임으로 발령받으면서 그곳에서 6년 동안 생활하다가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한 뒤 그의 집안은 알자스를 떠났다.
1872년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874년 소위로 임관했다. 1년 뒤 중위로 진급했고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프랑스 국내를 오가며 복무하다가 1890년 고등군사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이때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제자로 두었다. 1893년 프랑스군 참모본부로 발령받았다.
3. 드레퓌스 사건 수사
1895년 피카르는 참모본부 정보국으로 발령받았고 중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된 가운데 그는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조사 과정에서 그는 페르디낭 발쟁 에스테라지가 기밀 유출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참모본부에서는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을 묻어버리려고 했고 피카르를 파리에서 쫓아냈으며 이 때문에 피카르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전전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는 자신의 지인인 루이 르블루아(Louis Leblois) 변호사에게 자신이 조사한 것을 알렸다. 1898년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되었다.
4. 드레퓌스 사건 이후
1906년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어 최고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이후 군대에 복귀하여 대령을 건너뛰어 준장으로 승진했고 조르주 클레망소의 내각에 들어가서 전쟁부 장관을 지냈다.1912년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를 훈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몇 달 전인 1914년 1월 낙마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