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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6:32:24

제임스 허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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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허턴
James Hutton
FRSE
국적 <colbgcolor=#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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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6년 6월 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797년 3월 26일 (향년 70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학력 에든버러 대학교 (졸업)
파리 대학교
레이던 대학교 (졸업 / M.D.)

1. 개요2. 생애3. 업적
3.1. 동일 과정설3.2. 화성론
4. 저서5. 평가6. 기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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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허턴은 영국 스코틀랜드 지질학자로, 흔히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근대 지질학 정립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대표적으로는 동일 과정설의 제창과 창조론 수성론이 주류였던 학계에 화성론을 던지며 화성암의 성인을 연구한 것이 있다.

2. 생애

제임스 허턴은 172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상인이었던 윌리엄 허턴과 사라 허턴의 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허턴은 10살에 에든버러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4살에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하였다. (이때 뉴턴의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1년간 변호사 밑에서 일하였으나 이후 포기하고 다시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745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마찰이 있으며 에든버러 대학은 휴교하였으며 스코틀랜드는 초토화되었다. 1747년 그는 파리 대학교로 옮겨 3년간 화학 해부학을, 그리고 레이던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749년 혈액 순환에 대한 가설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와 염화암모늄의 제조법 연구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1754년부터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농장에서 13년간 농사[1]를 짓는다. 이곳에서 농장 주위의 토양과 지질을 관찰하며 그는 지질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농장에서 암석이 풍화 작용을 받는 모습과 토양이 유실되는 모습을 보며 퇴적물들이 유체의 운동에 의해 지대가 낮은 바다 호수로 퇴적되어 퇴적암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768년부터 그는 고향 에든버러에서 토양 연구로 시작하여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연구와 경력을 쌓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화성론에 대한 기초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1787년 그는 영국의 애런(Arran) 섬을 방문하여 뉴턴 곶(Newton Point)에서 경사 부정합을 비롯하여 1788년 버윅셔(Berwickshire)의 시카 포인트에서 실루리아기 사암 데본기의 사암이 경사 부정합을 이룬 것을 보고 부정합이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후 1788년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라는 이름으로 책을 발표[2]하였으나 당시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사후인 1802년 그의 친구 존 플레이페어[3]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진다.

60대 중반부터 그는 요폐증을 앓다가 더 쇠약해졌고[4], 1797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업적

3.1. 동일 과정설

그는 '현재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과거 자연계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의 동일 과정설을 주장하였다. 당시 학계에 만연했던 격변설(Catastrophism, 과거에는 현재와 다르게 엄청난 규모의 지질학적 사건이 있었다는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설이었다. 물론 현재 지질학에서는 두 설을 모두 채용하고 있지만[5], 큰 틀은 허턴의 동일 과정설을 따른다.

현대에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창조론 수성론이 우세했던 시기인지라 대홍수에 의해 현대의 대륙 분포가 생겼다는 식의 주장을 비롯하여 과거는 현재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허턴 이후 연구를 거듭한 끝에, 동일 과정설은 찰스 라이엘에 의해 지질학 연구의 기본 원리로 정립되었다.

3.2. 화성론

18세기엔 모든 암석이 태초의 바다 하부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6]하는, 베르너를 필두로 하는 수성론이 대세였다. 나름의 논리적 구조도 타당했고 자연을 잘 설명해냈으며, 수성론에서 설명하는 결정 구조는 지구상 어딜 가나 발견되는 반면 마그마는 극히 지구상의 일부 부분에서만 나타나므로 수성론이 보다 지지받았다.[7] 더군다나 성경 노아의 홍수 기록과도 일치하여 많은 학자가 믿었고, 수성론은 18세기까지 학계 주류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허턴은 지각 밑에서 있는 운동에 의해 암석이 형성된다는 화성론을 주장했다. 그는 물체가 가열되며 팽창하듯, 지각 하부에서 가열된 암석이 융기되어 균열을 만들며 이곳을 통해 마그마가 뿜어져 나온다고 주장했다. 부정합이나 단층, 습곡 같은 지형이 마그마에 의한 운동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한 셈. 또한 지표의 물질들이 풍화와 침식에 의해 바다로 흘러가면 부족한 무게를 채우기 위해 지각이 융기한다는, 조산운동의 개념의 기초적인 발상 또한 제시하였다.

19세기에 프랑스 중부에서 화산 활동의 증거가 발견되며, 화산 분화구의 연구를 통해 과거 물에서 광물이 침전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던 현무암이 마그마가 굳어 형성된 것임이 밝혀졌고, 무엇보다 제임스 홀에 의해 녹은 현무암을 천천히 굳히며 보다 큰 조직이 형성되는 것을 보이며 화성론이 득세하게 되었다.[8]

이후 허턴의 주장은 찰스 라이엘[9], 윌리엄 휴얼 등이 이어받아 현대 지질학의 계보를 잇는다.

물론 그렇다고 허턴이 수성론을 완전 무시했던 것은 아니며, 1차적으로 화성 작용에 의해 암석이 형성되지만 2차적으로 물의 작용에 의해 암석이 생성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현대의 시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화산을 비롯한 화성 활동의 중요성을 최초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저서

5. 평가

현대 지질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6. 기타

스코틀랜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

7. 관련 문서



[1] 이때 농업 연구도 많이 하여 농업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2] 이후 1795년 삽화와 내용이 더 추가된 판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3] 그는 허턴의 책을 위해 유럽 전역을 조사하며 탐사했다고 한다. [4] 이때 쓴 책이 '지구의 이론'이었기에 읽기 많이 어려울 정도로 조악하게 쓰였다고 한다. [5] 전반적인 이야기는 동일 과정설로 설명하나, 운석 충돌과 같이 일부 사건은 격변설로 설명하는 식 [6] 가령 화성암의 결정 구조는 뜨거운 물이 식으며 물 속의 광물 성분이 침전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7] 전지구를 덮는 암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인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의한다. [8] 물론 이렇다고 하여 베르너와 그 제자들의 주장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다. 수성론은 아래 쌓인 암석이 더 오래 되었다는 지층 누중의 원리를 잘 설명해내며, 현대의 퇴적암 다수는 바다 밑에서 형성된다. [9] 공교롭게도 허턴이 죽던 해에 태어났다. [10] 정식 명칭은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Composition, Dissolutiu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