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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21:53:56

이상우(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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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
李祥雨 | Lee Sang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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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8년 9월 12일 ([age(1938-09-12)]세)
경상남도 산청군
현직 한국디지털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주요경력 스포츠투데이 대표이사
국민일보 대표이사
파이낸셜뉴스 사장
ELLE 대표이사
수상 대한민국 문화포장
제3회중앙언론문화대상
한국신문협회 신문상
한국추리문학 대상
신체 180cm, 70kg, O형
가족 아내, 아들2, 딸


1. 개요2. 생애3. 경력4. 특징5. 활동
5.1. 언론분야
5.1.1. 독재와 싸운 기자시절5.1.2. 한글전용 가로쓰기 편집 혁명
5.1.2.1. 1950년대의 한글 신문 실험5.1.2.2. 대구일보에서 순 한글신문 시도5.1.2.3. ‘한글전용 신문’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 5.1.2.4. 한글 창조 과정을 7권의 소설로 묘사
5.1.3. 신문 최다 창간과 ‘이상우 사단’5.1.4. 한국 신문의 해외 진출 시도5.1.5. 인재 개발
5.2. 작품활동
5.2.1. 추리소설
5.2.1.1. 감방에서 구상한 플로트5.2.1.2. 일본 대만 작가들과의 교류5.2.1.3. 50쇄 발행한 <악녀 두 번 살다>5.2.1.4.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5.2.2. 역사소설5.2.3. 문학 평론
5.3. 교육, 방송활동
5.3.1. 교육, 후배양성5.3.2. CF 출연과 방송 활동
6. 저서
6.1. 장편소설(역사)6.2. 장편소설(추리)6.3. 단편집6.4. 언론 평론, 에세이6.5. 추리 평론, 에세이집6.6. 영화-드라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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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언론인, 소설가.

대한민국 언론인으로 중앙 일간 신문 등 10여개 언론 기관에 종사하면서 투철한 기자 정신으로 정론지의 제작에 전력했다. 독재 권력을 비판하다가 투옥되었지만 굽히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신문을 제작한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특히 스포츠 신문의 편집 혁신을 일으켜 ‘스포츠지의 귀재’ ‘신문 마이더스 손’이라는 별명과 함께 언론사의 전설로 불리었다. 견습 기자로 출발해 20단계의 승진을 거쳐 일간 신문의 대표이사 회장에 까지 이르렀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소설 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추리소설 <신의 불꽃> 등 300여 편, 역사소설 <세종대왕 이도> 등 10여 편을 발표했다.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는 단시일에 50쇄, 50만부를 발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3년에 추리작가협회 창설 멤버가 되어 18년간 회장으로 후배 양성에 힘썼다. 현재 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한국문입협회회원으로 국제펜클럽한국봅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를 지내고 현재 한국디지털문인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언론인 생활과 창작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후배 교육에도 힘써 중앙대 대학원, 추계예술대학, 대진대학 등 3개 대학에서 매스컴과 문학 강의를 12년간 계속했다.
2022년 한국디지털문인협회를 창설하여 이사장으로서 디지털 문인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 생애

이상우는 1938년 일제 강점기 지리산 기슭 해발 400미터가 넘는 산골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철수리에서 6남매 중 다서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설 회사 대표로 타지에 나가 계셨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유지했다.

8.15 해방 다음해에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 뒤에 월반해서 4학년이 되었지만, 좌우익 싸움으로 혼란스러웠던 고향을 버리고 대구로 이사를 했다. 대구 동인 국민학교 4학년에 다시 편입학 했다. 6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집안을 유지해 오던 형은 군에 입대하고 아버지는 노무대로 징집되어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 형은 1년 뒤 전사했다.
아버지는 장남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관해 오다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우는 초등학교도 못 마친 3살 위의 누나와 미망인이 되어 유복자처럼 된 조카를 품에 안고 눈물만 흘리는 형수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전쟁 통에 대구 길거리에는 피난민으로 가득차고, 굶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상우가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나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다. 신문팔이를 하면서도 신문에 실리는 연재소설을 꼬박꼬박 읽으며 문학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고학으로 중고등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공채 직장인 은행에 취직하기 위해대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여전히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았다. 문예반장을 맡아 교지를 창간하기도 하고, 소년 잡지에 투고하여 시와 소설을 싣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강의가 있는 청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영남일보사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낮에는 신문기자, 밤에는 대학생 생활을 2년간 했다.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대구일보로 스카우트되었다가 1962년 필화 사건으로 계엄사령부 제5관구(경북지역)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죄명은 ‘국가를 변란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어마어마한 ‘특별범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었다.
‘화폐개혁 실패 기사’로 부르는 이 필화 사건은 여론이 나빠지자 한 달 만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지시로 석방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국 편집인 협회 홍종인 회장이 대구형무소까지 면회를 왔다가면서 언론 탄압 규탄 성명을 내고 석방 운동을 했다. 대구의 변호사 14인(대표 변호사 박찬)이 무료 변호인단을 조직했다.
필화 사건의 진상은 ‘화폐개혁 폄하’였지만 배경은 당시 이상우가 대구일보에 연재한 <신설 임꺽정전> 등의 풍자소설에 대한 괘씸죄였다.

1966년에 다시 한국일보로 스카우트되어 서울에서 기자생활과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일보에서 종합 편집부장, 주간 편집국장, 전산 편집국장 등을 거치면서 신문의 컴퓨터 화를 최초로 실현 시켰다.

이상우가 서울신문으로 스카우트되어 <스포츠서울>을 창간하여 크게 성공을 이룰 무렵 집안에는 큰 불행이 닥쳤다.

25세에 결혼 해 30년 함께 산 아내가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이상우는 그 후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직장과 작품 집필 및 아내 간병을 함께 했다.

1990년 계간지 <추리문학>에서 실시한 1천만 고료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권경희의 작품 <저린 손끝>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당선 작가인 권경희는 공기업에 근무하면서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주최한 여름추리학교에 참여했던 문학 지망생이었다. 숙명여고 시절 중앙대학교에서 실시한 전국 고교생 문학작품 모집에 소설 부문 1위 당선 경력이 있었다.

1994년 부인과 사별한 뒤 거의 8년간 혼자 지내던 이상우는 주위 작가들의 권유로 소설가 권경희와 재혼을 했다.

부인 권경희의 <저린손끝>은 KBS에서 미니시리즈로 드라마화 하기도 했다. 권경희는 상담심리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상담심리전문가로서 착한벗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의 상담위원,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조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상우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상영은 서울대 경제학박사를 거쳐 <(주)부동산114>를 창설 했다. 현재는 명지대학 미래융합대학장겸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2남 이문영은 소설가, 게임시나리오 작가, 출판인, 역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딸 이나나는 방송 작가로 일하다가 지금은 미술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다.

3. 경력

4. 특징

65년 동안 현업에서 일하면서 언론, 문학, 교육 3분야에서 모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언론 현장에서 65년간 뉴스 현장을 지키며 지금도 4개 매체에 소설 연재와 시사 칼럼을 쓰고 있다.

이상우는 대학 재학 시절 지방신문 수습기자로 출발하여 중앙 일간신문으로 진출해 편집, 경영 등에 특출한 노력을 보여 한국 신문의 지면 혁신 및 제작 방식을 개선, 최초로 완전 전산화를 도입하여 신문 제작의 근대화에 힘을 보탰다. 일간 신문 6개를 창간하고 11개 신문사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신문의 디자인과 편집에 새로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신문 경영 방식에도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어 특히 스포츠신문의 창립, 경영에 성공, ‘신문경영의 귀재’(월간조선 2001.9월호) ‘스포츠 신문 마이더스의 손’(미디어오늘 93.10.25)이라는 평을 얻었다.

20대 초반 일간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60여 년 동안 40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에 주력했다.

5. 활동

5.1. 언론분야

5.1.1. 독재와 싸운 기자시절

1962년 대구일보 기자 시절 틈틈이 신문에 채국산인(採菊山人)이라는 필명으로 풍자 소설을 연재 했다. 5.16 군사쿠데타 독재를 풍자한 신문 연재소설이 정권의 미움을 사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투옥 되었다. 표면상 이유는 군부가 실시한 화폐개혁의 민생 피해를 보도한 기사(감포 사지폐사건)였다. 군사재판을 받던 중 언론 단체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다.

한국일보 종합편집부장으로 근무하던 1974년 유신 독재시절 박정희 정권과 월남 정권의 비교 보도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들이 집단성명을 발표하며 저항 운동을 한 <74 언론 자유선언>(<1974년 겨울 겨울> 한국일보 노조 투쟁사)의 계기가 되었다.

5.1.2. 한글전용 가로쓰기 편집 혁명

1985년 서울 신문에서 창간한 <스포츠 서울>의 초대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최초의 가로쓰기, 한글 전용 신문을 발행하여 한국 신문 편집의 혁명을 이루었다.

첫째, 한국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신문을 제작하여 현대 신문의 한글화 체제를 완성시켰다. 1985년 창간한 ‘스포츠서울’의 창간 편집국장을 맡아 한국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교과서식 문장부호를 사용한 한국 최초의 중앙일간 신문을 창간하였다.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반대하던 모든 신문이 마침내 이 체제를 따라오게 되었다.

둘째, 소설가인 이상우는 20여년에 걸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 장편소설 7권을 발표하여 많은 독자들이 한글의 위대함을 일깨웠다.

셋째, 한글 활자체 연구논문 수십 편을 발표하였다.

넷째, 한글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문사에서 편집과 제작, 임원으로 있으면서 신문 제작의 전산화를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마침내 한글 신문의 전산화를 위해 세계적인 폰트 회사인 Xenotron, (주) 서울시스템과 공동 연구로 신문 CTS 제작의 길을 열기도 했다.

대학에서 매스컴 강의를 하면서도 한글 가로쓰기 신문 제작에 관한 강의와, 논문, 기고문을 계속 발표하여왔다.
또한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에 참여하여(부이사장) 강의와 연구, 한글 우수성 홍보 등에 힘써왔다.
이상우 씨는 언론계 종사 50여 년 동안(1958~현재, 영남일보, 대구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파이낸셜 뉴스, 굿데이 등에서 편집부장, 전산편집국장, 편집국장, 사장, 회장) 항상 모든 기사의 한글 전용, 가로쓰기 등을 위해 노력해왔다. 마침내 1985년 창간한 중앙일간신문인 ‘스포츠서울’의 편집국장으로서 순 한글 표기, 전면 가로쓰기, 교과서식 문장부호 사용 등을 완벽하게 실현하여 신문제작 역사상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1985년에 스포츠서울이 전면 가로쓰기를 한 이후 각 신문사가 하나둘 따르더니 마침내 1999년에 조선일보가 맨 마지막으로 가로쓰기의 대열에 동참했다. 스포츠서울이 던진 가로쓰기란 돌 하나의 파문이 한국 언론 전체에 흐르던 세로쓰기의 물길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5.1.2.1. 1950년대의 한글 신문 실험
나는 대구일보에서 근무하던 신문기자 초기 시절부터 무슨 신문이든 독자를 위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사 제목도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한자를 지양하고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다. 1960년대만 해도 신문 제목은 한자 일색이었다. ‘통과시(通過示)’, ‘통과호(通過乎)’ ‘수일간(數日間)’ 등이 일상적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웬만큼 배운 사람이 아니면 신문을 볼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한 마을에 한둘일 정도였다.
나는 그런 한문 투의 문장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통과될 듯’ ‘통과될까’ ‘며칠 동안’으로 바꾸어 썼다. 그러자 대구일보 사주가 신문을 너무 경박하게 만든다고 화를 내며 신문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스포츠서울을 창간하면서 가로쓰기와 함께 혁신을 단행한 것이 한글전용이었다.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모토였다. 당시의 20대는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였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해도 한자를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 그러니 젊은 층은 신문과 점점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신문은 기득권 세력의 편향된 지식 전달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함께 단행한 개혁이 ‘교과서식 맞춤법 적용’이었다. 당시 신문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들어온 일본식 표기 방법과 신문 특유의 맞춤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대화체에 따옴표를 쓰지만 신문에서는 히가께라고 하여 꺾쇠를 사용했고, 나까구로라 하여 가운데 점찍는 것, ‘리다’라고 하여 점을 세 개씩 찍는 것 등을 썼다. 나는 이를 모두 교과서식 맞춤법으로 통일했다.”
5.1.2.2. 대구일보에서 순 한글신문 시도
이상우는 1960년대 후반 대구일보 기자로 근무할 때 신문기사의 혁신을 꾀해야 된다고 마음먹고 우선 지면의 개혁을 시도했다. 한글 전용 지면을 만들고 단어도 우리말로 풀어서 썼다. 가령 ‘20여명’은 ‘20몇 명’, ‘김모씨’는 ‘김아무개’, ‘100여일’은 ‘100며칠’ 이런 식으로 썼다.
1963년 20대의 청년 편집부장이던 그는 이 만용(蠻勇)에 가까운 짓을 흐뭇하게 생각하고 전 지면을 이런 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런 지면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발행인에게 불려가 도대체 신문을 왜 이렇게 망치느냐고 호통을 듣게 된다. 한자에 익숙해 있는 경영인들에게 순 한글 신문은 ‘암호’신문으로 보였던 것이다.
5.1.2.3. ‘한글전용 신문’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
이상우는 한글 전용신문의 장점을 역설하는 기고문과 논문을 끊임없이 발표하여 언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5.1.2.4. 한글 창조 과정을 7권의 소설로 묘사
역사 및 추리소설가이기도 한 이상우는 작품을 통해 한글 창조의 역사와 제작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여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상우는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의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 소설 7권을 발표했다.

한글이 창제된 상세한 과정을 잘 모르던 독자들이 현실감 넘치는 소설로 역사를 읽으면서, 한글과 세종 대왕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였다.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이상우의 소설은 다음과 같다.
(1) 세종대왕 이도 (1, 2, 3권. 2016. 도서출판 시간여행)
(2) 대왕 세종(상, 중, 하. 2008. 도서출판 집사재)
(3) 실록소설 세종대왕 (상,하. 1997 동방 미디어)

5.1.3. 신문 최다 창간과 ‘이상우 사단’

이상우는 958년 견습 기자로 시작하여 2024년 현재까지 66년간 현역 기자로 일하는 한국 최장수 현역기자의 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수습기자에서 회장까지 20단계의 승진을 해왔다. 또한 6개의 일간 신문을 창간하고 10여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를 창간했다.

또한 신문 제작의 외주, 계약제 사원의 채용 등으로 신문 경영에 회기적인 아이디를 실현했다. 2001년에 창간한 goodday 신문은 경향신문을 주주로 참여시키는 최초의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종합 일간지였다. 스포츠 신문이나 경제 신문 같은 특수지와는 달랐다. 신문을 창간할때마다 200여 명의 기자와 전문 직원을 채용해야 했다. 따라서 이상우의 창간을 눈여겨 보면서 함께 움직인 언론인도 200여 명이 되어 언론계에서는 ‘이상우 사단’이라고 불렀다.

5.1.4. 한국 신문의 해외 진출 시도

goodday 신문은 해외 진출을 시도하여 첫 번째로 2002년 뉴질랜드에 현지 법인을 세웠다. 또한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에 스포츠 신문을 창간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2002년 전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를 서울 goodday 신문사로 초청, 모스크바에 합작 신문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에는 러시아에 스포츠 신문이나 컬러 신문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고르바초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타계할 때까지 성사가 되지 못했다.

5.1.5. 인재 개발

많은 신문과 잡지를 창간하면서 필자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다. 일간스포츠는 전 IOC위원이며 부총리를 지난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자가 만든 신문이었다. 그러나 독자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상우는 당시 한국일보 종합편집 부장으로 있으면서 스포츠 지의 판매 확장을 위한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했다. 이상우의 아이디어는 추리소설의 연재와 극화로 불리는 전 페이지 만화 연재 등이었다. 김성종, 노원 작가를 발굴하여 추리소설 연재를 하고 고우영을 발탁, 만화 <삼국지> <수호전> <임꺽정> 등을 연재하여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스포츠서울을 창간할 때는 당시 대학생이던 이규형을 발굴하여 <청춘스케치 미미와 철수>,를 연재하게 했고, 김왕석의 <맹수와 포수>, 강철수의 <발발이의 추억>, 전영호의 <개그펀치> 등을 연재하여 젊은 독자들로 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규형은 뒤에 영화 감독으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goodday 시절에는 만화가 박인권을 발탁 <대물> <쩐의 전쟁> 등을 연재하여 독자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5.2. 작품활동

5.2.1. 추리소설

5.2.1.1. 감방에서 구상한 플로트
이상우는 대구 상업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했다. 시, 소설, 수필 등 습작을 엄청 많이 썼다. 교지도 창간해서 편집 발행하기도 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도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가형을 비롯한 영문학 교수들이 주동이 된 미스터리 클럽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2년 뒤 회장을 맡아 18년간 활동했다. 척박한 우리 문단의 추리 작단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이상우가 관여한 일간 신문 3군데서 ‘추리소설 신춘문예’를 시작했다. 뒤에 <용의 눈물> 드라마 작가로 이름을 날린 이환경을 비롯해 수십 명의 작가를 배출 했다.
협회가 주최하는 ‘여름추리학교’를 해마다 열어 독자의 폭을 넓혀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기관지 격인 ‘계간 MYSTERY'도 2002년에 시작해서 문단의 장수 문예지로 발행하고 있다.
5.2.1.2. 일본 대만 작가들과의 교류
한국 추리작가협회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1993년 일본 추리작가협회 (회장 이꾸시마지로 生島次郞)와 계약을 체결하고 작품 교류 및 출판, 학술 세미나 등을 시작했다. 매년 상호교류와 상호 번역 출판도 했다.

이상우가 추리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군사정부의 언론탄압과 관련이 있다. 1962년 대구일보 편집부 기자였던 이상우는 군사정부의 화폐개혁 단행에 관련된 기사를 취재 지시하고 편집하면서 군사정부로부터 괘씸죄에 걸렸다. 동해안 감포에서 일어난 화폐개혁 부작용으로 잔돈이 모자라 소상인들이 거스름돈이 없어 장사를 못한다는 기사였다.
군사정부의 ‘국가를 비난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징역에 처한다’는 특정범죄 임시조치법 위반으로 계엄 사령부 제5관구 보통군법회의에 회부 되었다. 2평 남짓한 감방에 20여 명이 갇힌 형무소(교도소)에서는 감방장이 왕이었다. 이상우는 감방장을 위해 하루 종일 옛날이야기를 해야 했다. 감방장은 셜록 홈즈나 루팡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가 떨어지는 날은 온갖 린치를 당했다. 고역을 벗어나기 위해 밤새 이야기를 만들어 이튿날 하루를 사는 일이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5.2.1.3. 50쇄 발행한 <악녀 두 번 살다>
석방되고 남은 것은 100여편의 추리소설 줄거리였다. 이상우는 원고 청탁이 올 때마다 그 플로트를 하나씩 빼서 소설을 썼다.이를 계기로 문단에서 추리작가로 점 찍혔다.
처음에는 <어깨동무> 같은 잡지에 어린이 추리소설을 쓰다가 <소설 문학> 등의 월간지로 옮겨 싣기 시작했다. 세 번째 쓴 장편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50쇄에 50만부가 팔렸다. 이 소설로 제3회 한국추리문학대상을 받았다.
국제 첩보 소설로 알려진 <신의 불꽃>은 원자력 발전소를 소재로 한달 동안 고리원전 현장을 취재해서 쓴 작품이다.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의 우수성을 부각한 작품으로 중동 수출을 예언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5.2.1.4.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첫 번째 장편 소설 <화조 밤에죽다>는 <소설 문학>에 연재한 뒤 KBS에서 드라마로 방송 되고, 네 번째 소설 <안개 도시>는 김성수 감독 영화로 만들어졌다. 80년대 반독재 운동권을 주제로 다룬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를 최야성 감독이 영화로, 김영수 감독이 연극으로 제작했다. 중편 <여섯 번째 사고>는 KBS와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 되었다.

5.2.2. 역사소설

이상우는 역사 소설 첫 작품은 1962년부터 대구일보에 3년에 걸쳐 ‘채국산인’이란 필명으로 연재한 <신설 임꺽정전>이었다. 이 소설은 군사정부로부터 독재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오해를 받아 옥살이까지 하게 한 풍자 역사 소설이다.
두 번째 작품은 이성계와 이방원의 대결을 다룬 <북악에서 부는바람>(상하 2권)이다. 세 번째 작품 <세종대왕 이도>(1,2,3권)는 세종 임금의 인간적 고뇌를 깊이 다루었다는 평을 받아 578돌 한글날 대통령 문화포장을 받는 동기가 되었다.
이어 <정조대왕 이산>,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 <북악에서 부는 바람>을 개작한 <해동 육룡이 나르샤>를 출간했다. <역사에 없는 나라>(상,하)는 가상 역사 소설로 부패한 독재 정권과 민중 세력의 투쟁이 소재다.

5.2.3. 문학 평론

이상우는 추리소설을 쓰고 후배 양성을 하면서 이론서의 부족을 느끼고 직접 집필도 했다. 추리소설의 시원에서부터 한국의 추리역사를 정리한 <이상우의 추리소설 탐험>, <추리소설 잘쓰는 공식>, <이상우와 함께 추리소설 완전 정복>등을 출간했다.

5.3. 교육, 방송활동

5.3.1. 교육, 후배양성

이상우는 신문사의 편집국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신문 제작에 관한 소견과 연구 논문 약 20편을 발표했다. 언론연구원의 기자 교육에 참여하여 전국 언론사의 편집 기자 교육에도 참여했다.
1992년에는 <현대 신문 편집론>(유창하 공저)을 출간해 편집기자와 언론 지망생의 교재로 쓰였다.
1990년부터 12년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객원 교수로 석사과정 강의를 했다. 19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대진대학 문예창작과에서도 강의를 했다.
1986년부터 여름철에 <여름 추리소설 학교>를 개설하고 문학 지망생 교육과 실습 등으로 작가 40여 명을 등단 시켰다.

5.3.2. CF 출연과 방송 활동

이상우는 언론 현역 임원으로 근무하던 1993년 추리작가 신분으로 CF에 출연했다. 독일의 ‘바이엘 아스피린’ 회사의 부탁으로 신제품 <바이아스핀>의 한국 판 TV CF 및 잡지 광고에 모델로 출연하였다. 이 광고를 계기로 한때 문화예술인 광고 모델 출연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이상우는 2008년 TV방송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주)Today 프로덕션> 회장을 맡아 주요 방송국의 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2010년에는 케이블 TV인 <BookTV>를 창설, ‘저자와의 대화’등 연속 프로에 직접 대담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6. 저서

6.1. 장편소설(역사)

6.2. 장편소설(추리)

6.3. 단편집

6.4. 언론 평론, 에세이

6.5. 추리 평론, 에세이집

6.6. 영화-드라마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