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 Jean II de Luxembourg-Lig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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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92년경 ~ 1441년 1월 5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보부아르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기즈 | |
아버지 | 장 1세 드 뤽상부르리니 |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당기앵 | |
형제 | 피에르 1세, 루이, 잔 | |
아내 | 잔 드 베쑨 | |
직위 | 기즈 백작, 리니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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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귀족.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군을 이끌고 샤를 7세에 대적했다.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잉글랜드군에 넘긴 인물이기도 하다.2. 생애
1392년경 보부아르의 영주인 장 1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브리엔 백작 루이 당기앵의 딸인 마르그리트 당기앵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피에르 1세, 루이[1], 잔[2]이 있었다. 그는 룩셈부르크 백작 앙리 5세의 6대 후손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프랑스 분파에 속했다.1414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 의해 아라스 총독에 선임된 뒤 아르마냐크 파에 속한 주변 마을들을 여러 차례 습격했다. 1418년 아르마냑파에 의해 포위된 상리스를 구출했고, 1418년부터 1420년까지 파리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겸 프랑스 국왕인 헨리 6세를 대신해 프랑스의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 존으로부터 기즈 백작에 봉해졌고, 1425년 그곳의 원주인이었던 샤티용 가문으로부터 기즈 성을 탈취했다.
1430년 1월 부르고뉴 황금 양털 기사단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공방전을 치렀다. 콩피에뉴 공략엔 실패했지만, 그곳을 구하러 달려온 잔 다르크를 생포했다. 그는 잔 다르크를 보부아르에 포로로 보냈다. 높은 탑에 갇혀 있던 잔 다르크는 높은 탑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지만, 외상은 없었으나 의식을 잃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잔을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인들과 같이 식사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했다.
한편, 그는 샤를 7세에게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샤를 7세는 거부했다. 이때 잔과 가까이 지내던 그의 이모인 잔 드 뤽상부르생폴은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당국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자, 결국 그는 1만 리브르 트르누아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겼다.
1430년 9월 잔 드 뤽상부르생폴이 사망하면서 리니 백작 직위를 물려받은 그는 수년간 프랑스에서 원정을 이어갔다. 그는 라옹 주변 지역에 몇 차례 침입했고, 1433년부터 피카르디에서 원정을 벌여 하플린쿠르를 공략했으며, 1434년에는 생발레리를 공략했다. 1435년 아라스 협약으로 부르고뉴와 아르마냑파 간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그는 아라스 협약을 맺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끝내 체결하자 격분해 서명을 단호히 거부했다. 샤를 7세는 이에 짜증이 나 부하들을 시켜 리니 백작령을 약탈하게 했다. 1436년, 라 이르는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의 며느리인 잔 드 바르의 소유였던 수아송을 약탈했다.
1436년 초,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선량공 필리프로부터 그의 형인 루이 드 뤽상부르를 통해 잉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따랐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샤를 7세와 협약을 맺은 부르고뉴 측에 분노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양자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1437년 후반, 선량공 필리프는 그에게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르 크루투아를 포위한 부르고뉴군에게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잉글랜드와의 신뢰를 결코 깨뜨리지 않을 거라며 거부했다. 1441년 1월 5일 기즈에서 사망했고, 캉브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모 자작 로베르 8세 드 베쑨의 딸인 잔 드 베쑨과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다만 잔 드 베쑨이 이전의 결혼에서 낳은 의붓딸인 잔 드 바르를 조카인 루이 드 뤽상부르와 결혼시켰다.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영지는 루이 드 뤽상부르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