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20:01:1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78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프리드리히 니체
,
,
,
,
,

1. 개요2. 저술 배경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뜻4. 내용
4.1.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4.2. 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4.3. 3장 종교적 삶

[clearfix]

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중기 사상을 대표하는 책. 1879년에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제1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879년에 쓴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들》과 1880년에 쓴 《방랑자와 그 그림자》를 합쳐서 제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체는 해당저서에서 '형이상학적' 이상의 배후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이상주의'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의 필요와 동경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한다.

2. 저술 배경

니체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 글은 바그너의 첫 바이로이트 축제극이 있었던 1876년 여름에 처음 씌어지기 시작했다.[1] 1876년 7월 24일 개막 축제극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갔던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과 바이로이트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채 8월 6일 클링스부룬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니체는 이때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구토를 동반한 심한 두통을 겪고 있었는데다가 바그너와의 관계에서 오는 소원함, 정신적인 고독, 새로운 철학을 위한 진통 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자이자 조수 하인리히 쾨젤리츠(일명 페터 가스트)의 도움을 받아 9월부터 '쟁기날(Pflugschar)'이라는 제목 아래 수첩에 한 문장씩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뒤 10월 1일에는 파울 레와 함께 소렌토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 머물고 있던 바그너를 만나기도 하면서 구상하고 있던 책을 거의 완성시켰으며, 니체는 이 책을 《 반시대적 고찰》의 5부 「자유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그해를 넘겨 1878년 이 원고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1778년 5월 30일 볼테르 서거 기념제에 즈음하여 볼테르를 기념하여 바침》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출간한다. 니체는 심한 두통과 시력저하로 인해 장문의 글을 쓸 수 없어서 볼테르처럼 촌철살인의 단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볼테르의 자유롭고 해방된 정신을 통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압도적인 영향력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재밌게도 니체는 이 책이 출간되던 5월 30일, 파리에 사는 익명의 인물로부터 볼테르의 흉상 하나를 선물받는다. 그 볼테르의 흉상에는 "볼테르의 영혼이 프리드리히 니체씨에게 축하드립니다"라고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니체는 이 사건에 매우 감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니체는 1879년에 6개월 동안 쓴 408개의 잠언들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부록 :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 6월 14일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그해 여름을 스위스의 성 모리츠에서 고독하게 보낸다. 니체 스스로도 이 시기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겨울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쓰여진 글이 1880년 1월에 출간된 《방랑자와 그 그림자. 이미 출간된 사상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보권》이다. 이후 1886년 니체가 그때까지 지었던 책들의 서문을 새로 작성하는 작업을 할 때, 따로 간행되었던 이 2개의 부록을 한 권의 책으로 합쳐서 1886년 10월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로 다시 출간하면서 이 책은 1, 2권의 구성이 되었다.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뜻

심리학적 관찰의 장점들ㅡ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ㅡ또는 좀더 학술적으로 표현 하자면 심리학적 관찰ㅡ은 그것의 덕택으로 삶의 짐을 덜 수 있는 수단에 속한다. 즉 심리학적 관찰의 기술을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곧 정신의 침착성을 주고 권태로운 환경 속에서는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험난하고 불쾌한 시절에는 금언을 찾아낼 수 있어 그것으로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5절[2]
니체에 따르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가리키는 의미는 '심리학적 관찰'을 뜻한다.

4. 내용

4.1.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개념과 감각의 화학 ㅡ 철학적 문제들은 오늘날 거의 모든 점에서 다시 2천 년 전과 동일한 질문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일까? 형이상학적 철학은 지금까지 어떤 것이 다른 것에서 생겨남을 부정하며, 또한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물 그 자체의 핵심과 본질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난다는 기적 같은 기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이미 자연과학과 분리해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철학적 방법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타난 역사적 철학은 통속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석에서 흔히 있는 과장된 대립을 제외하고 어떤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성의 오류도 이러한 대립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개별 경우들을 통해 밝혀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모든 경우에 이 철학의 결론이 될 것이다.) 역사적 철학의 해석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서 이타주의적인 행위도 없고 완전히 무관심한 관조도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절[3]
책의 제일 처음에서 니체는 '절대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는 '형이상학적 철학'을 비판하면서, 최근에 나타난 '역사적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우리는 '형이상적 철학'의 기원에 '비논리와 비이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껏 '형이상학적 철학'은 인간에게 불변하는 특성과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되어왔으므로 그러한 생각[4]은 오류에 불과하다.

니체에 따르면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서야 인간의 지성은 비논리에서 논리를 발견하고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추리를 거부했다. 즉, 현재 우리가 세계라 부르고 있는 것은 과거 전체의 인간 가치로부터 우리에게 상속된 한 덩어리의 오류와 상상력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한 눈에 파악(형이상학적 철학)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세계의 성립사를 '부분적'이고 단계적으로만 해명(학문: 역사적 철학)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논리적인 것의 배후의 비논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비논리적인 것을 아예 없애버려야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ㅡ 관습과 전통ㅡ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비논리적인 것을 없애려면 인류를 장려하는 최대의 힘[5] 역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게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인간의 판단이 비논리적인 것에서 발전해온 것이라면, 삶의 가치에 대해 평가하는 존재인 인간 모두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 '오류는 삶에 필요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철학은 비극이 되지는 않을까? '역사적 철학'이라는 학문은 삶을, 더 좋은 것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니체는 이러한 의문이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학문적 통찰을 통해 자신의 과거에 놓인 가장 깊은 심연으로부터 혐오감을 느끼고 현재의 자신의 동기를 무의미한 것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똑같은 학문적 통찰을 통해 현재의 삶보다 훨씬 단순한 애정으로 정화된 삶을 살 것이며 지금까지는 공포만 느껴야 했던 과거의 많은 것들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활한 함정과 갑작스런 감정의 폭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확고부동하고 온화하며 근본적으로 쾌활한 영혼의 기질이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 도덕, 법칙, 사물에 대한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는 이 상태의 기쁨을 기꺼이 미래에 전할 것이며, 아마도 이것 외에는 전해야 할 것이 없을 것이다.

4.2. 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ㅡ선과 악의 개념은 이중적인 경위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을 행하는 사람은,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은 선하다고 불린다 ; 반면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개인이 보복의 감각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6]은 '선함[7]'에 공동체 감정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나쁜 사람은 '나쁨'에 아무런 공동체 감정이 없는 더 종속적이고 무력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 선한 사람은 하나의 계급이고, 나쁜 사람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함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와 같다. (중략) ㅡ그다음에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귀하든 비천하든 다른 모든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악은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정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예컨대 신을 가리키는 성격의 단어이다 ; 인간적, 신적이라는 것도 악마적, 악한 것과 같은 정도로 여겨진다. 호의, 자선, 동정의 표시는 간계, 무시무시한 결말의 서곡, 마취와 계략, 즉 세련된 악의로써 불안해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개별 인간이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곳에서 공동체는 거의 성립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가장 야만적인 형태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견해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개인과 종족과 인종의 몰락이 가까이 있다. ㅡ우리들의 현재의 윤리는 지배적인 종족과 계급의 땅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5절[8]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 감각도 오류에 기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을 쉽게 그리고 즐겨 행하는 사람을 '선하다'라고 불렀다.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와 그의 공동체에게 실제로 유익했으므로 잊혀지지 않고 전해졌다. '악하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이성적인 일이든 어리석은 일이든 간에 관습에 역행하는 것을 말했다. 이는 사람들의 개별 행위에 대한 동기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그 행위가 공동체의 존속에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이런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즉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은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도덕이 오류의 역사를 가진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도덕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렇게 다양하게 다른 도덕들을 크게 강자의 도덕과 약자의 도덕으로 구별한다. 강자는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되갚아줄)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고, 약자는 그런 힘과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강자의 선이나 악을 그저 받기만 할 뿐이므로 '강자의 보복'을 질투와 악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선을 선으로 보복하는 것인 '감사'는 강자의 사회에서 첫번째 의무인데 비해, 약자는 보복할 힘과 의지가 없기 때문에 선한 행동에 감사할 줄 모르며 단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강자가 '함께 괴로워'[9]하길 바랄 뿐이다.

강자는 거의 모든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미소, 눈웃음, 악수, 유쾌함과 같은 교제에서 보복(되갚아줌)을 통해 선량함, 친절함, 예의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이러한 자신의 '호의'와 그 힘의 행사에서 쾌감을 느낀다. 반면에 보복할 힘과 의지가 없는(감사나 복수를 할 의지가 없는) 약자는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불행을 과시함으로써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데, 이렇게 '동정'[10]을 갈구함으로써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그것은 약자에게 쾌감이 된다. 다시 말해, '비이기적인' 동기를 말하는 약자조차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이기적인 쾌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기적인 것 또는 개인적인 것이란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취급되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쾌감이 없는 곳에 삶도 없으며, 사실 도덕에는 '비이기적'인 것 보다 '이기적'인 것이 더 많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렇다고 타인을 돕는 것이 아예 없어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도움이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쾌감(이익)을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개인적인 쾌감은 공동체의 이익을 마치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가능한 한 개인적인 고려를 통해서만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이에 따라 공동의 이익 역시 최대가 된다.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나아가게 한다.

4.3. 3장 종교적 삶

몇몇 자연의 과정들은 적절한 시기에 발생하고, 또한 다른 자연의 과정들은 적절한 시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은 이 무시무시한 미지의 것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은 자유의 왕국을 속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그는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불안하게 탐구한다 : 너 자신이 규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힘들을 관습과 법칙을 통해 규칙적으로 만들 수단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ㅡ마술과 기적을 믿는 인간의 사유는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게 된다ㅡ그리고 간단하게 말해서 이 사유의 결과가 종교적 예배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 사항과 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어떻게 더 약한 종족이 더 강한 종족에게 법칙을 명령하고, 그들을 규정하며 (더 약한 종족에 대한) 그들의 행위를 지휘할 수 있을까? 가장 무해한 종류의 강제를 사람들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강제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을 때 행하게 되는 그러한 강제이다. 간청과 기도로, 굴복으로, 규칙적인 세금과 선물을 바치는 의무감으로, 아첨하는 찬양으로 자연의 힘에 강제를 행사하는 것도, 사람들이 자연을 애정하는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 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구속하고 또한 구속당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1절[11]
종교적 삶이 가장 힘차게 꽃피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의 근본 신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자연의 행위에는 비합리적인 힘이 함께 한다는 신념이다. 배를 저어 갈 때 , 배를 움직이는 것은 노가 아니라, 정령(다이몬)의 마술적인 의식이 배를 움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갑자기 쓰러진다면 그것은 신이 쏘는 화살 때문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 하에서 종교적 예배의 의미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이 되도록 규정하고 마법으로 사로잡는 것, 즉 자연에 그것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법칙성을 새겨넣는 것이다. 사랑으로, 간청과 기도로, 굴복으로, 규칙적인 세금과 선물을 바치는 의무감으로, 아첨하는 찬양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 계층의 가장 성공적인 모범으로 비친 이상을 '신'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신을 자신의 본질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신을 자신의 본질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신은 사심 없이 비이기적이라고 불리는 그 행위만을 할 수 있을 뿐인 완벽한 존재다. 만약 인간이 결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결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과 솔직하게 비교하게 된다면 그는 특별히 자신에게 불만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벽하게 선한 존재인 신과 자신을 비교하게 될 때, 그에게 자신의 본질은 지극히 어둡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의 표상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으로 믿고 있는 한, 그것은 사람을 자기 경멸의 감정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자기 경멸은 점점 더 커져 자기 비하, 심지어 자기 학대의 행위로 이어진다.

이런 점은 종교적 금욕주의자의 영혼에서 쉽게 관찰된다. 금욕의 많은 형식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의 가장 승화된 표현들에 속한다. 모든 금욕적인 도덕에서 자신의 한 부분은 자신의 다른 부분들을 지나친 요구들로 억압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한 부분인 '욕망'을 '죄'로 여김으로써 한편으로는 욕망이 끌어오를 때마다 자기 비하와 자기 경멸에 사로잡히게 하고, 동시에 금욕적인 생활로 자신의 욕망에 투쟁함으로써 인간의 다른 한 부분은 다시 자신을 사랑하고, 이 사랑의 자부심은 곧 신의 은총으로 해석된다. 즉,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압박하고 완전히 파괴시켜 깊은 진창 속으로 빠뜨린 다음, 단 한 번에 이 진창 속으로 신의 자비의 영광을 비쳐들게 함으로써, 압도당한 자, 은총에 마비된 자는 황홀의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이 투쟁이 어느 정도로 항상 즐겁게 유지되는지가 그리스도교인들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황폐한 삶이 즐겁게 유지되었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금욕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속적인 참여와 감탄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게 보이려면, 감성적 쾌감이 더 많이 이단시되고 나쁜 것으로 낙인찍혀야만 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가능한 한 인간이 나쁘고 사악하게 보이기를 원했다. 스스로의 구원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자신의 힘에 절망하는 인간을 칭송했다. 또한 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점점 초자연적인 힘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이조차 지겨워졌을 때 인간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전율적이고 황홀한 연극을 만들어냈다.
[1] 그러나 몬티나리 M. Montinari의 연구에 따르면, 몇몇 단편들(제1권의 32, 33, 108, 114, 125, 148, 154, 158, 163, 224, 233, 234, 261, 262, 360, 474, 607의 17개의 단편)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이 열리기 1년 전인 1875년 여름에 이미 씌어졌던 글들이다. [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63 [3]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23~24 [4] 인간에게 불변하는 특성과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5]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의 관습과 전통을 말한다. [6] 여기서 '선한 사람'은 강자를 지칭한다. 44절 참조. [7]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선함'이라고 한다. [8]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74~75 (해당 번역에 문제가 있으므로 원문 #을 참조해서 번역을 고침) [9] '함께 괴로워하다'는 말이 독일어로 '동정(Mitleid)'이다. [10] '동정(Mitleid)'은 독일어로 '함께 괴로워함'을 뜻한다. [11]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133 (해당 번역에 문제가 있으므로 원문 #을 참조해서 번역을 고침. Neigung의 번역에서 '호의'→'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