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장 폴 고티에 Jean Paul Gault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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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 폴 고티에 Jean Paul Gaultier |
출생 | 1952년 4월 24일 ([age(1952-04-24)]세) |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드마른주 아르케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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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패션 디자이너 |
경력 |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03 - 2010) 장 폴 고티에 (1982 - 현재)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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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그의 패션 레이블. 오트쿠튀르와 프레타포르테를 생산하고 있다.2. 특징
1970년대에 피에르 가르뎅, 자크 에스트렐, 장 파투, 그리고 또 다시의 피에르 가르뎅의 부티크들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후, 그는 그의 이름으로 된 그의 첫 컬렉션을 시작한다. 일본의 카시야마 기업이 그를 재정 지원했고 장 폴 고티에는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패션에 혁명을 일으킨 젊은 디자이너들의 물결 속에서 1980년대에 그는 주요인물로 성장한다. 그전까지의 패션 관념들을 뒤집으며 남성에게 여성 옷을 입히고[1], 거리에서 만나는 "마네킹“에게 여성 코르셋을 입혔다. 자극적인 스타일의 쿠튀르(Couture) 고전을 마스터링하면서 전환을 혼합했다. 그 상징 중 하나인 ‘마니에르’는 1983년 처음 남성 컬렉션에서 선보여졌고, 2년 후 그는 처음으로 남성용 치마를 출시했다.
1990년대에는 장 폴 고티에 ‘향수’가 탄생했다. 그것은 마돈나가 원추형 컵으로 유명한 코르셋에서 유래한 옷을 입은 시점이기도 했다.
2004년 장 폴 고티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6년동안 에르메스의 기성복들을 동시에 만들었다. 수년 동안, 그는 아동복 고티에, 고티에 청바지 또는 남녀 공용 고티에 라인과 같은 보완 라인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제조업체 인 페를라와 함께 고급스러운 란제리 컬렉션을 시작한다.
그는 자주 언론에 의해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린다. 장 폴 고티에는 그의 전통적인 헤어스타일로 인해, 프랑스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는 패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3. 생애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바느질을 가르쳐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6살때부터 그의 장난감 곰에 분장을 하고, 그의 할머니의 트렁크에서 나중에 그의 브랜드의 상징이 되는 코르셋을 발견하고 공립초등학교의 벤치에 앉아 깃털로 장식된 여자를 그렸다고 한다.15세에 그는 아동복 제작을 위한 스케치를 그린다. 모든 의상이 마르셀 로샤(Marcel Rochas)에 의해 고안된 자크 베커(Jacques Becker)의 영화 '팔발라(Falbalas)'를 본 후에, 어린 장 폴 고티에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에게 자신의 스케치들을 보내지만 거부당한다. (이브 생 로랑은 그가 선택한 색이 지나치게 밝다고 생각했다.) 그의 스케치는 피에르 가르뎅에게로 보내지고 18살이 되던 날에 피에르 가르뎅의 의상실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1년이 좀 덜 되게 일한다.
1970년 11월 13일 ORTF에서 방영된 방송을 피에르 가르뎅과 함께 촬영했다. 그는 이어서 자크 에스트렐의 밑에서 일하게 됐다.
1971년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인 안젤로 타를라지(Angelo Tarlazzi)와 함께 디자이너인 장 파투의 팀으로 합류하게 된다.
1974년 그는 피에르 가르뎅에게로 돌아오게 되고 피에르 가르뎅은 장 폴 고티에를 필리핀으로 보내 미국 시장을 개척을 위한 디자인을 그리게 한다. 2년 후에, 그는 파리의 발견의 전당에서 그의 첫번째 컬렉션을 시작했고, 그의 브랜드인 장 폴 고티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불행하게도 그의 첫 번째 라인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장 폴 고티에에게 빚만 남겼다. 장 폴 고티에는 그리스컬렉션 이후에 회사를 정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게 된다. 가시야마 기업에서 장 폴 고티에에게 그의 의류라인 중에 하나인 '제임스 본드’의 디자인을 부탁함으로써 재기한다.
1980년대에 고티에의 브랜드는 크게 성장하고 큰 성공 또한 거두게 되면서 이태리 회사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게된다. 그 당시, 파리의 패션계는 ‘오트 쿠튀르’거치지 않고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디자이너들:몬타나,뮈글러,알라이아에 의해 패션계의 큰 변혁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패션쇼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프레젠테이션 이상의 것을 보여 주는 실제 쇼가 되었다.
1983년 ‘마리니에르’는 장 폴 고티에의 상징적인 토이 보이 컬렉션에 등장했다.
1985년 그는 아동복용 고티에 라인을 만든다. 그리고 또한 남녀혼용 의류컬렉션 또한 시도한다.[2]
1988년 고티에 아동복의 복장이 제프 뱅크에 의해 올해의 복장으로 선정된다.
1990년 그의 파트너 프란시스 메뉴지가 에이즈로 사망했다.
1994년 고티에진이 주니어 고티에를 대신하여 유니섹스 의류 라인을 출시한다. 별 다른 성공없이 사라졌다가 1997년에 다시 재 출시된다. 나중에 이 브랜드로 남성용 기성복 컬렉션을 패션쇼에서 선보이게 된다.
1997년 장 폴 고티에는 의상조합에 가입하여 고티에 파리라는 오뜨 꾸뛰르 자신의 컬렉션을 만든다. ‘마니리에르’는 이브닝 드레스가 되고 컬렉션 이후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2004년 장폴고티에는 2010년까지 에르메스의 여성 기성복 감독을 맡게 된다. 에르메스 I인터내셔널은은 회사의 지분35%를 차지하고 장 폴 고티에는 지분 45%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에르메스인터내셔널(Hermes International)이 소유하고 있던 45%를 지분을 획득하고 브랜드(향수를 제외한)의 지주가 된 것은 ‘Puig’기업이다. 장 폴 고티에는 그의 전 직장에서 예술감독이 되었다.
2006년 남성용 유니섹스 라인 인 고티에 브랜드를 만든다. 2008년 봄 - 여름 컬렉션을 위한 패션쇼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20년동안 고티에의 상징적인 스타일이 된 가슴골에 뾰족한 원추형 모습을 장식시킨 웨딩드레스였다.
2011년 공동으로 유아복 컬렉션을 시작한다. 또한 여성을 위한 보석 같은 다양한 액세서리 제품들,가죽제품,신발, 안경 장폴고티에 같은 다양한 제품군들이 있다.
2009년 고티에브랜드는 3천1백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고 2011년에는 고티에는 Challenges잡지에서 프랑스의 재산순위에서 500위를 차지했으며 소유재산은 6천만 유로로 추산되었다.
2014년 고티에는 기성복의 제작을 중단하고 오뜨 꾸뛰르에 헌신한다고 발표한다. "기성복의 세계가 크게 변했습니다. 상업적 제약과 유행변화의 가속화는 더 이상 혁신에 필요한 자유 또는 시간을 제공하지 않습니다."라고 Women's Wear Daily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