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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顺 (? ~ 994)북송 시기의 농민 봉기 주도자. 왕소파의 처남.
2. 상세
993년에 왕소파가 무리들을 이끌고 봉기하자 가담했고 왕소파가 토파촌의 백성이라 칭하면서도 이순에 대해 맹대왕(후촉의 맹씨)의 고아라고 했으며, 왕소파가 사망하자 우두머리가 되었다.공(邛), 촉의 여러 주를 공격해 함락시켜 관리들을 죽였으며, 994년에 성도를 공격해 서곽문을 불태웠지만 승리하지 못하자 한주, 팽주를 공격해 함락했다가 1월 7일에 성도를 함락했다. 성도를 함락하자 대촉왕을 칭하고 연호를 고쳐 응운(應運)이라 했으며, 군사를 보내 북으로는 검관, 남으로는 무협까지 이르렀다.
수천 명의 무리를 나누어 검문을 공격했지만 도감 상관정, 성도감군 숙한 등에게 격파되었고 이순은 도망 온 3백여 명을 동문 밖에서 참수했으며, 소선사 겸 하주단련사 왕계은이 서천초안사에 임명되어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이순의 군사들은 여러 곳에서 격파당했다. 5월 6일에 왕계은에게 성도에서 10여만 명이 격파당해 3만 명이 죽고 이순은 붙잡혔다.
그 해에 이순의 무리 8명이 책형을 당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같은 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