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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용학(張龍鶴) |
본관 | 울진 장씨(蔚珍 張氏)[1] |
출생 | 1921년 4월 25일 |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령리 357번지[2] (現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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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9년 8월 31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청구성심병원 | |
첫 작품 | 희화 (1949) |
마지막 작품 | 하여가행 (19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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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과 함께 전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관념소설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상, 박상륭과 함께 가장 어려운 작가로 평가받기도 한다.2. 생애
1921년 4월 25일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령리 357번지(現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읍)에서 아버지 장지원(張志遠, 1884 ~ ?)과 어머니 박숙자(朴淑子, 1887 ~ ?)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장용봉과 누나 한 명이 있었다. 1940년 경성(鏡城)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20일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되면서 대학을 중퇴했다.1945년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고, 1946년 6월 청진여자중학교 교사에 부임했다. 그러나 1947년 9월 이북의 공산화를 피해 월남했다. 1948년 9월 첫 작품 「육수(肉囚)」를 탈고했고, 1949년 11월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에 부임했다. 1949년 11월 19일 《신세계》에 「희화(戱畵)」를 부분 연재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부산시로 피난했고, 그해 11월 무학여자고등학교[4] 교사에 부임했다. 1955년 10월에는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5]
1960년대 초 잠시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62년 언론계에 투신해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99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청구성심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3. 주요 작품
3.1. 장편소설
- 원형의 전설 (1962)
- 태양의 아들 (1965~1966)
- 청동기 (1967~1968)
- 유역 (1981~1982)
3.2. 단편소설
- 육수 (1955)
- 요한 시집 (1955)
- 비인탄생 (1956)
- 역성서설 (1958)
- 현대의 야 (1960)
- 하여가행 (1987)
- 천도시야비야 (2001, 유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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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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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후 '빙하기행' 등의 작품이 유고로 발표되었다.
[4]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2가 31번지에
피난 학교를 개설한 바 있다.
[5]
그의 성품에 대해 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안병영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큰 몸집은 아니셨고, 우수에 찬 얼굴에 순수하고 진지한 분이셨다. 유난히 까맣던 머리와 눈썹, 거뭇한 턱수염 자국이 기억에 난다.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실 것 같은 인상인데, 막상 수업 시간에 국어 문장의 속뜻을 캐 들어가실 때 보면, 이분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얼마나 면밀하게 관찰하고 계신지, 또 생각이 얼마나 깊고, 날카로운지 놀랄 때가 많았다.(중략) 선생님은 얼마간 기인(奇人)풍의 인물이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단지 인간화를 염원하던 꾸밈없는 보통인, 그 시대에 당연히 그랬어야 마땅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미 비인화(非人化)에 물든 우리의 일그러진 의식이 그를 기인으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