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23:40:13

저먼타운 전투



파일:benjamin-chew-house-1777-granger.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3.2. 영국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10월 4일 필라델비아 북부 저먼타운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조지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를 장악한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저먼타운에 주둔한 적을 급습했으나 끝내 패배했다.

2. 배경

1777년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윌리엄 하우 소장 휘하 영국군에게 패한 조지 워싱턴은 이후에도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로 가는 걸 최대한 지연시키려고 게릴라 작전을 여러차례 전개했지만, 결국 영국군이 9월 25일 필라델피아에 입성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하우는 필라델피아의 북쪽에 위치한 저먼타운에 숙영지를 세웠다. 숙영지는 필라델피아 북쪽의 주요 도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섰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를 상실한 뒤 각지에서 민병대를 끌어모아 병력 규모를 늘린 후 적 숙영지를 급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너새니얼 그린 소장 휘하 부대에게 영국군의 우익을 급습하게 했다. 그리고 스털링과 존 설리번 소장이 지휘하는 두번째 부대는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중앙 도로를 따라 내려가 영국군 중앙을 급습하게 했다. 또한 나머지 민병대는 영국군의 좌우익 측면으로 진입해 영국군 경보병대 및 레인저 부대를 급습하게 했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워싱턴은 이 일련의 공격이 정확히 새벽 5시 정각에 일제히 감행될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당시의 기술과 민병대 수준의 훈련도로는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적에게 들키지 않고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었다.[1] 하지만 그는 트렌턴 전투에서 성공적인 기습으로 헤센 용병대를 섬멸했듯이, 이번에도 성공하리라고 확신했다. 그가 보기에 영국군은 필라델피아에 입성해 의기양양해져 있어서 대륙군이 자신들을 감히 기습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을 터였고, 대륙군이 기습을 가하면 크게 경악해 필라델피아에서 퇴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하여 워싱턴은 10월 4일 영국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1777년 10월 3일 저녁, 대륙군은 남쪽으로 16마일 진군하여 어둠이 완전히 깔린 가운데 저먼타운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모자에 흰 종이 조각을 붙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영국 척후병들은 적의 접근을 감지하지 못했고, 미군은 저먼타운 인근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어둠으로 인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륙군 각 부대 간의 연락이 극도로 어려웠고, 진군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느렸다. 결국 10월 4일 새벽, 대부분의 대륙군은 계획상의 위치에 훨씬 못 미친 곳에 이르렀다.

존 암스트롱 준장이 이끄는 펜실베니아 민병대는 위사히콘 강과 슈이킬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전진했다. 이후 그는 케니파우센 장군이 지휘하는 헤센 용병대 숙영지 맞은편 절벽에 포대를 설치했지만 5시가 되기도 전에 포탄을 난사하다가 적의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 그 후 암스트롱의 민병대는 더이상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영국군의 토머스 머스그레이브 중령 휘하의 제 40 경보병 연대는 설리번 장군 휘하 대륙군이 아군 우익을 향해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적이 기습했음을 알리는 대포를 발사한 뒤 대륙군의 공세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설리번은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따로 차출해야 했다.

하우는 대포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척후 부대가 소수의 게릴라들과 교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하필이면 안개가 짙게 끼였기 때문에, 그는 10월 4일 하루 동안 적의 정확한 규모를 알지 못하고 전장을 헤매야 했다. 한편 머스그레이브 중령은 적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닫고 클리브덴 하우스로 병사들을 집결시켜 그곳에서 버티기로 했다. 설리번은 클리브덴 하우스로 몸을 피한 적이 맹렬한 저항을 가하자 진군을 중단하고 그 집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 집을 둘러싼 양측의 육탄전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중 설리번의 부관 아담 스티븐 소장은 안개를 헤치며 영국군 우익을 향해 진군하던 중 발포 소리를 듣고 적이 거기에 있다고 판단해 클리브덴 하우스로 향했다. 설리번은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형체가 접근해오자 적이 다가온다고 판단하고 스티븐의 여단을 향해 발포하는 실책을 범했다. 이에 스티븐은 즉시 응사를 명령했고, 대륙군은 한동안 서로를 향해 총격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영국 제5, 55 보병대가 좌측면을 공격해오고 우측면엔 적 기병대의 공격을 받자, 설리번의 부대는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이렇듯 다른 부대들이 삽질만 거듭하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을 때, 네더니얼 그린의 부대는 계획대로 영국군 전선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영국군 몇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얼마 후 영국군이 대륙군에서 유일하게 공세를 이어가고 있던 그린의 부대를 향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그는 뒤늦게 다른 부대가 패주했음을 깨닫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군은 적을 추격해 매튜스 대령을 비롯한 제9 버지니아 민병대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그린은 북서쪽으로 가는 대로를 따라 16마일 가량 후퇴한 뒤에야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워싱턴은 기습 공격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철수 명령을 내렸고, 영국군은 더이상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로서 저먼타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대륙군은 저먼타운 전투에서 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그 중 절반이 사망자나 포로였다. 반면 영국군의 손실은 5백여명이었으며, 사망자나 포로, 실종자는 백명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참담한 실패에 좌절한 워싱턴은 더이상 영국군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포지 계곡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하우는 적의 본거지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대륙군을 상대로 잇다른 승리를 거둔 것에 의기양양했지만, 얼마 후 새러토가 전투에서 존 버고인 소장 휘하 캐나다 방면 영국군이 대륙군에게 항복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1] 무선통신이 가능한 오늘날에도 특수부대나 수행할 수 있을 법한 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