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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3:07:43

제13무장산악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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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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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무장척탄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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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
32 SS무장척탄병사단
1월 30일
33 무장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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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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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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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1]
13.Waffen-Gebirgs-Division der SS „Handschar“(kroatische.Nr.1)
파일:13th_SS_Division_Logo.svg.png
창설일 1943년
해체일 1945년 5월 9일
소속 무장친위대
규모 사단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사단의 창설3. SS 의용병의 반란4. 작전 투입5. 편제6. 헝가리 방어전7. 평가

[clearfix]

1. 개요

무장친위대에 속해 있던 보슈냐크인이 주가 된 외인부대. 비독일계 무장친위대 사단이었기 때문에 SS는 달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점령 시기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못지 않게 이 쪽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사단의 창설

유고슬라비아 침공 직후인 1941년 4월에 독립한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인구 630만 명의 소국으로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인이 330만 명,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인이 200만 명, 무슬림 보슈냐크인이 70만 명으로 복잡한 국가 형태를 가졌다. 보슈냐크인은 수적으로 열세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크로아티아 내무성 직할부대 우스타샤와 세르비아 왕정복고주의 의용군 체트니크 쌍방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등 보슈냐크인의 불만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었다. 친위대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이 불만을 대 파르티잔전에 이용할 것을 계획하였고 아민 알후세이니의 도움 하에 1943년 2월 10일 총통명령이 떨어져 약 15,000명의 보슈냐크인 의용병으로 1개 SS 사단 편성이 개시되었다. 편성지는 프랑스 리옹 남쪽의 멘데 주변으로 정해졌고 '크로아티아 SS 의용산악사단'으로 명명되었다. 8월 9일에는 카를-구스타프 자우베르츠바이크(Karl-Gustav Sauberzweig) SS 소장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초기 사단편성은 2개 산악엽병연대(4개 대대), 1개 산악포병연대(4개 대대), 1개 전차엽병대대(3개 중대), 1개 정찰대대, 1개 고사포대대(3개 중대), 1개 공병대대, 1개 보충산악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3. SS 의용병의 반란

1943년 9월 17일, 무장 SS가 생긴 이래 미증유의 사건, SS 의용병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보슈냐크인이었던 SS 공병대대 소속의 소대장 페리드 자니치(Ferid Džanić) SS 상급사관후보생으로, 드레슨 SS 공병학교 시절부터 세르비아 인민해방전선과 프랑스 무장 레지스탕스 마키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소대장 2명이 동조하였고, 16일 밤의 보초임무 당번병 14명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17일 새벽 5시에 주둔군이 묵던 호텔 '모단'에 침입하여 독일인 장교, 하사관 9명을 구속하고 SS 공병대대장을 포함한 5명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역시 보슈냐크인인 SS 공병중대장 할림 말코치(Halim Malkoč) SS 중위의 설득에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결국 긴급 소집된 제1공병중대 제1소대가 호텔로 들이닥쳐 자니치 SS 상급사관후보생외 1명이 사살되었고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반란에 가담한 병 14명은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고, 정치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825명의 장병은 무장해제되어 다하우 수용소를 거쳐 대부분이 토트 기관에 편입되었다. 사단은 독일 본국의 노이하마로 이동되었다. 한편 반란부대의 설득에 최후까지 응하지 않은 말코치 SS 중위에게는 1급 철십자장이 수여되었으나 1947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작전 투입

1943년 10월, 사단은 SS 제13 의용산악사단으로 개칭되어 2개 산악엽병연대는 SS 제27, 제28 의용산악엽병연대(SS27, SS28GJR)로, 나머지는 부대번호 13이 부여되었다. 1944년 2월초, 마침내 110량 이상의 열차에 탑승한 완전무장 병력 약 2만명은 빈을 경유하여 크로아티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사단은 3월 10일부터 사페 북방의 파르티잔 출몰 지역에 투입되어 제42 엽병사단과 함께 소탕전을 전개하였고, 5일후에는 사페강을 돌격보트로 도하하여 도리나강을 따라 좌익은 SS27의용산악엽병연대, 우익은 SS28의용산악엽병연대가 중심이 되어 남진하였다.

그 후 사단은 4월 11일부터 '부활절 달걀' 작전에 참가하여 츠보니크 부근에서 제Ⅲ 보스니아 파르티잔 군단과 교전하였다. 부대 통솔은 극히 힘들어 약탈과 살해 등이 자행되었지만 소수의 독일인 장교로는 올바른 보고가 되지 않았다. '3년전 파르티잔에 약탈된 소 3마리를 찾기 위해 '사단의 일부에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등 작전 지휘 또한 혼란스러웠다. 1944년 7월 7일 '만월' 작전이 실시되어 포사비아 지방에 집결한 3개 파르티잔 사단군에 대하여 사단은 북방에서 공격을 가하였다. 한편 각 연대의 제Ⅳ대대 등의 사단 주요 병력이 새로 편성된 SS 산악사단 '카마'의 모체로 전출되고, 자우버츠바이크 SS 소장도 SS 제9 산악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새 사단장에는 SS27GJR 연대장인 데지데리우스 함펠(Desiderius Hampel) SS 소장이 취임하였다. 이무렵 파르티잔에 의한 도로망 파괴공작이 급격히 증가하여 철도 복원과 보안이 사단의 주임무가 되었다. 하지만 사단의 사기는 저하하여 탈주병이 잇따라 병력은 장교 346명, 하사관 1,950명, 병 11,967명으로 감소하였다. 여기에 비해 사단의 장비는 일급품이었다.

5. 편제

사령관: 데지데리우스 함펠(Desiderius Hampel)

이후 2차에 걸쳐 파르티잔 소탕작전에 참가한 사단은 사단본부는 자그레브에, 나머지 부대는 아그람~시리 가도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21일, 이번에는 사단본부 보안중대가 반란을 일으켜 101명의 병이 20mm 고사포 3문, 기관총 4문, 트럭 수량과 함께 파르티잔측으로 달아난 사건이 발생하였고, 10월 16일부터 23일의 1주일동안 자그레브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서 소총 881정, 기관총 22정, 권총 104정과 기관단총 15정이 사라져버리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6. 헝가리 방어전

1944년 11월초, 헝가리의 아파틴 부근을 돌파한 소련군이 도나우 강 서측에 교두보를 마련해 남동전선 전체가 위기 상황에 빠졌다. 교두보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SS27의용산악엽병연대 제Ⅰ대대, SS28의용산악엽병연대 제Ⅱ, 제Ⅲ대대, SS 제13 산악포병연대 제Ⅲ대대와 공병대대의 일부가 SS28의용산악엽병연대 연대장 한스 하케 SS 중령의 지휘하에 전투단 '하케'(Kampfgruppe Hanke)로 편성되어 바티나 교두보로 긴급수송되었다. 이것이 보슈냐크인 의용병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동부전선이었다. 하지만 교두보에 대한 반격은 모두 격퇴되었고, 처음 보내진 1,200명의 병력은 200명으로 감소하였다. 11월 30일, 소련군의 대공세로 전선이 붕괴되자 전투단 '하케'는 남쪽의 도리나 전선에서 구원하러 달려온 제1 산악사단과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혈로를 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9월에 프랑스에서 무장해제된 병력이 의용보조병으로 사역되었고, 즉시 교섭하여 전투단에 배속되었다. 12월에 전투단은 크로아티아에서 후퇴해 온 사단과 발크스 부근에서 합류하여 재편성이 행해졌고, 콘라트 대장 휘하의 제57군단에 배속되어 힘겨운 후퇴전 끝에 바라톤호 남방의 말가리타 진지까지 후퇴하였다.

1945년 3월 6일에 개시된 독일군 최후의 공세 '봄의 새싹' 작전에서, 발라톤호 남방전선에 있던 제2 전차군은 SS 제6 전차군의 주공세 개시와 동시에 견제와 양동작전을 겸해 보조공세를 실시하게 되었고, 제57군단도 중앙에 SS 제13 의용산악사단, 좌익에 제71 보병사단, 우익에 SS 제16 기갑척탄병사단 'SS 장관(Reichsfuher-SS)'의 서열로 나니카니쟈 부근에서 동쪽으로 공세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해빙으로 인한 진흙으로 고생하다 주공세력과 마찬가지로 실패하였다. 3월 27일 사단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이미 전선에서의 작전은 무리로 판단하여 후방의 방어선 구축 임무로 변경되었다. 4월 3일에 사단은 무르강을 도하하였고, 독일 국경을 건너 카크 부근에서 '제국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병력은 한줌의 보슈냐크인 의용병과 국민돌격대로, 반공주의 헝가리병과 미벌중대의 이탈리아병 165명이 보충되어 배속되었다.

보급은 상당히 악화되었지만 다행히 소련군의 주공격 목표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으로, 향했으며, 이 방면에는 2선급인 불가리아 제1군이 대치중이었다. 사단은 제57군단 일부, 즉 제118 엽병사단, 제71 보병사단과 함께 말부르크 동쪽에 간신히 방어선을 유지하였다. 1945년 5월 3일, 사단장인 함펠 SS 소장, SS27GJR 제Ⅱ대대장 알베르트 슈템베델(Albert Stenwedel) SS 소령, SS 제13 정찰대대장 헬무트 킨츠(Helmut Kinz) SS 소령, SS27의용산악엽병연대 연대장 카를 리케(Karl Liecke) SS 중령, SS28의용산악엽병연대 연대장 한스 항케(Hans Hanke) SS 중령, 이렇게 5명에 대해 장년의 수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2일후, 최후의 생존 보슈냐크인 의용병에 대해 행동의 자유가 떨어졌고, 사단 잔여는 3개로 나누어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5월 7일, 케라스도르프 부근의 '울스라 진지'에 도착하였고, 미군에 투항하여 종전을 맞았다.

7. 평가

SS 제13 의용산악사단 '한트샤르'는 무장 수준은 뛰어났지만 싸워야 될 이유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투의지는 바닥이었으며[2], 시시때때로 반란과 파르티잔과의 내통이 잇달아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전선에서 약탈 및 학살사건을 다수 일으켜 무장 친위대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싸움질도 못 하는 주제에 인종청소에 눈이 먼 이들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국방군의 경멸 1순위였다고 한다. 이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던 발칸반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전후 대부분의 생존병들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사형당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하여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중동전쟁 당시 아랍국가 측으로 망명하였다. 시리아 이라크는 한트샤르 사단 소속 무슬림 군인들을 구명하고 자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 오만의 전통적인 단검인 '한자르(خنجر‎)'에서 이름을 따왔다. 독일어 표기인 Handschar나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인 Handžar도 '한자르'에 가깝다. [2] 이는 카민스키 여단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