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楮子島
1. 개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중랑천 하구 사이에 있었던 삼각주 형태의 섬.
중랑천 하구에 자연적으로 생겨났지만 강남 개발과 함께 사라진 하중도이다.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섬이라서 기우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이름의 유래는 닥나무가 많이 자란 섬이기 때문에 닥나무 저(楮)가 붙었다[1].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거주했으며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지만,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지을 때 한강 수면을 매립하느라 저자도의 흙을 준설토로 쓰면서 저자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 역사
조선시대 왕실 소유의 땅이었다. 섬의 크기가 커 왕실 소유와 사대부 문인 소유의 별서(별장)과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이곳에서 행사가 열거나 풍류를 즐기는 데에 이용되었다. 문학작품과 그림을 통해 저자도의 풍경을 유추해볼 수 있다.[2]
1946년의 지도
1964년에 촬영된 사진
굉장히 넓은 모래톱임을 확인할 수 있다.
2.1. 유래
예전에 강남구 청담동 강변에는 닥나무를 전문적으로 생산했었던 닥점이라는 자연촌락이 있었다. 닥나무 껍질은 한지의 원료인데, 근처 섬에도 역시 닥나무가 많아서 그 섬을 닥나무 저(楮)자를 따서 저자도라고 불렀다. 흔히 무동도(舞童島)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 무동도는 저자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밖에 저자도를 압도(鴨島)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2.2. 과거
400여 년 전 저자도는 모래벌로 된 평지와 바위를 포함한 둔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수가 나거나 갈수기에 따른 지형 변화로 인해서 한시적으로 강남의 모래벌과 연결되기도 했다. 저자도의 규모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서 2㎞, 남북 885m의 폭에 넓이가 118만㎡에 이르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봉긋한 등성이와 넓은 밭과 집들이 있는 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서 저자도의 모양이 바뀌었으며, 1963년부터 뚝섬 제방공사를 하면서 저자도의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저자도와 압구정동 사이의 한강 매립공사 결과 저자도의 대부분이 가라앉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1757년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경기도, 광주조에는 저자도에 약 20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61년(세조 7) 저자도의 얼음을 갈무리했으며, 1550년(명조 5) 윤 6월에는 큰 비로 인해 경기도 광주군의 삼전도(三田渡)와 저자도 등지의 민가 10여 가구가 허물어지고 100여 가구가 물에 잠긴 기록이 있다. 또한 1663년(현종 5) 1월에는 사노(私奴)가 동네 사람[世玄]과 다투다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십 여 가구 이상의 민가가 저자도에 마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41년 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현재 이 섬의 총면적은 36만 평이며 그중 민간 소유지는 넓이 8만 6,000평으로 약간 잡초가 나있을 정도이고 그 밖의 땅은 모두 평탄한 모래벌이다’라고 기록되었다.
2.3. 문학 작품에서
홑적삼 짧은 갓으로 연못가에 앉으니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 석양 녘 서늘함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달이 떠올라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향기 남아 있구나
-「저자도」,한종유,『복재집(復齋集)』-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 석양 녘 서늘함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달이 떠올라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향기 남아 있구나
-「저자도」,한종유,『복재집(復齋集)』-
정자가 남쪽으로 큰 강을 내려다 보는데
저자도 작은 섬이 뚜렷하게 물 가운데 있다.
물구비가 여기서 돌고 흰 모래, 갈꽃의 경치가 특별하다.
- 정인지 -
저자도 작은 섬이 뚜렷하게 물 가운데 있다.
물구비가 여기서 돌고 흰 모래, 갈꽃의 경치가 특별하다.
- 정인지 -
낙천정 아래 백사장 길을 지나니
저자도 가로 강물이 푸르기도 하다
저녁나절 노새 등에 앉아 채찍을 옆에 꾲아 두고
깊은 시상 가다듬노라니 두 어깨가 으쓱해진다.
- 서거정,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 산천누정조 사가정시집 -
저자도 가로 강물이 푸르기도 하다
저녁나절 노새 등에 앉아 채찍을 옆에 꾲아 두고
깊은 시상 가다듬노라니 두 어깨가 으쓱해진다.
- 서거정,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 산천누정조 사가정시집 -
동호의 좋은 경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자도 앞 머리가 다시 더 절기하다네.
절을 찾아 나가 솔잎 떨어진 길을 걷고
어촌 오가며 살구꽃 울타리를 보고 또 본다.
모래 따라롭고 풀이 연하니 원앙새 한 쌍 졸고 있고
물결 가늘고 바람 잔잔하니 돛대 하나 천천히 움직인다.
봄 흥과 봄 수심을 다 읊지 못했는데
압구정 언저리에 석양이 기우누나.
- 심수경, <청천당 유한록> -
저자도 앞 머리가 다시 더 절기하다네.
절을 찾아 나가 솔잎 떨어진 길을 걷고
어촌 오가며 살구꽃 울타리를 보고 또 본다.
모래 따라롭고 풀이 연하니 원앙새 한 쌍 졸고 있고
물결 가늘고 바람 잔잔하니 돛대 하나 천천히 움직인다.
봄 흥과 봄 수심을 다 읊지 못했는데
압구정 언저리에 석양이 기우누나.
- 심수경, <청천당 유한록> -
춘삼월 강 마을 가는 곳마다 꽃인데
푸른 기 달고, 술 맛 좋다며 꽃을 찾아들 나간다.
돛을 내리고 사람들은 서산 그림자 따라 들어가는데
버드나무 선 문 앞에 길이 하나 가로 놓였네.
- 백광훈, <옥봉집> 상 -
푸른 기 달고, 술 맛 좋다며 꽃을 찾아들 나간다.
돛을 내리고 사람들은 서산 그림자 따라 들어가는데
버드나무 선 문 앞에 길이 하나 가로 놓였네.
- 백광훈, <옥봉집> 상 -
잔잔한 호수에 흐르는 물 기름같이 미끄러운데
좋은 친구들 손에 손잡고 낚시배로 오르네.
늦은 비 옷을 적시는데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갈꽃 환하게 피어 갈매기 나는 물가를 비친다.
- 월당 강석기, <월당선생집> 권1, 자저자도순류하한강 -
좋은 친구들 손에 손잡고 낚시배로 오르네.
늦은 비 옷을 적시는데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갈꽃 환하게 피어 갈매기 나는 물가를 비친다.
- 월당 강석기, <월당선생집> 권1, 자저자도순류하한강 -
4월의 강물 푸르게 넘치니 배 위의 밝은 달이 외롭다.
초가 팔구채 넘는 곳에 버드나무 몇 그루 서 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려고 이웃 배에서 고기를 사 온다.
닭 우는 소리 들으며 언덕 위로 올라가니
초창한 모습 서호가 여기라네.
- 석북 신광수, <석북집> 권3, 저자도야박 -
초가 팔구채 넘는 곳에 버드나무 몇 그루 서 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려고 이웃 배에서 고기를 사 온다.
닭 우는 소리 들으며 언덕 위로 올라가니
초창한 모습 서호가 여기라네.
- 석북 신광수, <석북집> 권3, 저자도야박 -
백제 옛 성 가에 풀과 나무들 황무한데
천추의 옛 자취를 어부에게 물어본다.
머리만 한번 돌려보고 흥망사에는 대답 없는 것이
앞 여울로 물 따라 내려가며 석양을 낚아 올린다.
- <남한지> 권8, 제영조 -
천추의 옛 자취를 어부에게 물어본다.
머리만 한번 돌려보고 흥망사에는 대답 없는 것이
앞 여울로 물 따라 내려가며 석양을 낚아 올린다.
- <남한지> 권8, 제영조 -
3. 현재의 흔적
한강의 사라진 섬 저자도(楮子島) [3]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 4가 남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楮子島)라고 불렸으며 속칭'옥수동섬'이라고도 하였다. 양주에서 발원한 중랑천이 청계천과 합류한 후 다시 한강과 만나는 지점을 '두루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하고 한자로 두모포(豆毛浦)라 썼는데, 저자도는 바로 이 두 물에 쓸려온 토사가 서로 만나 쌓여서 이루어진 삼각주이다. 두 물이 부딪히는 곳에 섬이 있어 물살이 유유하며 섬 안에는 구릉과 연못,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만을 따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두모포 일대는 경강의 동쪽에 있어서 동호(東湖)라 했다. 두모포와 그 서편의 입석포(立石浦), 그리고 저자도는 동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대표하는 자연물이었다.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저자도 남쪽 대안(對岸)에 압구정(鴨鷗亭)을 지은 것도 그곳에서 보는 한강 풍광이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족과 세도가들이 저자도와 그 남북 대안에 여러 누정(樓亭)과 별장을 지었으며, 시인 묵객들도 이 섬을 소재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 조선 성종 17년(1486)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저자도는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 때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다. 아조(我朝)에는 세종대왕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저자도는 조선시대의 행정 구역 상으로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는데, 10여 가구의 농가가 있었다. 조선 말에는 철종의 부마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으며 1914년 일제가 경성부(京城府)의 행정 구역을 개정할 때에 경기도 고양군으로 이속(移屬)되었다. 1925년 을축대홍수로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고,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될 때 옥수정(玉水町)과 금호정(錦湖町)으로 나뉘었다. 이 당시 섬의 전체 면적은 36만 평이었다. 1970년 정부로부터 공유수면 매립 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은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퍼내어 압구정동에 택지를 조성하는 데에 사용했다. 이로써 저자도는 한강 수면 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 4가 남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楮子島)라고 불렸으며 속칭'옥수동섬'이라고도 하였다. 양주에서 발원한 중랑천이 청계천과 합류한 후 다시 한강과 만나는 지점을 '두루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하고 한자로 두모포(豆毛浦)라 썼는데, 저자도는 바로 이 두 물에 쓸려온 토사가 서로 만나 쌓여서 이루어진 삼각주이다. 두 물이 부딪히는 곳에 섬이 있어 물살이 유유하며 섬 안에는 구릉과 연못,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만을 따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두모포 일대는 경강의 동쪽에 있어서 동호(東湖)라 했다. 두모포와 그 서편의 입석포(立石浦), 그리고 저자도는 동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대표하는 자연물이었다.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저자도 남쪽 대안(對岸)에 압구정(鴨鷗亭)을 지은 것도 그곳에서 보는 한강 풍광이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족과 세도가들이 저자도와 그 남북 대안에 여러 누정(樓亭)과 별장을 지었으며, 시인 묵객들도 이 섬을 소재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 조선 성종 17년(1486)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저자도는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 때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다. 아조(我朝)에는 세종대왕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저자도는 조선시대의 행정 구역 상으로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는데, 10여 가구의 농가가 있었다. 조선 말에는 철종의 부마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으며 1914년 일제가 경성부(京城府)의 행정 구역을 개정할 때에 경기도 고양군으로 이속(移屬)되었다. 1925년 을축대홍수로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고,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될 때 옥수정(玉水町)과 금호정(錦湖町)으로 나뉘었다. 이 당시 섬의 전체 면적은 36만 평이었다. 1970년 정부로부터 공유수면 매립 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은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퍼내어 압구정동에 택지를 조성하는 데에 사용했다. 이로써 저자도는 한강 수면 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옥수동의 영역이 중랑천 동쪽의 성수JC에서 성수대교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 영역이 당시 저자도가 있던 자리다. 저자도가 옥수동 관할이었기 때문으로, 물길이 바뀐 현재까지도 옛 저자도 영역을 따라 성수동과 경계가 나있다. 즉, 서울숲 남서쪽의 강변북로 일대는 옛 저자도의 일부였다는 것.
현재 성동구에서 강안에 정자를 세워 복원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밤섬처럼 다시 퇴적물에 의해서 저자도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관련 기사. 하지만 홍수가 일어나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2020년대 들어서 다시 형성되고 있다. #
4. 참고 자료
[1]
'옥수동섬' 또는 '삼각섬'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2]
「Kyongsong or Seoul(Keijo)」 : 1946년, 미육군지도창
[3]
강변에 설치된 안내표지판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