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태규(泰奎) |
본관 | 해주 정씨[1] |
출생 | 1880년 8월 13일 |
경상도
진주목 마동면 당촌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2] |
|
사망 | 1946년 8월 6일 (향년 65세) |
경상남도 진양군 | |
묘소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 갈마봉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의 9대손이다.
2. 생애
정준교는 1880년 8월 13일 경상도 진주목 마동면 당촌동(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에서 아버지 정광린(鄭光麟, 1843. 8. 12 ~ ?)[3]과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 梁氏, 1843. 2. 23 ~ ?) 양계세(梁桂世)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자식 없이 요절한 작은아버지 정광승(鄭光升, 1848. 8. 4 ~ 1872. 3. 11)에 입양되었다. 이후 대평면 내촌리로 이주하였다.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이강우·김재화(金在華)· 강달룡·박진환·박용근·강상호 등과 함께 진주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가며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하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 지역에 분산되어져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없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들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제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이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징역 3년형이 유지되었고, 결국 그해 9월 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에 취임하여 민족계몽을 계속하였다. 1946년 8월 6일 진양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정준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