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공화국 제19·21대 대통령 이폴리토 이리고옌 Hipólito Yrigoy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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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colcolor=#ffffff> 출생 | 1852년 7월 12일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
사망 | 1933년 7월 3일 (향년 81세)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
재임기간 | 19대 대통령 |
1916년 ~ 1922년 | |
21대 대통령 | |
1928년 ~ 1930년 | |
정당 |
[[급진시민연합| 급진시민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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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제19·21대 대통령으로,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해 "빈곤층의 아버지"로 불렸다.2. 생애
1852년 7월 1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이후 대신 법학을 공부하였고, 잠시 사법부에서 일하다 1869년 자치당의 일원으로서 정치를 시작했다. 1872년 삼촌 리안 앨럼의 영향으로 발바네라의 경찰국장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곧 자치당이 국민당과 합당하는 것에 반발해 공화당을 창당, 이후 직에서 추방됐다. 이후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기도 했지만 1880년부터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고 교수직과 아시엔다 경영에 집중했다.이후 1891년 삼촌과 함께 급진시민연합을 창당,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 위원장직을 맡았다. 1893년 정부의 탄압과 선거 조작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1], 1905년에도 국민자치당 정권을 타도하고자 혁명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그러나 선거 개혁을 위한 계속된 노력은 1910년 국민자치당 내 온건파였던 로케 사엔스 페냐가 대통령에 오른 이후 1912년 보통 선거[2]와 비밀 선거를 보장하는 사엔스 페냐 법이 통과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격차로 여당 국민자치당 후보를 꺾으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집권 이후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던 다양한 개혁정책이 실행됐다. 우선 노동자들을 위해 최저 임금을 인상하고, 주택 건설을 지원했으며,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설립을 지원하였고, 문맹 퇴치를 위해 3,000개가 넘는 새 학교를 건설했으며, 다양한 보건 정책이 도입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시행, 국가에서 통화, 운송, 에너지 등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YPF(아르헨티나 국영 에너지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당시 외국 기업이 소유하던 철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일부는 국유화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선 철저히 중립을 지켰고, 협상국과 동맹국 양 세력에 모두 물자를 공급하면서 이득을 챙겼다. 이와 동시에 미국과의 무역을 늘려 많은 양의 농축산물을 수출했고 이는 폭발적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리고옌의 임기 동안 경제성장률은 8-10% 사이를 유지하였고, 1인당 GDP 또한 당시 세계 선진국에 꿀리지 않는 수준을 보였다.
이후 임기가 끝난 1922년 퇴임했다가 1928년 알베아르 대통령의 뒤를 이어 재출마, 압도적인 격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2기때도 초등학교를 세우고 8시간 근무제도를 확립하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위기에 빠트렸다. 이 과정에서 긴축 정책을 펼치자 지지율은 급속도로 추락하였고, 동시에 권력을 강화해 혼란을 막으려 하자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렀다. 결국 1930년 9월 6일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이끄는 군대 내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켰고, 이리고옌 대통령을 축출시켰다. 이후 가택연금을 받다가 1933년 7월 3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