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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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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
2.1. 프로 출범 이전2.2. 대우 로얄즈 (1983~1987)
3. 대표 팀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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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광래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클럽 경력

2.1. 프로 출범 이전

진주시 봉래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축구를 그만두었다가,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다시 선수 생활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 경쟁을 뚫고 지역 명문 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는 이야기.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허정무와 함께 연세대 축구부의 중흥을 이끌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실업 축구단이었던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 1980년 상무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1982년 대우 축구단에 입단하였고, 다음해 슈퍼리그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축구 선수가 되었다.

2.2. 대우 로얄즈 (1983~1987)

대우 로얄즈에서 미드필더로 뛰었고, 정확한 패스로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을 얻었다.[1]

1983 시즌 전 치루어진 대통령배 전국축구에 출전하여 이태호와 콤비를 이루어 16강까지 갔지만 연세대학교의 철저한 마크로 4점을 실점하며 패배했다. # #

1983 시즌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여 그 해 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으며 첫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1984 시즌 4월 18일, 포항제철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허벅지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으나 7월 복귀했다. 7월 17일, 박창선에게 골을 연결하며 어시스트를 만들어냈다. # 리그 최종순위는 전 시즌과 똑같은 준우승

1985 시즌 개막 첫날, 이태호에게 절묘한 전진 패스를 연결해 이태호가 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했다. 그러나 1985년 월드컵 1차 예선과 많은 친선경기, 대통령배 국제축구 대전에 국가대표로 차출되며 리그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다. 리그 최종순위는 3위[2]

1986 시즌 월드컵, 아시안게임에 차출되며 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리그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했다. 1987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였다.

3. 대표 팀 경력

3.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7~1986)

사실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선수 조광래에 대해서는 어떠한 느낌의 편린조차도 잡을 수 없겠지만 선수 조광래는 10년간 국대 주전 자리를 맡아놓은 대선수였다. 1970년대 초중반 한국의 국대 시스템은 주전 팀 화랑과 비주전 팀 충무로 나뉘었는데 조광래는 연세대학교 시절 국대로 뽑힌 순간부터 은퇴할 때까지 화랑이었다. 선수 조광래의 킥과 패스는 현재까지도 정확성에 있어서 역대 최고로 회자되고 있고, 수비함에 있어서도 순간적으로 상대에게 접근하며 부담을 주는 수비에 능했다.

3.1.1. 김정남호 시절 (1984~1986)

3.1.1.1.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1986년 월드컵 24강 본선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후방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조에 이 대회 우승한 아르헨티나와 1982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가 같이 들어와버렸다.[3] 24강 본선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는 허정무 디에고 마라도나를 발로 걷어차가며 거칠게 수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르헤 발다노가 두 골을 넣으며 0:3으로 뒤지다가 후반 28분 박창선이 만회골[4]을 넣어 1:3으로 패배했다.

24강 2차전에서는 이 대회 16강 15위팀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전반을 0:1로 마쳤지만 후반 25분 조광래의 어시스트 김종부의 동점골로 이어지며 1:1 무승부 첫 승점 1점을 기록하며[5] 16강 진출에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24강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조광래는 1:2로 지고있던 후반 37분에 자책골을 넣는 바람에 박빙의 승부에서 대한민국은 2:3의 점수로 패배하고 32년만의 월드컵에서 최종순위 20위로 마쳤다. 조광래의 자책골만 아니었어도 불가리아와 동률(2무 1패)이지만 다득점(한국은 +4-6, 불가리아는 +2-4)에서 불가리아를 제치고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광래의 자책골이 결정타가 되었지만 지난 54월드컵때 보다 선전하였고, 한국은 승점 1점 1무 2패 86월드컵 20위로 마쳤다.[6][7]
3.1.1.2.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월드컵에서 자책골의 쓴 경험을 뒤로 하고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을 끝으로 조광래는 은퇴를 결정한다. 허나 조광래는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 연속으로 골을 넣어 금메달을 목에 걸며 엄청난 경기력을 과시했다. 특히 조광래는 결승 사우디전을 자신 최고의 경기로 꼽고 있는데, 경기장을 누비며 전반 13분 발리슛으로 선제골을 작렬해 2:0으로 게임을 지배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사우디 아라비아는 당시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팀이었다. 84올림픽 본선 진출, 84아시안컵 우승, 88아시안컵 우승, 92아시안컵 준우승, 94월드컵 16강 12위, 96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시안 게임은 A매치 대회였는데, 이런 아시아 최고의 팀을 상대로 조광래가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홈경기에서 우승한 것이다.

우승 후 조광래는 관중들에게는 박수를, 병역을 면제받은 후배들에게는 헹가레를 받는 최고의 순간에서 은퇴 선언을 했다. 감독으로는 몰라도 선수로는 한국축구사에 레전드급 대선수임은 틀림 없다.

4. 플레이 스타일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하나. 현역 시절에는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8] 시야가 넓고 킥이 좋아 공을 정교하고 빠르게 동료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좌우 측면으로 휘어지는 패스는 당시 한국 최고였다. 또한 볼 소유 능력이 좋아 상대에게 볼을 잘 뺏기지 않았다.

뛰어난 축구지능과 경기 조율 능력, 정확한 패스, 거기다 많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전방 압박과 수비력이 더해져 공수를 넘나들며 10여년간 대표팀 부동의 주전으로 군림했다.

조광래는 체구가 작고 피지컬이 뛰어나지 않았으며 스피드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싸움에 능했고 전방 압박과 터프한 태클, 대인마크로 흐름을 잘 끊었다. 거기다 최대 속력은 평범했지만 순간 속력은 대표팀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다만 득점력이 좋은 편은 아니여서 중거리 슛을 때리거나 프리킥을 차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속팀과 1986 월드컵에서 플레이메이커 콤비로 활약했던 박창선이 중거리슛에 뛰어났고 뛰어난 피지컬과 체력으로 좋은 기동력을 보여준 것과는 반대.

5. 기록

5.1. 대우 로얄즈

5.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9]

5.3. 주요 개인 수상

5.4. 표로 보기

198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박윤기
FW
이길용
FW
이춘석
FW
김용세
MF
조광래
MF
박창선
DF
박성화
DF
김철수
DF
장외룡
DF
이강조
GK
조병득

[1] 이 링커라는 말은 '이어 주는 사람'식으로 해석됐고 지금 식으로 말하면 중앙 미드필더, 그 당시 식으로 말하면 '플레이메이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2] 2위인 포항제철 아톰즈와 승점이 같았으나 득실차에서 밀려 3위가 되었다. [3] 참고로 톱시드 제도는 이미 1974년 서독 월드컵 때부터 도입 중이었다. 다만 피파 랭킹 같은 게 있을 때가 아니여서 전 대회 성적을 기반으로 했다. 1986년 월드컵 탑 시드는 개최국 멕시코와 전 대회에서 4강에 들었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와 나머지 한 자리는 브라질이 차지했고 2번 시드를 보면 잉글랜드, 소련, 우루과이, 스페인,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이었다. 폴란드가 왜 톱시드인지 의아할 수 있지만 당시 폴란드는 1974 월드컵부터 1982 월드컵까지 3위 두번과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78 월드컵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1982 월드컵 당시 12강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이탈리아를 만나는 헬대진에 걸려 탈락(11등)하는 바람에 1986 월드컵에서 불운하게 2번 시드로 밀려있었다.이를테면 순수 성적순으로만 시드를 배정해서 생긴 일로 2006년 월드컵으로 따지자면 2002년 월드컵에서 미국이 프랑스보다 높은 순위로 높은 시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4]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골 [5]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 [6] 21위는 EPL 멤버로 구성된 북아일랜드가 86월드컵 21위로 마쳤으며, 한국은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86월드컵 20위를 기록했다. [7] 사실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당시 선수가 골문으로 쇄도하는 것을 막다가 그렇게 되었다. 마크를 하지 않았으면 어차피 그 선수가 넣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에 맞고 들어간 거라서, 만약 노 골이 되었다 해도 페널티킥이 선언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8] 끊임없이 뛰어서 독일 병정, 악바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9] 1986 FIFA 월드컵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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