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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7:55:17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

파일:lieutenant-general-jean-baptiste-vaquette-de-gribeauval-1715-1789-EPM3PW.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그리보발 시스템
2.3.1. 개혁 이전의 프랑스군 상황2.3.2. 개혁의 내용2.3.3. 개혁에 대한 반발2.3.4. 개혁의 성립
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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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장성. 7년 전쟁 시기엔 프랑스의 동맹인 오스트리아군에서 활약했고, 이후에는 프랑스로 귀환하여 '그리보발 시스템'으로 명명된 포병대 개혁을 이끌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그리보발은 1715년 9월 15일 아미앵에서 치안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32년 17세의 나이에 프랑스 보병대에 입대했고, 1733년에 라 페르 포병 연대의 기수가 되어 베르나드 포레스트 벨리도르의 가르침을 받았다. 1735년 왕실 포병대 2등 중위로 진급한 그는 1743년 4월 15일 1등 중위로 진급했고 1744년부터 1748년까지 플랑드르 전선에서 활동했다. 1747년 2월 20일, 그리보발은 왕실 포병대 2등 대위로 진급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그리보발은 1752년 왕실 포병대 소속 광부 부대의 대위로 배속되었고 1755년에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아르장송 백작 마르크 피에르 드 부아이에에 의해 베를린으로 보내져 프로이센군의 포병대를 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두달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 초기인 1757년 5월 2일, 그리보발은 보병대 중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단치히의 방위를 점검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샤를 프랑수아 드 브로이 대사와 함께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크로 떠났다. 7월 29일 단치히에 도착한 그는 9월 29일 오스트리아 공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프랑스 준장 리베르송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그는 리베르송 준장과 함께 슈비이드니츠 요새 포위전에 가담했고 1757년 11월12일 슈바이드니츠 요새를 성공적으로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를 대신해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이 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프랑스 장교들의 복무 기간을 연장시켜줄 것을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고, 그리보발은 정식으로 오스트리아 포병대 중령으로 진급했다.

1758년 4월, 그리보발은 모라비아의 노이슈타트 요새 포위전에 가담해 요새 공략에 기여했고 1758년 10~11월에 나이세 요새 포위전을 감독했으나 프로이센 구원군이 제때에 도착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그리보발은 오스트리아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1759년 12월에 드레스덴 방위에 관한 각서를 작성했다. 1760년 2월 2일 오스트리아 공병대의 열악한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오스트리아 전쟁부에 제출한 그리보발은 2월 16일에 오스트리아 공병대 개혁에 관한 제안서를 제출했고, 전쟁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3월 23일에 공병 군단을 창설했다. 이후 그리보발은 7월 21일에 기술 감독관으로서 글라츠 포위전에 참가하여 대포 114문을 배치하는 작업을 감독해 7월 26일 요새 함락에 크게 기여했다.

1760년 10월 21일, 그리보발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의 부관으로서 코젤 요새 포위전에 가담했고, 1762년 3월 3일에 프랑스 전쟁부의 18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오스트리아 포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후 5월 7일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로부터 글라츠 요새를 수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7월 25일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8월 8일엔 슈바이드니츠 요새로 파견되어 공병대를 지휘했지만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슈바이드니츠 요새를 포위해버렸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오스트리아군의 시도 역시 8월 16일 라이헨바흐 전투 패전으로 좌절되자, 결국 그리보발은 10월 1일에 수비대와 함께 항복했다. 그 후 포로 교환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야전군 원수로 진급했다.

2.3. 그리보발 시스템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로 귀환한 그리보발은 1763년 3월 프랑스 전쟁부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포병대 개선 방안에 대한 제안서를 제출했다.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쇼아줄 공작은 그의 보고서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프랑스 포병대 총감독관으로 임명하고 24,000 리브르의 봉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765년 7월 19일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성 루이 훈장을 수여받은 그리보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포병대 개혁에 착수했다.

2.3.1. 개혁 이전의 프랑스군 상황

1732년 10월 7일, 루이 15세는 당시 최고의 포병 장교 중 한 명이었던 장 플로랑 드 발리에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병대를 재편성했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오해 중에 하나가 1760년대 중반에 그리보발이 발리에르 시스템을 개혁하기 이전에는 후술된 마리츠 공법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발리에르 시스템도 이미 초창기 마리츠 공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사실 장 마리츠(Jean Maritz: 1680~1743)[1]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시기가 바로 발리에르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였으며, 그리보발의 개혁은 마리츠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졌다.

당시 스위스 출신의 기술자이자 사업가인 장 마리츠는 1713년 대포를 축에 물려 회전시키면서 절삭 공구를 대어 정밀하게 대포 내경을 깎아내는 최초의 정밀가공 선반을 개발하였다. 마리츠 이전까지 대포를 만들 때는 진흙으로 만든 틀로 1차적으로 크게 대포 외부를 주조하고, 대포 속의 빈 공간에 거푸집을 다시 만들어 쇳물을 최대한 조심히 부어넣으며 2차로 주조하여 내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마리츠는 한번에 대포벽을 살짝 두텁게 주조한 뒤 내부를 돌려깎아내어 정밀하고 균일하게 내경을 형성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마리츠의 처음 방식은 대포를 수직으로 세운 뒤 돌리면서 내경을 가공했기 때문에 가공 정밀도에 한계가 있었으나, 1734년 마리츠와 그의 아들은 현대적 선반의 가공 방식처럼 대포를 수평으로 놓고 돌렸을 때 더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심지어 마리츠는 구경을 1mm 이내까지 정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마리츠가 자신의 기술을 사업 비밀로 유지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은 얼마 후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리츠 방식의 정밀성 덕분에 포신과 대포알 사이의 유격이 작아져서 화약이 폭발할 때 새어나가는 가스의 양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고, 덕분에 더 적은 양의 화약을 써도 같은 유효 사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용하는 화약의 양이 줄어들자 포신의 두께 역시 얇게 만들 수 있었고, 이는 대포를 만들 때 예전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금속만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엄청나게 비쌌던 대포 제작비의 대부분이 재료비로 지출되었기 때문에 유럽 각 국가는 돈을 아끼고자 마리츠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환경에서 도입된 프랑스의 발리에르 시스템은 중구난방이었던 구경을 대폭 정리해 24, 16, 12, 8, 4 파운드의 구경만 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발리에르 시스템은 기동전보다는 화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모든 포병, 심지어 경기병대에 배속된 포병대마저 여전히 길고 무거운 대포들을 주로 사용했다. 4파운드 구경 발리에르 대포는 스웨덴식 17파운드 구경 대포보다 2.6배나 길었으며, 스웨덴식 대포의 무게가 600파운드인데 비해 발리에르 대포의 무게는 1,150파운드에 달했다. 또한 표적에 대한 정밀한 포격이 불가능했고, 대포의 구경만이 고정되었을 뿐 보급 마차 규격 등 다른 것들은 여전히 지방마다 달랐다.

한편 마리츠의 혁신 이후 유럽 각 국가가 대응하는 방식은 모두 달랐다. 프로이센과 영국은 무게가 줄어든 대포의 높은 기동성에 주목하여[2] 최대한 대포를 가볍게 만들려고 하였다. 물론 상술한 것처럼 대포가 가벼워진만큼 제작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반면에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서 프로이센에게 당한 패배를 복수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대포보다 조금 더 무거워지더라도 사거리와 위력에서 우위에 서려고 하였다.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여 프로이센-영국 연합군과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대결하게 되었는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포병이 오스트리아 포병에게 압도당하는 것에 당황하여 즉시 오스트리아의 대포 설계를 따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곧 오스트리아 대포가 유럽의 표준이 되었다.

동시대의 프랑스 대포는 오스트리아 대포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그만큼 사거리도 길었는데, 오히려 프랑스 포병대는 7년 전쟁 기간 동안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에게 거듭 참패를 당하였다. 프랑스 대포는 일단 방렬하면 강한 위력을 보였지만, 만약 보병 등 다른 프랑스 부대가 적에게 밀려서 후퇴하면, 기동성이 너무 떨어지는 프랑스 대포는 후퇴하는 다른 부대와 보조를 맞출 수 없어서 결국 포병대가 스스로 대포를 파괴하고 와해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의 기마 포병대[3]처럼 기동성이 뛰어난 포병은 상대 머스킷병의 사거리를 살짝 벗어난 지점까지 접근해서 방렬한 뒤 정밀하게 대각선으로 포격을 퍼붓다가, 포격을 견디지 못한 머스킷병이 돌격해오면 산탄으로 응수했고, 뒤이어 프로이센 기병대가 대형이 와해된 적의 보병에게 돌격하여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 기동성이 떨어지는 프랑스 포병대는 이러한 전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1755년 5월 베를린으로 갔다가 2개월 후 파리로 돌아온 그리보발은 프로이센 대포의 우수성에 관한 보고서를 국왕에게 제출했고, 이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동맹인 오스트리아군으로 파견되어 공병대를 지휘했다. 이러한 그의 경력에 주목한 쇼아줄 공작은 루이 15세에게 7년 전쟁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프랑스 포병대의 개혁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좋은 대포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은 요새 포위전 때는 사실일 수 있지만 야전에서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이젠 무거운 대포보다는 가벼운 대포를 도입해야 하며, 그밖에도 전반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7년 전쟁에서의 추태를 더이상 보이지 않을 거라고 진언했다. 루이 15세는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리보발에게 포병대 개혁을 맡겼다.

2.3.2. 개혁의 내용

그리보발은 먼저 공성포, 수성포, 해안포, 해군포, 야전포 등을 확실하게 구별하기로 했다. 이 중 최대의 관건은 야전포였다. 당시 야전 포병대는 기동력과 화력을 동시에 갖춰야 했는데, 이전의 프랑스 대포는 화력에만 집중하느라 기동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기존의 발리에르 시스템에서 4~24파운드의 다양한 대포가 사용된 것과 달리 그리보발은 소형~중형 대포인 4, 8, 12파운드 직사포와 6, 8인치 곡사포로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그리보발은 마리츠의 아들인 마리츠 2세의 도움으로 진보된 마리츠 가공방식을 프랑스에 도입하여, 포신을 예전보다 더 얇게 가공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리보발은 더 가벼운 대포를 만들고자 대포 포신의 길이를 줄이기로 했다. 포신을 짧게 하면 그만큼 대포알이 포신을 떠날 때의 속력이 느려지고 또 그만큼 사거리도 줄어들지만, 대신에 더 정교한 내경의 가공이 짧아진 포신에 의한 포구속력의 하락을 상쇄하였으며, 18세기 프랑스에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던 탄도학도 적극 활용되었다. 이에 쇼아줄 공작은 1764년 4월 말 그리보발에게 스트라스에서 마리츠가 제작한 경포와 기존의 중포를 시험해 비교해 보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리보발은 60피트 간격으로 나무 기둥 두 개를 세우고 두 대포에게 각각의 표적을 정한 후 시험 발사한 뒤, 그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8월에 제출했다. 실험 결과, 경포와 중포의 사격 범위는 거의 차이가 없었고, 경포가 중포보다 더 빨리 과열된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경포로도 많은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리보발은 마리츠의 새 대포들이 효율적이면서도 훨씬 가볍고 기동하기 쉽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후 12파운드, 8파운드, 4파운드 구경 대포를 프랑스 포병대의 정식 대포로 확정지었다.

그리보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 가벼운 대포들이 전장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전체 시스템을 재설계해야 했다. 대포가 포격 위치를 향해 운송될 때, 그것의 무게는 불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마차 규격도 제각각이었다. 이에 그는 대포에 달린 목재 차축을 철제 차축으로 대체하고 목재로 제작되었던 못을 철제 나사로 대체해 더 쉽게 포신을 움직일 수 있는 나사식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또한 대포를 운송하는 마차에 물건 보관용 칸을 따로 두고 거기에 대포알과 화약 가루를 싣게 해, 탄약을 운송하는 마차를 별도로 기다리지 않고도 바로 대포를 발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리보발은 마차의 바퀴, 탄약마차, 용광로 등을 표준화시켜 정해진 규격에 맞춰 제작하게 했으며, 포수들이 가루 화약 대신에 미리 제조된 화약을 사용하게 했고, 대포를 쏠 때 대포를 끌고 갔던 말이 다치지 않도록 마구(馬具)를 새로 설계했다.

2.3.3. 개혁에 대한 반발

그러나 그리보발의 개혁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리보발 이전 프랑스 포병대의 편성을 감독했던 장 플로랑 드 발리에르의 아들인 조제프 플로랑 드 발리에르는 아버지가 작성한 책을 1768년에 출판하면서 <포병원칙에 대한 고려>라는 제목의 부록을 추가했다. 그는 이 부록에서 경포는 사거리가 짧고 사격은 정확하지 않으며 너무 빨리 과열된다고 비판했으며, 아버지가 이룩한 시스템은 이미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므로 함부로 고치지 말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리보발에 대한 비판이 폭주했다. 생 아방 백작은 스트라스부르 실험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용기가 없거나 순종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인간들의 눈에는 어둠으로 뒤덮인 신비로운 실험이다!
게다가 그리보발의 개혁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고, 의사 결정권자들은 이에 대해 그들의 입장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 실험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당국은 1771년 7월 12일 드웨에서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중포는 경포보다 15% 멀리 쏠 수 있었고 대포 분산 각도는 두 가지 모두 동일했다. 또한 경포는 중포보다 두 배에 달하는 반동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결과를 전해들은 루이 15세는 스트라스부르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발리에르 시스템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에 대해 그리보발의 측근이자 포병대 대위인 필리프 트롱송 뒤 커드레이는 그리보발 시스템을 옹호하는 팜플렛을 여러 장 돌렸으며 지난 7년 동안 제작된 장비 및 대포는 1732년의 발리에르 시스템에는 더이상 호환성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생 아방 백작을 비롯한 반대 세력은 그리보발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해 온갖 흑색선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그리보발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루이 15세가 사망할 때까지 불우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2.3.4. 개혁의 성립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붕어했다. 이후 새 국왕에 즉위한 루이 16세는 그리보발을 지지했던 드 무이를 대신으로 지명했다. 이후 드 무이는 국왕의 승인을 받고 그해 10월 그리보발 시스템을 채택했다. 11월 3일 그리보발은 포병대 총감독관으로서 개혁을 진두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훈련 장교와 포수들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포병 학교의 시스템을 수학, 금속과 나무 물리학, 야금, 기계, 제련, 제도술, 지형, 전략전술 등 여러 과목을 교육하도록 개편했다. 그리고 주 3일 사격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기동법, 포대 설치법, 탄약과 포탄 조작법, 대포 사격법 등을 교육했다. 그리고 제철 공장을 설치해 주기적으로 우수한 대포와 포탄들을 생산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센이 이미 잘 써먹고 있고 오스트리아도 도입한 기마 포병대를 프랑스에도 도입하고자 했지만 기병대에 일종의 로망을 품고 있던 귀족들의 반발로 번번이 좌절했고, 프랑스군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후인 1791년에야 비로소 기마 포병대를 도입했다.[4]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그리보발 시스템은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리보발 시스템을 통해 양성된 우수한 포병대를 활용해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2.4. 말년

그리보발은 루이 16세에게 재기용된 이래 포병대 개혁에 전력을 쏟아부었고 1787년 전쟁 위원회 부의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인 1789년 5월 9일 파리에서 병사했다. 향년 74세.
[1] 요한 마리츠(Johan Maritz)라고도 알려져 있다. [2] 가벼워진 대포의 무게 덕분에 말이 끄는 포가가 야지에서도 보병이 천천히 구보하는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몇마리의 말을 더 동원할 경우에는 보병이 뛰는 속력이나 그 이상도 가능했다. [3] 더 많은 말이 바퀴달린 포가에 올린 가벼운 대포를 끌게 하고, 덕분에 대포가 사람이 뛰는 속력이나 그 이상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자, 모든 포병대 병사에게 말을 지급한 포병대이다. 본문에서 후술된 것과 같이 기병과의 시너지가 좋았기에 기병과 함께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시초는 러시아군이 말의 등에 아주 소구경의 대포를 싣고 빠르게 이동하다가 말등에서 대포를 내려 방렬하고 사격하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7년 전쟁 중에 이를 당해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러시아의 기마 포병대 방식을 변형하여 프로이센군에 적용하였다. [4]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는 제일 늦게 기마포병대를 도입했지만 전쟁에서 제일 확실하고 강력하게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