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0:46:13

임아상

1. 소개2. 생애3. 주요 참전4. 일화5. 평가

1. 소개

任雅相(? ~ 662)
당나라의 재상으로, 패군 임씨(氏郡任氏), 위남(魏南, 지금의 섬서 위남) 출신.
일찍이 연연도호(燕然都護)를 거쳐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서돌궐을 평정한 뒤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현경 4년(659년)에 재상에 올라 동중서문하삼품을 더하였다. 그는 재상에 오른 지 2년이 되지 않아 패강도행군 대총관으로서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참전하나, 용삭 2년(662년)에 군에서 죽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모두 그의 열전이 없다.[1]

2. 생애

위남 사람으로 일찍이 행적을 알 수 없다.

당 태종 정관 연간에 조산대부(朝散大夫)를 지냈으며,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모용보(慕容寶)와 함께 서돌궐에 사신으로 간 뒤 가한을 책봉했다. 이후 연연도호를 지내다가 657년에 소정방 휘하에서 소사업과 함께 서돌궐 사발라가한을 공격하는 것에 참전했으며, 사발라가한이 서쪽으로 도망가자 소정방과 함께 새로 귀부한 무리를 거느려 먼저 추격한 소사업, 약라갈파윤을 따라가서 사발라가한을 추격했다.

현경 4년(659년), 당 고종은 임아상이 청렴하고 바르다는 것을 듣고 우효위장군 겸 병부시랑(兵部侍郞)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시킨 뒤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더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7월, 당 고종은 장손무기의 모반사건을 재심사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임아상은 이적, 허경종, 신무장, 노승경과 함께 심문을 맡았고 결국 장손무기는 자결했다.

661년 4월 16일에 패강도행군 대총관에 임명되어 요동도행군 대총관 글필하력, 평양도행군 대총관 소정방, 부여도행군총관 소사업, 루방도행군대총관 정명진 등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2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당군은 35군을 나누어 수륙으로 병진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용삭 2년(662년) 2월에 평양성 인근에서 벌어진 사수 대첩에서 대패, 사망했다.[2] 고종은 그를 형주대도독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

당 덕종 연간 능연각에 속도(續圖)를 얻는다.

3. 주요 참전

임아상은 일찍이 당과 서돌궐의 전쟁에 참전하여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서돌궐의 사발라(沙鉢羅)가 이끄는 돌궐군을 대파하고 서돌궐의 수령 도타간 등 2백여 명을 참살하고 당나라 서부 국경을 예라천(지금의 신장 이리하 서쪽) 일대까지 넓혔다. 그는 재상을 맡은 뒤 패강도행군대총관의 신분으로 소정방, 글필하력, 소사업 등과 함께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4. 일화

관할 관사에 공문을 보내 보직을 주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관리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국가의 공적인 그릇이니, 어찌 사사로이 편리한대로 하겠냐고 했다. 이에 군대 안에서는 상벌이 공평해 사람들이 그의 공정함에 복종했다.

5. 평가

임아상은 장수로서 친척과 고리를 군에 종군시키지 않았으니, 모두 소사를 옮겨 보충하고, 군에서 상벌을 모두 평정하니, 사람이 그 공에 복종하였다.
사마광 자치통감
파편적으로 남은 기록을 보면 임아상이 상당히 뛰어나고 평판도 좋은 사람이었던 듯한데 하필 연개소문에게 사수 전투에서 대패하고 죽어버린 탓에 열전이 남지 못해 아쉬운 면이 많다.


[1] 제2차 고당전쟁 당시 당군의 피해가 해당 부대의 사령관이 죽었을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제2차 고당전쟁 당시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뿐 아니라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은 정명진이 죽을 정도로 대패했다. 임아상과 마찬가지로, 정명진도 양당서에 별도의 열전이 없다. 방효태의 전투 기록을 사서에 기록해 놓고 임아상과 정명진은 아예 열전에 빼놓고 기록한 것은 제2차 고당전쟁 당시 루방도행군과 패강도행군의 피해가 엄청났다는 사실이 수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 구당서 신당서에는 군중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임아상의 열전이 없는 것은 사수에서 그의 군대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 걸 은폐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마 연개소문이 군대를 이끌고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제압한 다음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을 공격했을 때, 연개소문이 패강도행군을 전멸시키고 임아상을 참살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