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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08:13:33

자이살메르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공화국 라자스탄주의 도시
자이살메르
جیسلمیر‎ · जैसलमेर
Jaisalmer
국가
[[인도|]][[틀:국기|]][[틀:국기|]]
면적 62.38㎢²
인구 65,471 명
시간대 UTC +5:30 (IST)
지역번호 02992
우편번호 345 000 ~ 345 009
차량번호 RJ-15
웹사이트 자이살메르 정부 홈페이지

파일:자이살메르 일몰.jpg
자이살메르 성채와 시가지
파일:자이살1.jpg
관광객들로 붐비는 성채의 수르야 성문
파일:가디사르.jpg
가디사르 호수에서 바라본 성채

1. 개요2. 역사
2.1. 근대
3. 기타4. 볼거리
4.1. 황금 성채4.2. 주거 건물4.3. 성채 내의 자이나교 사원4.4. 바다 바그4.5. 그외

1. 개요

인도 라자스탄 주 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 조드푸르에서 서북쪽으로 17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7만명이다. 시내 한복판의 언덕에 위치한 자이살메르 성채 (일명 '황금 성채')와 타르 사막 투어의 거점으로 유명하다. 지명은 '자이살의 언덕 성채'란 뜻인데, 1156년 이곳에 성채를 세운 라지푸트 왕공 라왈 자이살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르 사막 한복판에 위치하여 전통적으로 교역도시였고, 1156년부터 1949년까지 무려 8세기간 이어진 자이살메르 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자이살메르 성채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성채 내외로 옛 건물들과 이들을 재활용한 숙소들이 많다. 성내에는 특히 자이나교 사원이 많은데, 과거 자이살메르 왕실이 그 신도였기 때문이다.[1] 도시 동남쪽의 저수지인 가디사르 역시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그외에 서북쪽 8km 지점의 9세기 자이나교 사원인 파라샨비트 자인 만디르, 서북쪽 외곽의 거대한 정원인 바라 바그, 서남쪽 10km 지점의 유령 도시 쿨다르 역시 둘러볼 만하다. 사막 도시라 인도 중에서도 날씨가 매우 더우며, 특히 연중 내내 작열하는 햇빛이 유명하다. 도시 서남쪽 외곽의 자이살메르 공항을 이용하거나 자이푸르에서 버스나 기차로 접근할 수 있다.

2. 역사

파일:자이살.jpg
성채와 시가지

8세기 현재 도시의 서북쪽의 로드루바가 바티[2] 라지푸트계 라왈 데오라즈 부족의 수도가 되었는데, 1025년 로드루바가 가즈니의 마흐무드와 1125년 무함마드 고리에 의해 파괴된 후 1156년 라왈 자이살이 16km 떨어진 트리쿠타 언덕에 거대한 성채를 세운 것에서 기원되었다. 1299년 델리 술탄국 알라 웃 딘 할지가 성채를 포위하였고, 오랜 공성전 끝에 성내의 라지푸트 족들은 집단 자살하거나 최후의 돌격을 하여 전멸하였다. 이로써 자이살메르는 할지 왕조령이 되었으나, 14세기 중엽 투글루크 왕조의 혼란을 틈타 라지푸트 왕가의 지배가 회복되었다.

1530년경 아프간 부족장 아미르 알리가 성채를 포위하였고, 이번에도 전세가 기울자 라왈 루나카란은 여인들을 죽인 후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으나 바로 그때 원군이 당도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1541년 라왈 루나카란은 수르 왕조에 패하여 아즈메르로 향하던 무굴 제국 후마윤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그의 아들 악바르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복속하였다. 이후 2세기간 무굴 제국에 복속해 있던 자이살메르 국은 두라니 제국의 침공으로 무굴 제국이 쇠퇴하자 1762년 마하라왈 물라즈가 성채의 무굴 주둔군을 축출하고 자립하였다.

2.1. 근대

1818년 물라즈는 영국 동인도 회사와 협상하여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820년 물라즈의 사후 손자 가즈 싱이 계승하였다. 한편 영국의 뭄바이 개발과 해양 무역의 발전은 타르 사막을 경유하는 내륙 무역의 쇠퇴로 이어졌고, 이로써 자이살메르의 경제 역시 쇠락하였다. 1895-1900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가축 대부분을 잃었다. 1914년 즉위한 마하라왈 자우히르 싱과 데완 (재상) 바하두르 브리즈모한 나트 주트시는 근대화의 일환으로 관개 시설과 저수지를 보수하고 보건 및 위생 상태를 개선하였다. 동시에 왕국 내의 기술 교육을 증진하여 여러 공과 학교를 세웠다.

다만 인근 조드푸르 국과 달리 사막화를 막지는 못하였고, 1941-51년 자이살메르 국은 재차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나마 기존의 근대화 노력 덕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와 관계없이 쇠퇴하던 자이살메르의 경제는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로 사막 횡단 교역이 아예 차단되며 완전 붕괴하였다. 따라서 1949년 자이살메르 국은 별 저항 없이 인도 연방 정부에 병합되었고, 마지막 군주인 마하라왈 기르다르 싱은 1950년대까지 내치에 있어 일정 수준의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 자이살메르는 파키스탄과 가까운 지정학적 요인 덕에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3. 기타

유튜버 빠니보틀이 방문하였고, 타르 사막 투어 후 성내에서 숙박하였다. 오토바이가 고장날 정도로 뜨거운 햇빛이 작렬하는 더운 기후와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볼거리가 많은 유서 깊은 도시라 평하였다. 꽤 마음이 들었는지 조금 비싼[3] 숙소였음에도 하루 묵을 정도.

4. 볼거리

파일:자이살 5.jpg 파일:파르쉬바나트.jpg
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내 풍경 성채 내의 자이나교 사원

4.1. 황금 성채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라자스탄의 언덕 성채들
영어 Hill Forts of Rajasthan
프랑스어 Forts de colline du Rajasthan
국가·위치 인도 라자스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4], (iii)[5]
지정번호 247

파일:자이살메르 계획.jpg
자이살메르 성채의 구조
파일:자이살메르 0.png
자이살메르 외성 잔존부 (성탑)
파일:자이살메르 5.jpg

파일:자이살메르 4.jpg

파일:자이살메르 8.jpg

파일:자이살메르 7.jpg
성벽 풍경
파일:자이살메르성.jpg
기단부 위에 세워진 성벽
파일:자이살메르 2.jpg
아케이 프롤 성문

치토르 (치토르가), 쿰발가르, 란탐보르, 가르곤, 암베르 (자이푸르), 메란가르 (조드푸르) 성채와 함께 라자스탄의 언덕 성채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본래 성채 밖에도 시가지를 두르는 성벽이 있었으나 그는 남벽만이 일부 남아있다.

19-20세기의 암흑기를 보낸 자이살메르는 20세기 말엽부터 성채를 중심으로 한 관광업 덕에 경제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주민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성채 내에서만 거주하다가, 경제 회복과 함께 성채 밖의 시가지로 이주하였다. 다만 현재까지도 브라만, 라지푸트 귀족의 후예들인 4천의 주민들은 여전히 성채 내에 거주하며 관광 & 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4.2. 주거 건물

파일:라크 카 마할.jpg

파일:자이살 궁전.jpg
성채 내의 라자 카 마할

파일:궁전 자이살메르.jpg

파일:자이살메르 궁.jpg
자이살메르 성채 궁전

파일:만디르.jpg

파일:만디르 궁전.jpg
성밖의 만디르 궁전

파일:살림 싱 키 하벨리.jpg

파일:파트완.jpg
성채 내외의 저택

4.3. 성채 내의 자이나교 사원

파일:찬드라프라바.jpg

파일:찬드라 프라바.jpg

파일:찬드라프라바 3.jpg

파일:찬드라프라바 2.jpg

파일:찬드라프라바 1.jpg 1507년 성채 내에 세워진 자이나교 사원. 내외벽을 장식한 힌두 양식의 부조가 인상적이다.

파일:자이살메르 6.jpg 찬드라프라바 옆의 자이나교 사원

4.4. 바다 바그

파일:바다 바그.jpg

파일:자이살메르 무덤.jpg

파일:바다 바그 1.jpg

바라바그 (위대한 정원)으로도 불린다. 16세기 초엽 자이트 싱 2세가 사막 지역의 녹화 사업을 위해 만든 저수지에 후계자인 아들 룬카란이 정원과 차트리 기념 구조물을 더하여 형성된 바다 바그 유적. 이후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차트리 기념 정자가 더해져 현재의 거대한 군집을 이루게 되었다.

4.5. 그외

파일:아마르 사가르.jpg 가디 사르 호수 내의 인공섬

파일:로두르바.jpg 9세기에 세워진 자이나교 사원

파일:쿨다라.jpg 사막 한가운데에 남겨진 중세 도시 유적. 도시를 두른 성벽과 시내의 사원 유적이 남아있다.


[1] 다만 현재는 주민들 중 자이나교도는 0.5%에 불과하고 힌두교도가 90%로 대다수이다. 무슬림은 8%에 불과하다 [2] 한때 가즈니에서 펀자브에 이르는 제국을 이루었으나 10세기 말엽 가즈니 왕조에 패하여 펀잡에서 밀려나 펀자브 남부와 라자스탄 서북부 일대로 밀려났다. 그중 일파는 9세기에 데라와르 성채를 세웠다. [3] 한화 1만 3천원 정도, 주인이 한국어를 구사했다 [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