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에드가 "조니" 존슨(James Edgar "Johnnie" Johnson : 1915년 3월 9일~2001년 1월 30일)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공군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복무하며 영국 공군 공인 최고 격추 기록을 세운 파일럿이자 연합군 파일럿 중 독일 공군을 상대로 가장 많은 격추 기록을 올렸으며 자신의 모든 격추 기록을 독일 공군의 1선급 전투기들로 장식한 수퍼 에이스이다.2. 유년 시절
1915년 3월 9일에 영국의 이스트 미들랜즈(East Midlands)에서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제임스 에드가 존슨은 고향에서 성장하고 교육 받았으며, 노팅엄 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존슨은 22살에 엔지니어 자격증을 따내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책상물림 성격이 아니어서 운동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스포츠맨이었던 존슨은 럭비 경기 도중 쇄골이 부러졌고, 이 부상으로 운동선수의 꿈을 접고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던 전투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존슨은 토목기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받은 첫 급여를 들고 곧바로 비행 클럽에 달려가 조종 교육생으로 등록했을 정도로 비행기 조종을 하고 싶어 했었다.3. 두 번의 자원 입대
민간 비행사 자격증도 따놨겠다, 기세좋게 영국 공군의 보조 비행대에 훈련 조종사로 지원한 존슨이었지만, 공군 입대 절차에서 받게 된 정밀 신체검사에서 쇄골 부상이 문제가 되어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실망한 그에게 육군에서 징집 영장이 날아왔지만, 장교를 원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병대 뿐이었다. 또다시 공군에 지원한 그는 두 번째 도전에도 탈락하고 말았으나, 1939년 8월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으로 인하여 유럽 대륙의 전운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던 탓에 마침내 공군 입대를 허가받았다. 하지만 그의 골절상은 기초훈련을 마치고 새내기 공군 소위로 비행경력을 시작한 1940년 5월부터 10월까지 프랑스 전선과 영국 본토 항공전까지도 조종간을 잡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1940년 말에야 쇄골 수술을 받은 존슨은 그제서야 정상적으로 비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다행히도 조니 존슨은 전투조종사 경력의 시작부터 훌륭한 멘토이자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윙맨을 맡게 된 조종사가 바로 뛰어난 에이스이자 명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진 더글러스 베이더였던 것인데, 존슨은 귀신같은 조종술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닌 그를 따라다니며 공중전의 ABC를 충실히 배울 수가 있었다.
4. 57회의 실전, 38회의 승리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조니 존슨은 독일 점령하의 서유럽에서 끊임없이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이 시기에 디에프 침공,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벌지 전투를 고루 경험하고 마지막으로는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작전까지 모든 작전에 참가하며 수 십차례나 생사를 넘나들며 격렬한 공중전을 치러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의 계급은 공군 대령(Group Captain)에 비행단장이 되어있었다. 다만 이때는 직책계급이어서 종전 이후 소령으로 돌아갔다가 10년 뒤인 1955년에 다시 대령으로 진급했다.존슨은 공인 단독 격추만 헤아려도 34대를 기록해 RAF내의 최고 스코어는 물론 독일 공군을 상대로 최고 스코어를 올린 연합군 전투기 에이스가 된다. 추가로 공동 격추 7대, 비공인 공동 격추 3대, 10대는 중파, 지상 격파 1기를 기록했다.[1] 700회의 작전 출격을 거듭하면서 57회의 교전을 경험한 그는 교전 회수 대비 격추수로는 루프트바페의 수퍼 에이스들에게 지지 않는 격추의 명인이었다. 34대의 개인 단독 격추 기록은 메서슈미트 Bf 109 전투기 14대, 포케불프 Fw 190 전투기 20대로 격추 기록이 모두 전투기인 것도 모자라 그 상대 전투기들은 당대 최상위권의 성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던 고성능 일선 전투기들이었다! 그는 영국 공군에서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으로 손꼽던 Fw 190을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한 에이스이기도 하다.[2] 독일 전투기와 숱하게 싸워 이긴 존슨은 연합군 전투기 격추 최고 기록을 달성했던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 한 일이 있다. 선전을 위해 전과를 과장하거나 피해를 축소하는 경우가 왕왕이었던 당시였기 때문에 100% 양쪽의 주장을 신뢰하긴 어렵지만 과장 가능성을 제기하기엔 충분하다
나는 전투기 파일럿 중에서 가장 걸출한 격추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독일 에이스의 기록을 자세히 조사해보았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그가 최대의 전과를 거둔 날은 1942년 9월 1일로, 그는 이날 17대를 격파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8대는 단 10분간의 교전에서 격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RAF 보고서에는 이날 모두 합쳐 11대를 잃었을 뿐이고, 그중에서도 2대는 그 조종사가 언급하지도 않은
호커 허리케인이었다. 그나마 우리측 손해의 일부는 그의 전투기가 출격하기도 전에 입은 피해였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5. 사용기종
조니 존슨은 처음부터 끝까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만을 애용했다. 총 38기 격추 중 처음 7기 격추 기록까지는 IA, IIA, V형 등을 탔지만 이후부터 모든 공대공 전과는 IX형 기종으로 거둔 것이다. 22기 격추부터는 멀린66 엔진을 사용하는 IXB형을 탔다.6. 퇴역
조니 존슨은 종전 후에도 공군에서 복무를 계속해 한국 전쟁에도 참전해 F-80과 F-86을 몰았었고 1966년에 공군 소장(Air Vice Marshal)으로 명예롭게 퇴역했다. 노년에도 비행기 조종간을 놓기 싫어했던 그는 2001년에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대중 강연과 항공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했다.7. 기타
워썬더에서 붙일 수 있는 데칼인 Bader's Bus Co Still Running(베이더의 버스회사는 여전히 운행 중)이 이 사람 비행기에 써져있던 글귀였다. 1941년 베이더가 격추당해 포로로 잡히자 이를 기리기 위해 쓴 것.애칭인 조니 존슨의 철자는 Johnnie Johnson인데 조니라고 하면 Johnny라고 생각하는지라 종종 헷갈리기도 한다. 마침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공군 장교 중 별명이 Johnny Johnson인 사람이 있어서 더 헷갈리기 쉽지만 별 접점은 없다. 이 사람의 최종 계급은 공군 소령(Squadron leader)고 617 비행대대의 창설 멤버중 아직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1]
공동격추는 절반의 스코어인 3.5로 처리하여 단독 격추수와 합해 총 38기 격추로 기록된다.
[2]
Fw190이 처음 배치되었을 시점에서 영국 공군의 주력 기종은 스핏파이어 Mk.V였는데 이때 스핏파이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 주력기종에게 성능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시 배치된 Bf 109F형도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해볼만한 수준은 되었는데 Fw 190은 영국 공군이 손실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주간작전을 중단시키는 위엄을 과시했다! 물론 이후 스핏파이어 Mk.IX를 포함한 더욱 진보된 후계 기종이 배치되면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장 까다로운 상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