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960년 2월 7일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월계리 월하마을 | |
사망 | 1987년 6월 24일 (향년 27세) |
부산광역시 봉생병원 | |
가족 | 2남 2녀 중 장남 |
본관 | 하빈 이씨 |
학력 |
마리초등학교 (전출) 선암초등학교 (졸업) 동의중학교 (졸업) 금성고등학교 (졸업)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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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본관은 하빈(河濱).2. 생애
1960년 2월 7일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월계리 월하마을[1]에서 아버지 이정석과 어머니 박영옥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거창 마리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인 1970년 부모님을 따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2동 신암마을로 이주하였다. 이후 부산 선암초등학교, 동의중학교, 금성고등학교를 거쳐 1986년 동아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학생운동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을 가졌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부산의 화승고무-태광고무에 입사하여 근무 중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했다.
1987년 6월 18일 밤, 그는 부산 좌천동 고가도로 시위에서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 호헌철폐' 등지의 4.4조 음율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행진하다 전경들이 난사한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추락하였다.[2] 시위대가 지나간 뒤, 이를 발견한 오선숙씨 등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 4명(남2, 여2)이 지나가는 승용차에 급히 태워서 대연동 재해병원으로 후송했다.
결국 병원의 시설미비로 밤 12시경 다시 봉생병원으로 옮겨 신경외과에서 뇌수술을 하였으나, 그는 끝내 회복을 하지 못하고 6월 24일 저녁 8시에 눈을 감았다.
이후 6월 25일 부산대 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여 부검 결과 직접적 사인은 뇌좌상이었고 오른쪽 이마 윗 부분에서 정수리를 거쳐 후두부까지 20.5cm에 이르는 종방향 두개골 골절이었다. 그 외 신체 어느 부위에도 일체의 외상이 없었다. 부검 후 22밤 10시경 시신을 연산동 시립 부산의료원 영안실로 안치하였다가 6월 27일 밤에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문재인은 이태춘의 장례식에 장례위원으로 참석했다. 노무현은 이태춘의 영정을 안고 시내 행진을 했다.
3. 약력
- 1960년 2월 7일 부산 출생
- 1986년 2월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 1986년 3월~1987년 3월 주식회사 화승 자재과 근무
-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 1987년 6월 18일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오버브릿지 밑으로 추락,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음
- 1987년 6월 24일 부산 봉생병원에서 사망
- 2001년 4월 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