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29일 ~ 1986년 5월 26일 (향년 21세)
고난에 찬 한국현대사는 일찍이
조선말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투쟁사는 새로운 조건변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시 단절된 채 현대사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서히 떠오르는 광명을 맘으로부터 준비하듯, 역사는 그 알맹이로부터 외압의 모든 구차한 껍데기들을 과감히 쳐부수기 위한 일보를 내딛으려 한다. (중략) 역사는 미루지 않고, 선도적으로 실천하는 자만을 알맹이로 한다. - 그의 1985년 8월 15일자 일기 中
1. 개요
대한민국의 열사.2. 생애
2.1. 유년 시절
1964년 12월 29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꽤나 다재다능했고 열정적이었다고 한다.그러던 그가 사회현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그때가 바로 1980년이었고 그가 살던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이재호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5.18 당시의 광주를 겪어야 했다. 이후 고등학교 공부를 마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1]
그는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미 운동에 참여했다. 3월 경에는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에 참여해 위원장 직을 맡아 반미 시위를 주도했다. 또 당시에는 대학생 2학년들을 대상으로 최전방 부대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 전방입소교육'이라는 교과 과정이 존재했는데[2] 이재호는 이를 '미제의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의 부위원장의 직위로 전방입소교육 거부투쟁[3]에 나섰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4월 28일[4]에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농성을 벌일 계획이었지만 학교 측은 이를 눈치채고 문을 닫아걸었다. 이에 서울대학교/연건캠퍼스 도서관으로 농성장소를 바꿨지만 이마저도 경찰의 압력으로 27일 해산되었다.
1986년 4월 28일[5] 400여명의 학생이 신림사거리로 모였는데 그는 김세진과 함께 근처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고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고 외쳤다. 경찰들이 몰려와 학생들을 때리면서 진압하자 둘은 폭력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자 결국 분신했다. 이재호는 분신 직후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몸 전체 중 80%가 3도 화상을 입은 처참한 상태였고 1달 후인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2.2. 사후
사후 이재호 열사는 집안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망월동 5.18 묘역으로 옮겨졌으며 1988년에는 '김세진이재호열사추모사업회[6]'가 세워졌고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아 명예 회복되었다. 2008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3. 여담[7]
- < 벗이여 해방이 온다>가 그와 김세진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노래다.
- 그가 폐지를 주장하면서 목숨을 버리게 한 전방입소교육은 1987년에 선택과목이 되었고 1988년에야 폐지되었다.
- 그와 김세진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옆 잔디밭에 있다.
- 서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 그와 김세진의 추모식을 매년 거행하고 있다.
- 그와 김세진을 기리는 추모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2008년 상영되었다. # 다큐멘터리 형식인데 사실상 그와 김세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 영상을 모아놓은 것이다.
- 그와 김세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면 김세진이재호기억저장소라는 사이트가 있으니 들어가 보길 추천한다.
- 2006년 북한이 이재호 열사를 포함한 민주열사 31명을 대학교에 등록하였다. 이재호 열사는 김형직사범대학 김일성동지혁명력사학부 사학과 3학년으로 등록되었다.
4. 참고 자료
자주, 평화, 통일을 부르짖은 이재호 열사를 기억하다이재호 열사 가족 인터뷰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