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8263e><colcolor=#fff> 이옥천
李玉千 | Ok-Che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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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6년 3월 9일 ([age(1946-03-09)]세)[1] |
경상북도 경주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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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 박록주[2]ㅣ 박봉술[3]ㅣ 정광수[4] |
약력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 보유자 |
학력 |
포항국민학교 포항여자중학교 국악예술학교[5](판소리 전공) 서라벌예술대학[6](국악과, 판소리 전공) |
소속 | 사단법인 옥당국극보존회 |
아호 | 옥당(玉堂) |
예명 | 이등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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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국악인,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 보유자.
이옥천 명창은 판소리, 창극, 국극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고 이에 따라 '판소리 명창'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고 '국극의 스타'로 알고 있는 이도 있고 여러 시각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옥천 본인은 무엇보다 판소리에 가장 주력하였고 국악계에서 가장 존중받고 있는 것은 그가 박록주 명창의 수제자라는 점이며 흥보가와 적벽가를 특기로 하는 보기 드문 정통 동편제 명창이라는 점이다. -저서 '판소리 명창 이옥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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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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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가> 조자룡 활 쏘는 대목 (2008)[7]- ©영희야놀자[8] |
아홉살 무렵에 국악 애호가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국악은 기생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단식 투쟁을 감행한 끝에 결국 허락을 받아내어[9] 김향란에게 무용을 비롯하여〈심청가〉한바탕과〈춘향가〉일부(초입~사랑가), 언벽파에게 풍류 및 가야금 병창을 배우게 된다.
포항여중 졸업 후, 서울 관훈동의 국악예술학교 고등과로 진학하여[10] 박녹주[11]· 김소희·박초월·성금연·박귀희·정권진·홍원기·전사섭에게 수학 하였으며, 17세부터 12년간 박록주를 스승으로 모시고〈춘향가〉〈흥보가〉두 바탕,〈심청가〉일부,〈백발가〉〈진국명산〉〈운담풍경〉〈초한가〉〈적벽부〉등의 단가를 전수 받았다.
24세[12]에 정권진에게〈수궁가〉일부(초입~약성가)를, 25세부터 7년간 박봉술에게〈적벽가〉〈수궁가〉두 바탕과〈춘향가〉일부(과거장과 후반부)등을, 30세에 정광수[13]에게〈적벽가〉중 '삼고초려'[14]를 사사했다.
44세에 박록주 바디〈흥보가〉, 45세에 박록주 바디〈춘향가〉를 완창했다. 55세에 장흥 전통가무악전국제전 종합대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56세에 박봉술 바디〈적벽가〉완창을 발표했다. 서울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2004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보유자로 인정 되었다.
이옥천의 '흥보가'는 송흥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박록주로 이어지는 바디인데, 박록주 명창의 성음과 창법을 흡사하게 구사하며 특히 통성, 감는 목, 졸라떼는 목 등은 매우 유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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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가> 흥보 박 타는 대목 (2022)[15] | <흥보가> 놀보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1989)[16]- ©국립국악원[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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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가> 과거장-서리역졸분발-남원으로 내려오는 대목 (2020)[18] |
2.2. 여성국극
"여성국극에서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남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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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임춘앵이 출연하는 여성국극을 접하고 남역 배우로서의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꿈을 가지고 진학한 국악예술학교에 창극과가 없자 예술제에 춘향전을 올려 방자역으로 교내 스타가 된 일화가 있다.[19]
대학 졸업 후, 스승의 반대를 무릅쓰고[20] 1968년부터 2년간 국극 단체를 이끌었으나[21] 기획사에서 돈을 빼돌려 고향의 집과 전답으로 빚을 갚는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 여성예술국극협회의 '춘향전' 방자를 맡았던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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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役 | 이몽룡役[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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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공연 연도 | 제목 | 배역 |
1993년 | 춘향전 | 방자 |
1994년 | 살고지고 살고지고-안평대군 | 김생 |
1995년 | 별 헤는 밤 | 윤동주 |
1996년 | 호동왕자 | 개로장군 |
1996년 | 황진이 | 벽계수 |
1998년 | 진진의 사랑 | 임춘앵 |
2000년 | 춘향전 | 이몽룡 |
2001년 | 은하수 | 견우 |
2002년 | 자유부인 | 장태준 |
2002년 | 홍길동전 | 홍길동 |
2002년 | 서동과 선화공주 | 서동 |
2002년 | 수령과 배꽃아기 | 수령 |
2003년 | 견우와 직녀 | 견우 |
2003년 | 콩쥐팥쥐 | 왕자 |
2004년 | 월인천강지곡 | 양녕대군 |
2007년 | 성왕의 낙원 | 양녕 |
2008년 | 햇님달님 | 햇님왕자 |
2008년 | 연산홍 | 임방울 |
2009년 | 풍류화객 신윤복 | 신윤복 |
3. 스승 박록주
국악예술학교서 나는 성음(聲音)이 아주 좋은 여학생을 발견했습니다. 이름이 이옥천이었습니다. 교감한테 이야기해서 나의 집에 와서 직접 배우라고 했습니다. 1974년 2월 27일자 한국일보, 박록주 연재 기고문 "나의 이력서(37)"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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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2세 무렵 |
박록주와 이옥천의 사이는 스승과 제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스승은 많은 제자들 중 이옥천을 특히 편애하여 주위 선배들에게 시샘의 눈총을 받았다. 이와 같이 박록주를 12년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17세부터이다.
이옥천은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소리 공부가 성에 차지 않아[24] 김소희 선생의 전공반 수업에 들어가 청강을 하곤 하였는데 그러던 중 결국 정말 들어야 할 박록주 선생의 수업을 빠져 교무실로 불려갔고 이 일을 계기로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된다.[25]
박록주는 남의 집에 세 들어살면서 소리를 도제식으로 가르치니 집주인은 물론이고 주변 동네 사람들로부터도 시끄럽다는 항의를 받기 일쑤여서 한여름에도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수업을 하곤 하였다. 단가로는 진국명산, 운담풍경, 초한가, 적벽부, 백발가를 사사하고 춘향가와 흥부가 한바탕씩 그리고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는 토막소리로 사사하였다.
제자가 좋은 소리를 배울 수 있다면 본인이 아닌 다른 선생을 모셔서라도 가르치고자 하였는데 당시 적벽가로 이름나 있던 박봉술을 서울로 불러와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하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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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생 발표회 2등 기념 |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생 발표회에서 2등을 하였는데, 1등은 오정숙[27], 3등은 박초선[28]이었다. 당시 박록주가 너무 긴장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최선을 다할테니 염려 마시라고 진정시킨 후 소리를 하였다. 나이가 어린 탓에 별 기대가 없어 선생님을 모시고 일찍 귀가 하였는데 2등을 하게 되어 친구가 대리 수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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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백년> 박록주의 글을 바탕으로 한 스승을 기리는 자작곡 (2004)[29] - ©KTV 국민방송 |
젊은시절 국극 활동을 반대하는 선생님을 뒤로 하고 '도망'을 갔던 것과 인간문화재 전수생에서 자퇴를 해 버려 선생님 속을 썩였던 것에 회한이 있다.
당시 인간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크게 없어서 전수생 활동[30]이 다른 활동의 걸림돌이 된다고 느꼈고 결국 그만두게 되는데, 박록주는 타계 직전 인간문화재 서류를 다시 올리자고 세 번이나 찾아왔었지만 그때마다 집에 없었던 이옥천은 세상사람들이 내가 선생님 제자인줄 다 아는데 그런게 뭐가 중요하냐고 얘기했었다고 한다. 이후 박록주의 다른 제자인 박송희 명창(1927-2017)이 중요무형문화재 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된 기념공연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승에게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31]
2004년 본인의 무형문화재 지정 기념공연에서 박록주를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보였다.
4. 상훈내역
1957 신라제 봉찬 전국씨름대회 성악 콩쿨 여자부 1등1965 국악예술학교 교내 국악 경연대회 1등
1965 전국남녀중고등학교 학생음악경연대회 1등
1968 전국학생교육무용대경연대회 작품지도상
1972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교육 평가 발표회 판소리 2등
1994 대한민국 국회 문화 체육 공보 위원장 공로상
2000 장흥 전통가무악전국제전 종합대상 대통령상
2003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공로상
2004 한국예술총연합회 예술문화상
2007 서울문화재 전통문화 예술인상
2008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2016 한국국악협회 제33회 한국국악대상
2018 제8회 기산 박헌봉 국악상
5. 기타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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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극
소복(작곡,안무지도)
진주배따라기(작곡,안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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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
의적의흰나비(작곡,예술총감독) ㅣ 임춘앵일대기(작곡,편곡) ㅣ 무영탑(작곡,편곡) ㅣ 사도세자(작곡) ㅣ 언약(작곡) ㅣ 바보온달(창작,연출 편곡) ㅣ 햇님달님(창작,연출,작곡) ㅣ 가야산 연가 (연출,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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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설화(작곡) ㅣ 세종대왕(작곡) ㅣ 김좌진 장군(작곡) ㅣ 택견아리랑(작곡) ㅣ 방자전 (작곡) ㅣ 눈꽃나비(작곡) ㅣ 백야 김좌진(예술감독,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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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The Girl Princes, 2013 )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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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섬광,잔상,속도와 소음의 공연(A Performing by Flash, Afterimage, Velocity and Noise)> (2019, 정은영 作)[32]
6. 여담
- 국극에서 남역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지라 남복이 잘 어울리고 편하여 대체로 자주 입는다.
- 현재까지 미혼으로 첫번째 장가는 판소리에 들었고 두번째는 국극에 들었다고 말하곤 한다.
- 팬들로부터 혈서 편지, 납치, 청혼 등을 받은 전력이 있다.
-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야금, 무용, 작곡 등에 두루 능하다.
- 드라마 정년이의 방자役 실존인물이라 소개되고 있는데, 방자는 춘향전의 감초 역할로서 이옥천 뿐만 아니라 조영숙 등 여러 배우들이 거처간 역할이다.
- 한 팬이 이름을 바꿔주면 다음 공연 표 1,000장을 팔아준다고해서 심청이처럼 팔려간 이름이 이등우(예명)이다.[33]
- 박록주가 집으로 공부하러 오라고 제안한 이후에 김소희가 다른 선생을 통해서 제자로 삼아보려고 하다가 이옥천이 정중하게 거절한 일화가 있다. 이후에 김소희는 이옥천을 만날 때마다 귀엽게 째려보았다고 한다.[34]
- 학창시절 공부하러 가면 해 질 때까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선생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하루라도 안 가면 박록주는 "나는 너를 공상명월로 생각하는데, 너는 나를 흑싸리 껍질로 아느냐"며 서운해했다.[35]
- 공부하러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선생님~'하고 크게 부르고 들어갔는데, 박록주는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엄마~'하고 부르며 귀가하던 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36]
- 수업을 빨리 끝내달라고 할 요량으로 눈병이 난 것처럼 안대를 하고 갔다가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 선생님[37]을 보고 다시는 선생님을 안 속이겠다고 맹세한 일화가 있다.
- 인간문화재(국가지정 무형유산) 전수생에서 자퇴를 하여 훗날 다시 신청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시도지정 무형유산)에 신청하여 등재되었다.
[1]
호적등재일이다. 생일은 음력 12월 9일이다.
[2]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박록주 전수장학생 (흥보가, 춘향가) 12년 사사
[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박봉술 문하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 7년 사사
[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정광수 문하 (이동백(李東伯)제 적벽가 '삼고초려') 사사
[5]
現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6]
現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72년에 중앙대에 인수병합 되었다.
[7]
당시 63세. 안타깝게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활 쏘는 장면[38]이 편집되어 있다.
온전한 버전 참고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은 적벽가에서 가장 유명한 눈대목이다. 이 대목은 목을 상성으로 되게 써야하는데가 많고 우조 성음으로 우렁차게 불러야 하기 때문에 여류 명창은 잘 부르지 않았었다고 한다. [8]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제작사 블로그 [9] #3:45 [10] 포항여중 시절 여성국극에 매료되어 있던 중에 국극, 판소리, 무용, 기악을 배울 수 있다는 입학 홍보문이 신문에 실려있어 부모님을 졸라 상경한 것. 실제는 국극이 없어 잠시 실망했다고 한다. [11] '박록주제' '박록주로'와 같이 '박록주'라고 기재하는 것이 맞다. [12] 출처 : 판소리 명창 이옥천 121p [13]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수궁가 예능 보유자인 정의진 명창이 그의 둘째 딸이다. [14] 정광수는 유성준으로부터 배운 동편제 적벽가에 삼고초려 대목이 없어 중고제 적벽가를 하는 이동백에게 이 대목을 사사했다. [15] '흥보가 박 타는 대목'은 송만갑-김정문-박록주로 이어지는 송만갑제 흥보가의 대표적인 눈대목이다. 박록주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대목으로 이 대목을 꼽았다.[39]
※연도별 동일 대목 → 2023년: #19:47 / 2018년: #7:20 / 2010년: #4:27 / 1989년: #6:28
※박록주 동일대목 → 1967년: #5:25[40] [16] (흥보가 완창 발표) 당시 44세.
이옥천의 흥보가는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데 이는 '박록주제 흥보가'의 특징으로써 이후에 나오는 놀보 박타령의 가사가 난잡하여 여류 명창들은 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수는 김명환, 김득수와 함께 당대 명고수 3인으로 불렸으며 박록주의 지정고수로도 이름이 높았던 김동준이다. [17]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18] 코로나 시절이라 무관중으로 진행되었다. 코로나 퇴치의 염원을 담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19] #1:39 [20] 어린 제자가 단체를 이끌어 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21] 여성국극단 '이귀랑과 그 일행'. 이귀랑은 이옥천 본인의 아명이다. [22] #3:25 [23] 춘향-김성예[41], 월매-김진진[42], 방자-조영숙[43] [24] 박록주는 당시 연로하여 일주일에 한 두번만 수업을 왔었다. [25]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서 전공반 수업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싶으면 우리집으로 오라고 제안하였다. [26] 박봉술이 상경하여 제일 처음으로 가르친 제자가 이옥천이었다. 박록주가 지켜보는데서 박봉술이 지도하고 김명환이 북반주를 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소리가 될지 연구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27] 1935년생, 김연수 선생의 제자 - 91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지정 [28] 1931년생, 김여란 선생의 제자 -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후보 지정 이력 [29] 작사 박록주/작곡 이옥천.
같은 글을 가지고 박송희 명창이 별도로 작곡한 곡도 있다. [30] 일정기간마다 전수활동에 대한 녹음본을 제출했어야했다. [31] 그날 공연에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이 말하길 박록주 선생이 생전에 "내 제자는 '옥천' 그 놈인데 그놈이 공부를 안 하고 속을 썩이고 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한다. 예인저널 [32] 이외에도 정은영 작가의 다수 작품에 등장한다. [33] '옥'자가 몸에 안 좋다고 하였다고 한다. [34] #8:38 [35] #7:25 [36] 박록주는 생전에 자녀가 없었다. [37] 박록주는 전쟁 중이던 1952년에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은 적벽가에서 가장 유명한 눈대목이다. 이 대목은 목을 상성으로 되게 써야하는데가 많고 우조 성음으로 우렁차게 불러야 하기 때문에 여류 명창은 잘 부르지 않았었다고 한다. [8]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제작사 블로그 [9] #3:45 [10] 포항여중 시절 여성국극에 매료되어 있던 중에 국극, 판소리, 무용, 기악을 배울 수 있다는 입학 홍보문이 신문에 실려있어 부모님을 졸라 상경한 것. 실제는 국극이 없어 잠시 실망했다고 한다. [11] '박록주제' '박록주로'와 같이 '박록주'라고 기재하는 것이 맞다. [12] 출처 : 판소리 명창 이옥천 121p [13]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수궁가 예능 보유자인 정의진 명창이 그의 둘째 딸이다. [14] 정광수는 유성준으로부터 배운 동편제 적벽가에 삼고초려 대목이 없어 중고제 적벽가를 하는 이동백에게 이 대목을 사사했다. [15] '흥보가 박 타는 대목'은 송만갑-김정문-박록주로 이어지는 송만갑제 흥보가의 대표적인 눈대목이다. 박록주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대목으로 이 대목을 꼽았다.[39]
※연도별 동일 대목 → 2023년: #19:47 / 2018년: #7:20 / 2010년: #4:27 / 1989년: #6:28
※박록주 동일대목 → 1967년: #5:25[40] [16] (흥보가 완창 발표) 당시 44세.
이옥천의 흥보가는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에서 끝을 맺는데 이는 '박록주제 흥보가'의 특징으로써 이후에 나오는 놀보 박타령의 가사가 난잡하여 여류 명창들은 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수는 김명환, 김득수와 함께 당대 명고수 3인으로 불렸으며 박록주의 지정고수로도 이름이 높았던 김동준이다. [17]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18] 코로나 시절이라 무관중으로 진행되었다. 코로나 퇴치의 염원을 담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19] #1:39 [20] 어린 제자가 단체를 이끌어 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21] 여성국극단 '이귀랑과 그 일행'. 이귀랑은 이옥천 본인의 아명이다. [22] #3:25 [23] 춘향-김성예[41], 월매-김진진[42], 방자-조영숙[43] [24] 박록주는 당시 연로하여 일주일에 한 두번만 수업을 왔었다. [25]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서 전공반 수업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싶으면 우리집으로 오라고 제안하였다. [26] 박봉술이 상경하여 제일 처음으로 가르친 제자가 이옥천이었다. 박록주가 지켜보는데서 박봉술이 지도하고 김명환이 북반주를 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소리가 될지 연구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27] 1935년생, 김연수 선생의 제자 - 91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지정 [28] 1931년생, 김여란 선생의 제자 -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후보 지정 이력 [29] 작사 박록주/작곡 이옥천.
같은 글을 가지고 박송희 명창이 별도로 작곡한 곡도 있다. [30] 일정기간마다 전수활동에 대한 녹음본을 제출했어야했다. [31] 그날 공연에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이 말하길 박록주 선생이 생전에 "내 제자는 '옥천' 그 놈인데 그놈이 공부를 안 하고 속을 썩이고 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한다. 예인저널 [32] 이외에도 정은영 작가의 다수 작품에 등장한다. [33] '옥'자가 몸에 안 좋다고 하였다고 한다. [34] #8:38 [35] #7:25 [36] 박록주는 생전에 자녀가 없었다. [37] 박록주는 전쟁 중이던 1952년에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