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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옥(鄭景玉, 1903. 5. 24~1945. 4. 1) 은
감리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전남
진도군 진도면 교동리 123번지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며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다. 출옥 후 상경하여 서울
YMCA 영어과를 수료한 후, 1923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士大学)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2학기 개강을 앞둔 그 해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사건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편입하고 1927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7년 9월 도미,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 있는 개렛(Garrett)신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자 롤(H.F. Roll)의 지도를 받아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석사(B.D) 학위를 받았다. 1929년 9월 계속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로 1931년 5월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하여 박사 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모교의 부름을 받고 1931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조직신학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3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정교수가 되었으며, 1937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명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교수 취임 이후 강의에도 주력했거니와 집필에도 힘을 기울였다. 협성신학교 교지인 〈신학세계〉의 주간을 맡으면서 1932년에서 1936년에 걸친 5년간, 무려 60여 편의 신학논문을 발표했고 한 권의 저서(《기독교의 원리》, 1935)를 내놓았다. 이 외에도 YMCA에서 발간한 〈청년〉지, 류형기 박사가 주간으로 펴낸 〈신생〉지에 여러 논문과 일기, 수상, 설교 등을 발표했다.
한편 열정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된 그는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이 기간중 그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와 조직신학 개론서인 《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집필하였다.
요양을 마친 후 1939년 모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1941년 3월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던 중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요양하게 되었다. 1942년 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한국인 친미파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친미파로 지목되어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여기서 일제는 그에게 일본적 기독교의 논리적 구성을 강요하였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논리와 문장이 유독 어려운 \"일본적 기독교론\"을 쓰게 된다(이 논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국 일본적 기독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천배, \"고 정경옥 교수의 편모\", 〈기독교사상〉, 1958. 5).
이 공로로 풀려난 그는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특히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토\"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5년 3월, 두 차례나 수술받은 복막염이 악화되어, \"곧 날이 밝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그 해 4월 1일, 불과 광복을 4개월여 앞두고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42세,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언명하였듯이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주된 저서에서 즐겨 인용한 신학자들은 역시 슐라이어마허, 리츨, 바르트 등이다. 특히 \"위기의 신학\"(1932), \"위기 신학 사상의 연구\"(1936) 등에서 바르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한편 성서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당시 고도로 발전되었던 역사적, 문학적 비판연구를 채택했다. M. 디벨리우스와 R. 불트만의 형식 비판연구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바로 정경옥이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역사나 과학적 지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성서가 인간의 책이요, 종교문학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즉 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을 찾고 이에 복종하는 생활의 경험을 역사, 율법, 편지, 시가 등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성서이기에, 마땅히 문학적, 역사적 연구 등을 통해 그 진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어떤 통일된 신학체계나 학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롭게 형성해 가는 것이 개신교의 원리라고 보는 신학적 경향이다. 이런 점에서 정경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또한 그의 신학적 공헌은 무엇보다도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원리》 서론의 요점만을 간추려 보면, 그는 먼저 조선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질을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선교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전자를 경건주의라 한다면 후자는 복음주의다.\" 또한 \"교리는 구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우리가 믿는 바를 선언한 것이요, 결코 우리 교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교리적 경험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는 결심뿐이다.\" 누구든지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이상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 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저서:《기독교의 원리》, 감리교신학교, 1935;《그는 이렇게 살았다》, 평양애린원, 1938;《기독교신학개론》, 감리교신학교, 1939;《감리교교리》,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39;《신비경험의 가치》, 삼각산기도원,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