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정경태(鄭敬泰) |
생몰 | 1878년 ~ 1911년 11월 22일 |
출생지 | 강원도 춘천군 |
사망지 | 경성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경태는 1878년생이며 강원도 춘천군 출신이다. 그는 1907년 7월 성익현 의병장의 도총장(都總將)과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강원도 울진, 삼척, 평해 등지에서 활약했고, 그해 9월에는 성익현과 함께 이강년 의병장에게 가담하기도 했다. 1907년 9월 25일 이상렬 등 의병 60여 명을 인솔하여 평해읍내의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고 일본 순사 백천공명(白川公明) 등과 교전 패퇴시킨 후 분파소를 파괴하였다.또한 1907년 9월 10일에는 휘하의 김범수에게 의병 20명으로 편해 군아의 순검과 통역을 잡아오게 하였으며, 9월 13일 의병 80여 명을 직접 인솔하고 울진으로 들어가 평해에서 포박해 온 순검과 통역을 총살하려 할 때 울진에 상륙한 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퇴각했다. 0월 12일에는 성익현과 함께 의병 270여 명을 거느리고 평해읍내의 군아를 습격, 군자금 4백 원을 접수하였으며, 10월 18일 성익현, 변학기 등과 연합하여 의병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울진읍내의 경무고문분견소를 습격하여 8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들을 패주시키고 분견소 군청 우체소 등을 불태우고 많은 재물을 노획하였다.
이후 1908년 5월에는 이강년, 성익현, 김상태(金尙台) 등과 연합하여 울진, 삼척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성익현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그는 관동창의대장을 칭하고 봉화, 영양, 안동,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얼마 후 체포된 그는 1911년 8월 10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불복했지만 10월 25일 경성공소원, 1911년 11월 10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고 11월 22일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정경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