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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12 21:12:36

이사현

{{{#white 이사현(李仕鉉)
一名 사흠(仕欽)|호(號) 죽산(竹山))}}}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관향 원주(原州)
출생 1861년 12월 18일
사망 1904년 4월22일
관직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배(配) 정부인(貞夫人) 현풍곽씨(玄風郭氏)
슬하 3남 3녀
1. 개요2. 일생3. 가족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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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이사현(李仕鉉)의 다른 이름은 사흠(仕欽)이고 호(號)는 죽산(竹山)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이천익(李天翼)요, 할아버지(祖父)는 이기혁(李基赫)이고 아버지(父)는 이공성(李公聖)이다.

2. 일생

아버지 이기백(李基伯)과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 송실담(宋實淡)의 따님 사이에서 1861년12월18일에 태어났다.

무릇 선비로서 한 몸을 바쳐 나라에 충성(忠誠)하고 힘을 다하여 효제(孝悌)하는 것은 그 본분(本分)이리라.
그러나 이를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사람은 흔치 못하건만 여기에 어려운 사정(事情)임에도 충효(忠孝)를 실천(實踐)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해남군 화원면 화봉리에 사는 의사(義士) 원주이공(原州李公) 휘(輝) 이사현(李仕鉉)이다.

이사현(李仕鉉)의 다른 이름은 사흠(仕欽)이고 호(號)는 죽산(竹山)이니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13대손이고 증조부(曾祖父)는 이천익(李天翼)인데 그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인 이기혁(李基赫)이 이공성(李公聖)을 낳으니 이사현(李仕鉉)의 아버지요, 둘째인 이기백(李基伯)이 이재성(李再聖)을 낳으니 그가 생부(生父)이다, 생모(生母) 여산송씨(礪山宋氏) 송실담(宋實淡)의 따님이 사현(仕鉉)을 낳고 곧바로 돌아가시니 당숙모(堂叔母) 무안박씨(務安朴氏)가 사현(仕鉉)을 데려다 길러 양부모(養父母) 밑에서 자랐다.

1861년(辛酉) 철종(哲宗 12) 12월 28일 화봉리 본댁에서 태어났는데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여 권세(權勢)에 굽히지 아니하고 불의(不義)를 보면 대쪽 빠개듯이 척결(剔抉)하였으며 평소(平素) 소신(所信)이 신후(愼厚)하여 산(山)과 같이 무거우니 사람들이 죽산선생(竹山先生)이라 일컬었다.
일찍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선생 문하(門下)에 드나들었고, 취괴당(醉愧唐) 박동림(朴東林)과는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다.
고종연간(高宗年間)에는 지방관속(地方官屬)들의 토색(討索)이 심(甚)하여 백성(百姓)들은 괴로움에 시달렸다, 한번은 해남(海南) 이속(吏屬)들이 이미 거두어간 세곡(稅穀)을 또 거두는데 까닭인즉 세곡(稅穀)을 운반하던 배가 바다에서 침몰(沈沒)하였음에 나라에 바치기 위하여 다시 거두어야 한다니 자못 민심(民心)이 술렁거렸다. 이사현(李仕鉉)은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농간(弄奸)임을 알아차리고 곽선경(郭善景)과 더불어 관아(官衙)p 나아가서 반박(反駁)하여 말하기를 “육지(陸地)는 해남(海南)이나 바다는 나주(羅州)인데 해남에서 떠난 세곡(稅穀)을 나주에서 잃었다면 마땅히 나주에서 찾아야 하겠거늘 해남에서 다시 거둔다니 될 말이냐.”고 항변(抗卞)하니 해남 백성들의 기개(氣槪)가 만만(萬萬)치 않음을 깨닫고 세곡을 다시 거두는 일을 멈추었다.
이는 탐관(貪官)의 횡포(橫暴)를 막아 민생(民生)을 편안히 하는 한편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지경에 이른 민란(民亂)도 막았으니 이사현(李仕鉉)의 의협(義俠)과 용기(勇氣) 그리고 기지(機智)가 엿보인다.

1894년(甲午) 고종(高宗 30)에 정읍(井邑) 등지에서 마침내 농민의거(農民義擧)가 일어나니 이사현(李仕鉉)은 동지(同志) 김순호(金順鎬), 곽선경(郭善景), 곽필순(郭弼順), 박문겸(朴文兼) 등과 더불어 해남(海南)의 의사(義士) 수십 명을 이끌고 나주(羅州)에서 합세(合勢)하여 전주(全州)까지 나아가 마침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啟薰)으로부터 “지방관속(地方官屬)들의 악폐(惡弊)를 바로잡겠다.”는 약속(約束)을 받아 목적(目的)을 이루고 돌아왔다.
1898년(戊戌)에 행의양(行誼讓)으로 홍릉참봉(弘陵參奉)의 직설(職碟)을 받았다. 그러나 이사현(李仕鉉)은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함을 개탄(慨嘆)하고 국력(國力)을 기르려면 먼저 인재양성(人材養成)이 시무(時務)라 생각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산림(山林)에 묻혀 화봉서재(花峰書齋)에서 후학(後學)을 이끌었으니 뒤에 항일(抗日) 보민(保民)의 지사(志士)가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1902년 11월 학덕(學德)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주임(奏任)되었으나 구국(救國)의 뜻을 이루지 못한 한(恨)을 안고 1904년 4월22일 불의(不意)에 장자(張子) 이진영(李珍泳)과 함께 타계(他界)하니 이사현(李仕鉉)의 나이 44세요 아들은 29세였다.
장자(張子) 이진영(李珍泳)은 아버지를 도와 화봉서재(花峰書齋)를 이끌었고 그 미망인(未亡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따님만 셋이요 후사(後嗣)가 없었는데 길쌈으로 가업(家業)을 일으켜 도문중(都門中)의 추원당(追遠堂) 중수(重修)에 “조상(祖上)에게 자손(子孫)을 낳아 바치지 못한 속죄(贖罪)로 재산(財産)이라도 바친다.” 하여 300금(金)을 헌성(獻誠)하니 오늘까지도 효열(孝烈) 6과부(寡婦)라 일컬어 칭송(稱頌)하고 있다.
차자(次子) 이태영(李泰泳)은 산호리(山湖理) 간척지(干拓地) 옆에 야산(野山)을 3년에 걸처 개척(開拓)하여 밭을 일구고 학상리(學翔理)를 개촌(開村)한 흥업(興業)의 선구자(先驅者)로 보민(保民)에 앞장섰으며, 계자(季子) 이청영(李淸泳)은 마을 앞 원(垣) 안의 불모지(不毛地)를 양어장(養魚場)으로 조성(造成)하고 갯벌에 새 도로(道路)를 구축(構築)하였으며 해변(海邊)의 사유지(私有地)에 소나무를 이식(移植)하여 풍치림(風致林)을 육성(育成)하여 공익(公益)에 힘쓰니 이 모두가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였던 의관공(議官公)의 유지(遺志)에서 우러났음이로다.
신간회(新幹會)가 싹트던 1926년 화봉서재(花峰書齋)를 중심으로 한 산하(山下)의 4리(里 즉, 花峰, 草洞, 石湖, 山水)의 주민(住民)들은 일본(日本)의 식민정책(植民政策)에 맞서고 동하(東夏 우리나라 이름)의 도(道)를 보전(保全)하고자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5,000원(圓)의 기금(基金)으로 학무조합(學務組合)을 창립(創立)하여 화봉재(花峰齋)와 야학당(夜學堂)의 운영(運營) ‘유능한 인재(人才)를 대상으로 장학금(獎學金) 지원(支援)’ ‘공동판매장(共同販賣場)의 운영(運營)’ ‘영농(營農)의 지도(指導)’ ‘화봉산(花峰山)에 산신제(山神祭)의 연례집존(年例執尊)’ 등의 사업을 추진(推進)하여 일본(日本) 수탈(收奪)의 앞잡이이자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인 일본인(日本人) 이가라시(五十嵐)에 의한 피해(被害)를 막아 농촌진흥(農村振興)과 민족의식(民族意識) 함양(涵養)에 힘썼으니 이 정신(精神)의 뿌리는 이사현(李仕鉉)의 구국정신(救國精神)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사현(李仕鉉)의 의행(懿行)과 장자부(張子婦)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열(孝烈)이 향리(鄕里) 사림(士林)들의 천망(薦望)에 올라 길이 빛나리니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관감(觀感)있기를 바라노라.

3. 가족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현풍곽씨(玄風郭氏) 곽필익(郭弼益)의 따님이요, 슬하(膝下)에 3남3여를 두셨으니 첫째 아드님은 진영(珍泳)이고 둘째 아드님은 태영(泰泳)이고 셋째 아드님은 청영(淸泳)이다.
첫째 사위는 여흥인(驪興人) 민봉식(閔鳳植)이고 둘째 사위는 평창인(平昌人) 이형선(李炯先)이며 셋째 사위는 우주인(宇宙人) 황족관(黃足官)이다.

4. 참고문헌

해남향교지
원주이씨대동보(1991)
원주이씨 강릉공파의 인물과 유산(비천당/김성태 저/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