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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영상의 표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페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여러 오페라중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 개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의 각본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엘렉트라에서 처음으로 공동작업을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냈지만, 엘렉트라는 사실 호프만슈탈의 오리지널 각본은 아니었고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어느정도 오페라적으로 각색한 것이었기에 두 사람의 진정한 오리지널 오페라는 이 장미의 기사가 최초였다고 할수 있다.엘렉트라 이후 무슨 오페라를 만들까 고심하던 두 사람은 호프만슈탈이 남장 여자가 주인공인 밝고 가벼운 오페라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도 이를 받아들여 처음에는 이런 컨셉으로 각본 작업과 작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간에 어마어마한 편지가 오가면서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은 18세기 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차르트풍의 오페라를 지향점으로 잡았고 그래서 어느정도는 피가로의 결혼같은 모차르트 오페라를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성악적 스타일은 바그너의 악극을 닮았다. 그래서 호프만슈탈은 오페라의 성악파트를 듣고선 포효하는 두마리 짐승이 공존하는것 같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바그너화된 모차르트랄까. 이런 작품의 배경과 분위기등을 감안해서 전작인 살로메나 엘렉트라가 일부분 무조음악까지 반영한 격렬한 관현악 스타일과 화성보다는 18세기 분위기에 맞게 어느정도 둥글둥글하고 이해하기 쉬운 관현악 스타일을 보여주었다.그럼에도 연주는 어렵다.(...)
1909년에서 1910년에 걸쳐 작곡된 후 1911년 1월 26일,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느정도나 인기가 있었나 하면 빈에서 드레스덴까지 장미의 기사 공연을 보러가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기차편이 운행되었을 정도. 초연이후 50여차례 공연이 이어졌으며 베를린,프라하,바이에른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도 연주되었다. 살로메와 엘렉트라의 파격성과 전위성에 열광했던 평론가들은 슈트라우스가 구식으로 돌아갔다고 실망했지만 대중들은 열광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로 정착했고 독일 오페라 중에선 자주 공연되는 독일 명작 오페라가 되었다.
상당히 연주하기 까다로운 오페라인데다 클래식의 불모지인 한국 상황에서 초연은 상당히 늦은편으로 1996년 9월 5일 서울시립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했다. 지휘는 볼프강 볼치치가 맡았고 옥스 남작역은 로베르트 홀처가 맡는등 나름 정통 독일 오페라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초연. 여담으로 무대장치는 전설적인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아들인 마티아스 피셔 디스카우가 맡았다.
3막의 왈츠가 유명한데 이 왈츠는 오페라 전곡보다 앞서서 1961년 10월 20일, KBS 교향악단이 시공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에서 초연한바 있다. 참고로 이 3막의 왈츠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서정적인 디나미덴 왈츠에서 그 주제를 따왔다.
2. 등장인물
마르샬린[1]: 마리 테레즈, 육군 원수 베르덴베르크 공작부인옥타비안: 마르샬린의 젊은 애인, 로프라노 백작
오크스[2]: 레르헤나우 남작, 마르샬린의 사촌 오빠
파니날: 부유한 신흥 귀족
조피: 파니날의 딸
발차키: 협잡꾼
안니나: 발차키의 조카이며 일당
가수: 이탈리아에서 온 테너
모하메드: 마르샬린의 흑인 몸종
3. 스토리
막이 올라가면 마르샬린과 옥타비안이 등장해 밀회를 즐긴다. 이 때 인기척이 들리고 마르샬린은 옥타비안을 숨기는데 마르샬린의 사촌 오크스 남작이 등장한다. 결국 옥타비안은 하녀 분장을 하고 나타나는데 오크스는 이에 반한다. 오크스가 마르샬린을 방문한 이유는 신흥 귀족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서 적당한 장미의 기사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샬린은 장난으로 옥타비안을 추천한다.이후 신흥 귀족, 즉 파니날의 저택에서 장미 헌정식이 열린다. 역시 장미의 기사로 옥타비안이 등장한다. 옥타비안은 파니날의 딸인 조피에게 화려한 은 장미를 건네고 조피는 옥타비안에게 반하고 옥타비안 역시 조피에게 관심이 끌린다.. 그에 반해 몰상식하고 계속 치근덕거리는 오크스를 보고 조피는 오크스를 꺼리게 되고 곧 옥타비안과 껴안고 사랑을 고백한다. 오크스가 조피의 감정은 신경쓰지 않고 데려가려고 하자 옥타비안은 결투를 벌인다.
이후 옥타비안은 오크스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데 바로 이전에 오크스가 하녀로 분장한 옥타비안에게 반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오크스는 옥타비안에게 사랑한다며 침대에 눕히지만 옥타비안과 하녀가 닮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잃는다. 이제 안니나를 필두로 하여 경찰, 파니날, 조피까지 나타나 중혼이라며 남작을 공격하고 결국 조피는 남작에게 파혼을 선언한다. 이제 옥타비안과 조피는 연인이 되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4. 기타
모음곡 (suite)이 있다. 1945년에 슈트라우스가 출판을 허락하기는 했으나가 직접 편곡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편곡자는 아르투르 로진스키(Artur Rodziński)로 추정되는데, 1944년 뉴욕필하모닉의 초연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서곡과 2막 마지막 아리아 등으로 구성된다.5. 음반
카라얀, 칼 뵘, 레너드 번스타인, 카를로스 클라이버, 게오르그 솔티 등의 음반이 특히 높이 평가받는다.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장미의 기사를 자주 지휘했고, 여러 음반을 남겼다. 1956년 슈바르츠코프, 루트비히 등을 기용하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은 장미의 기사의 가장 대표적인 명연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전설적인 마르샬린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독보적인 가창을 들려주고 있다. 이 음반은 CD화 이후 EMI에서 발매한 두 종의 리마스터링반 이외에 CD 복각반의 음질에 불만을 가진 슈바르츠코프가 직접 감수하여 다시 리마스터링을 거친 CD가 따로 발매되기도 했다. 1982년 빈 필과 다시 재녹음을 남겼으며 이 또한 명음반으로 평가받지만 첫 녹음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1960년과 1984년에 빈 필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영상물도 남겼는데, 특히 슈바르츠코프를 기용한 1960년 영상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밖에 몇 개의 실황 녹음도 남아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이 작품을 자주 지휘했던 지휘자 중 한명이며 또한 좋은 연주를 남겼는데, 음반 녹음은 없고 영상물만 두 번 제작했다. 1979년에 바이에른 국립가극장과 1994년 빈 국립 가극장과 각각 영상물을 남겼다. 1994년의 경우 클라이버의 사실상 마지막 공연 활동이다.[3] 루치아 포프, 브리기테 파스벤더 등을 기용한 1979년 영상물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실황 녹음도 몇 가지가 남아 있다. 클라이버다운 재치 있고 활기찬 표현이 특징이지만 세부 앙상블이 자주 무너지는 것은 흠이다.
게오르그 솔티가 1968년 빈 필과 녹음한 음반도 명연주로 거론된다. 특히 당대에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대표하던 가수 중 한명인 크레스팽이 부른 마르샬린이 특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솔티는 1985년 테 카나와, 하월스, 보니 등을 기용하여 로열 코번트 가든 오페라에서 실황을 영상물로 남기기도 했다.
오페라를 거의 지휘하지 않는 전형적인 콘서트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1971년 빈 필과 녹음한 음반도 인기가 높은 명연주 가운데 하나다. 존스, 루트비히, 포프 등 성악진도 걸출하다. 번스타인의 개성있는 해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직접 교류했던 인물인 카를 뵘 역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스페셜리스트답게 이 작품의 명음반을 남겼다. 칼 뵘은 1958년과 1969년 두 개의 정규 녹음을 남겼는데, 이 곡의 세번째 정규 녹음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의 첫 녹음(1958년)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성악진은 오늘날에는 잊혀져 가고 있는 50년대의 명인들이 기용되었는데, 리타 슈트라이히의 가창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음반은 마르샬린 역이 큰 단점으로 꼽히며 때문에 명반으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해외에서는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녹음한 음반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안네 소피 폰 오터의 옥타비안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1]
'Marschallin'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육군 원수 (Feldmarschall)의 부인'인 신분을 가리킨다.
[2]
'Ochs'는 독일어로 '황소'로, 이름이 인물의 성격을 나타낸다.
[3]
당시 빈 국립 가극장을 이끌고 프로덕션을 통째로 일본 도쿄에까지 가서 공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후 클라이버는 사실상 지휘계에서 은퇴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손에 꼽을 정도 밖에는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 중에 하나는 클라이버 자신이 원하는 사양대로 커스터마이징된
아우디 A8을 제공받은 대가로 아우디 본사가 있는 잉골슈타트에서 지휘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면서 클라이버는 위신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