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 배경
룬테라의 어두운 경계선 안에서, 악마 이블린은 다음 먹잇감을 찾고 있다. 먼저 관능적인 인간 여성의 얼굴로 사냥감을 유혹한다. 희생자가 그 매력에 넘어오면, 이블린은 악마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블린은 희생자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 자신은 그 고통에 희열을 느낀다. 이블린이라는 악마에게는 이것이 한바탕 즐기는 유희일 뿐이지만, 룬테라 주민에게는 엇나간 욕망을 발산했다가는 그 대가로 끔찍한 종말을 맞게 되리라는 교훈을 되새겨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이블린이 처음부터 능수능란한 사냥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이블린은 뚜렷한 외양도 없고 자의식도 거의 없다시피한 태고의 존재였다. 그림자가 뭉쳐 희미하게나마 형체 비슷한 것을 갖추었으나 수백 년 동안이나 감각도 없었고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상태 그대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역사에 ‘룬 전쟁’이라고 기록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이 세계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고통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룬테라 전역의 주민들이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 고뇌와 번민, 상실과 소멸을 겪기 시작하자, 그림자도 꿈틀거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공허한 무(無)밖에 모르던 그림자가 차츰 번뇌하는 세계의 광기 서린 흔들림에 반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명을 얻게 된 그림자는 흥분을 느끼며 전율했다. 룬 전쟁이 일파만파로 확산되며 세계를 뒤덮은 고통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림자는 룬테라의 모든 고통을 게걸스럽게 들이키며 무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 감각은 그림자의 생명에 양분을 공급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그림자는 한 단계 더 변모하여 악마가 되었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감정을 아귀처럼 먹어치우며 살아가는, 인간 영혼의 기생물 같은 존재로 변신한 것이었다. 룬 전쟁이 마침내 끝을 맺고 세계를 짓누르던 고통도 시들자, 악마는 다급해졌다. 악마가 아는 쾌락이라고는 인간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즐거움뿐이었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악마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희미한 그림자뿐이던 태초의 존재가 그랬듯이. 이 세상이 악마가 그토록 집어삼키고 싶어하는 고통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악마가 직접 그런 고통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고, 그 고통에서 자신은 희열을 맛보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냥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림자 형태를 유지하며 움직이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인간의 몸에 손을 대려면 눈에 뚜렷이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형체가 되어야 했다. 악마는 그림자뿐인 자신의 몸을 실체가 있는 여러 형태로 바꾸어 보았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시도하면 할수록 더더욱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갈 뿐이었다. 사냥감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기겁을 하고 도망가 버렸다. 시행착오 끝에 이블린은 깨달았다. 인간 사냥감을 잡으려면 인간이 쾌락을 느끼는 형태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발톱 안으로 인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하려면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 황홀경을 미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그들이 악마의 품 안에서 버르적거리며 내뿜는 고통이 더더욱 달콤해진다는 것을. 그림자 속에서 이블린은 사냥감을 끌어들일 방법을 연구했다. 자신의 몸을 인간이 좋아하는 형태로 바꾸는 법과, 인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법과, 인간이 매력을 느끼는 방식으로 걷는 법을 익혔다. 얼마 안 가 이블린은 인간의 욕망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형태로 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형태에 홀딱 반한 인간들이 수십 명이나 걸려들어 악마의 손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갔다. 이블린은 인간들의 생생한 고통을 마음껏 즐겼지만, 언제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 했다. 인간 한 명의 욕망은 너무 작았고, 너무 빨리 끝나 버리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고통 역시 순식간에 스러져 버렸기에, 이블린은 다음 먹잇감을 잡아들일 때까지 간신히 버틸 만큼 찰나의 쾌락밖에 맛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블린은 이 세계를 절대적인 혼돈에 빠뜨릴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이 세계에 순수한 황홀경이 가득 찰 테니. |
2. 단편 소설: 가장 싱싱한 들꽃
이블린은 행인들이 우글거리는 거리를 소리 없이 누볐다.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그녀의 몸은 밤의 어두움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밤거리의 우울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눈이 번득였지만, 제아무리 날카로운 관찰력의 소유자라도 알아보기 어려울 터였다. 근처 대로에서 술 취한 자들, 선원들, 매춘부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악마가 어둠 속에 숨어 자신들을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이블린은 반대편 길가에서 그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이블린의 눈이 술병을 움켜쥐고 길가 도랑에 나뒹굴고 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평소라면 그런 상태의 남자에게는 단 한 순간도 눈길을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 이블린은 며칠 동안이나 굶주려 있었기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저런 사냥감이라면 일은 아주 쉬울 터였다. 이 근처에 수십 개나 있는,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뒷골목으로 꼬여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술취한 남자의 얼굴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올라가는 것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어 무감각한 상태였다. 저런 자를 흥분시켜 봤자 무디고 어렴풋한 감정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블린이 희생자에게서 맛보고 싶어하는 다급하고 강렬한 충동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에게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끌어내려면 어느 구석이든 꽤나 세게 물어뜯어야 할 것이다. 이게 문제였다. 숱하게 인간을 사냥해 온 이블린은 자신의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발톱으로 희생자를 고문할 때 희생자가 그 쓰라린 통증, 그 소름끼치는 감각을 한 점 남김 없이 느끼기를 바랐다. 그렇게 예민한 희생자가 필요했다. 저렇게 술에 떡이 된 남자는 고통에 둔감할 테니 이블린을 만족시킬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공연히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이블린은 주정뱅이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진창길 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촛불의 노란 빛이 눅진하게만 느껴지는 선술집 창문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덩치 큰 여자 하나가 선술집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구르듯이 밤거리로 나온 여자는 연신 트림을 하면서도 한 손에는 반쯤 먹은 칠면조 다리를 꼭 쥐고 있었다. 이블린은 잠시 그 여자를 관찰했다. 저 여자를 괴롭히면 얼마나 구슬픈 소리를 낼까,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형언키 힘든 지옥에 빠져들 때 어떤 표정이 될까를 상상하며. 악마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여자는 칠면조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었다. 하지만 고기 맛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여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어떤 고뇌가 자리잡고 있어, 그 우울한 감정 때문에 미각이 마비된 듯했다. 이블린은 여자 혼자서 그 고통을 감당하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블린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도시에 드리운 어둠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는 동안 술주정뱅이 두 명, 동전을 구걸하는 거지 한 명, 그리고 그 사이에 말다툼을 벌이는 연인 한 쌍을 지나쳤다. 이블린의 눈에는 하나같이 도무지 사냥감의 매력이 없었다. 저런 것들을 사냥한다는 것은 이미 시들어버린 꽃을 꺾는 것이나 다름 없이 시시하고 하찮은 일이었다. 이블린은 자신이 꺾을 들꽃이 줄기가 꼿꼿하고 싱싱함이 넘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꺾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갑자기 고약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누추하고 후미진 도시를 사냥터로 택한 것이 자신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바로 다음 순간에라도, 지난번 사냥감에서 빨아들였던 전율이 다 사라져 버리고 자신이 무(無)로 돌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인간의 번뇌로 채워야 할 자신의 내부가 무한히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바로 그때, 악마의 눈에 그 남자가 보였다… 고급 술집에서 나온 남자는 신사다운 품격을 후광처럼 내뿜고 있었다. 천박한 호화로움 없이 말쑥한 차림이었고, 풍성한 꽃다발을 한 팔로 조심스럽게 껴안은 채 거리를 걸어가며 경쾌한 선율을 나직이 흥얼거렸다. 이블린의 등에 돋은 채찍손 한 쌍이 흥분으로 부르르 떨렸다. 이블린은 먼 거리에서도 그 남자가 자신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곧장 그 신사의 뒤를 쫓아갔다. 신사의 기척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신사에게 자신의 기척을 들킬 염려가 없을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남자는 거의 반 시간을 걸어가 다듬돌을 쌓아 만든 중간 크기의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 남자가 묵직한 참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이블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택 창문이 하나씩 하나씩 따스한 느낌의 촛불로 밝혀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늘씬한 몸매에 목깃이 높이 올라온 소박한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나타나 신사를 반기고는 포옹으로 인사를 했다. 여인은 신사가 내미는 꽃다발을 받자 약간 놀라는 척 기뻐했고, 곧 깨끗한 꽃병에 꽂아 넣었다. 여인이 꽃병을 놓은 자리 바로 옆에는 신사가 전에 가져온 꽃다발이 역시 꽃병에 꽂힌 채 놓여 있었다. 악마는 더욱 흥미롭게 그들을 관찰했다. 잠시 후, 이제 갓 기저귀를 뗀 나이의 아이 두 명이 방으로 달려들어와 남자의 다리를 하나씩 얼싸안았다. 아이들이 활짝 웃자 작은 입 안에서 작디작은 치아들이 반짝였다. 가정의 행복이라는 개념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형상화한 장면 같았지만, 이블린은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깊이 파들어가면 자신이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지를. 이블린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촛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지고, 거실의 불빛만이 남았다. 혼자가 된 남자는 독서용 의자에 몸을 편안히 뉘고 담배 파이프를 꺼냈다. 이블린은 기척도 없이 그늘에서 빠져나왔다. 암흑의 기운이 성글게 모인 듯한 그녀의 팔다리가 차츰 따뜻한 체온을 지닌 인간의 육신으로 변해갔다. 등에 돋아난 악마의 채찍손은 자취를 감추고, 온몸이 맵시 있는 여인의 자태를 갖추어 갔다. 그 누구도 눈을 돌리기 힘들 정도의 매력을 과시하는 몸매였다. 이블린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창가로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창에 닿을 듯한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에야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의자에서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가 거의 떨어질 뻔했다. 이블린은 한 손가락을 들어 남자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남자는 발소리를 죽이며 현관으로 걸어가 머뭇머뭇 문을 열었다. 창밖을 배회하는 저 낯선 미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밖으로 걸어나와 이블린이 있는 잔디밭으로 나왔다. 불안감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더 커 보였다. ”누… 누구십니까?” 남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당신이 원하는 그 누구도 될 수 있어요.” 악마가 말했다. 이블린은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아무리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마음 한 구석에 곪아터진 욕구불만의 종기는 있는 법이다. 이거군. 이 자가 그토록 원하지만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나에겐 가족이…” 남자는 말을 시작했지만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악마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쉬잇… 괜찮아요.” 이블린은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말아요. 그걸 원하는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알죠. 다 털어 버려요.” 이블린은 한 걸음 물러서서 남자가 속절없이 끌려드는 모습을 감상했다. “그래도… 되나요?” 남자는 그렇게 묻고는 자신의 뻔뻔함에 민망해 했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감당 못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물론이죠, 자기.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악마가 말했다. 남자는 손끝으로 이블린의 얼굴을 더듬고, 뺨을 쓸어내렸다. 이블린은 남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꾹 누르고는 나직하고 관능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냥하고, 다정하고, 행복한 남자는 오늘 밤 그녀의 것이 될 터였다. 남자는 이블린에게 줄 고통이 너무나 많았고, 이블린은 그 고통을 모조리 흡수할 것이었다. 그들 뒤에서 실내화를 끄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남자의 아내가 물었다. “그럼요, 괜찮을 거예요.” 넋을 잃어버린 남자 대신 악마가 대답했다. 사냥은 더욱 흥미진진해졌고, 먹이는 더욱 달콤해졌다. 들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난 채 꺾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동안 또 한 송이가 막 봉오리를 벌리려 하고 있었다. |
3. 리워크 전 배경
이블린이 그림자 군도 출신 암살자라는 설정이었던 시절의 배경 이야기.3.1. 초창기 배경
신은 혹시 이블린을 본 적이 있는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발로란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인 그녀는 출신부터 베일에 싸여있으며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이블린이 발로란 북서부의 미스터리한 지역, 그중에서도 24시간 기묘하고 짙은 안개가 깔린
그림자 군도 출신이라는 증거가 일부 존재하기는 한다. 그곳에는 수많은 종류의 언데드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한눈에 보아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이블린의 외모는 그녀가 이곳 출신이라는 추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편 어린 시절 뱀파이어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이블린이 정의의 전장에서 상대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능력을 사용하지만, 햇볕에는 멀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블린은 그림자 군도와의 연관성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호기롭게 그림자 군도를 탐험해 진실을 밝힐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비주의를 고수해오던 이블린은 최근 리그 오브 레전드에 합류했다. 그리고 정의의 전장에서 드러낸 흉악무도한 모습으로 인해 그녀에 관한 새로운 소문들이 떠오르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소문은 그녀가 어린 시절 금단의 마법을 남용하다 피에 굶주린 괴물로 변해버렸고, 때문에 전장에서 닥치는 대로 적군을 유린하며 신선한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블린은 이런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림자 속에 숨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다. 이제 이블린은 교묘하게 목적을 숨기고서 리그 소환사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는 중이다. 발로란의 실세들은 앞으로 이블린을 고용하기 위해 웃돈을 얹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계획을 포함해 그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제 온 세상을 대상으로 그녀의 야망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내가 볼 땐 이블린에게는 미스터리랄 것도 없어. 단순해. 그녀는 생태계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포식자일 뿐이야." - 잭스 |
3.2. 기본 배경
날렵하면서도 치명적인 이블린은 룬테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암살자이며, 몸값도 엄청나다. 마음 먹은대로 그림자 속에 숨는 재주를 지닌 그녀는 참을성 있게 먹잇감을 추적하며 단번에 해치울 기회를 노린다. 이블린은 온전한 인간이라 보기 어렵고 어떤 피를 타고 났는지도 알 수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 군도 출신이라는 점이지만, 그나마 고통으로 가득찬 이 땅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
3.3. 그림자의 손짓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방 안. 나무 탁자 위로 흐르는 옻칠 특유의 검은색 윤기마저 스산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둔중한 팔꿈치를 탁자에 기댄 채 앉아있었던 이는 타케다였다. 으드득으드득 그가 손가락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짙은 색 가죽 장갑 너머로 오싹한 소리가 밀려왔다. 한때는 근육질 체구를 자랑했던 그였지만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단단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거대한 몸집만큼은 그대로 남아있어 여전히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인간미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눈빛. 그 위로 보이는 검은색 렌즈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보호벽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육중한 체구의 두 호위병이 타케다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들은 광기의 천재 화학자 신지드가 발명한 화학 무기로 몸 전체가 하나의 무기였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최고의 호위병인 셈이었다. 지하세계의 악명 높은 통치자, 사이토 타케다. 비천한 신분 출신의 그가 자운 최고의 화학무기 거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폭력성과 거칠 것 없는 야망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또 한 명의 라이벌이 자신의 눈앞에서 몰락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오르토스, 들여보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으로 그가 말했다. 덜커덕덜커덕 분명 쇠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그러자 또 다른 두 명의 호위병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쇠사슬에 철문, 그것도 모자라 안팎으로 네 명의 호위병이라니! 그러나 이를 두고 그 누구도 과한 처사라 나무랄 수는 없었다. 타케다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 자국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타케다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오르토스는 문 밖으로 나가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한 명을 출입구 쪽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치듯 마주한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타케다는 그녀가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피부에 촛대에 비친 두 눈에서는 맹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외모에서 풍겨오는 섬뜩함에 불안이 엄습해왔다.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운에서 나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블린 양입니다.” 오르토스가 그녀를 소개했다. 타케다는 장갑을 낀 채 손을 흔들었다. 인사의 표시였다. 오르토스는 뒤로 물러나 문밖으로 나갔다. 알 수 없는 표정의 이블린은 타케다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또각 또각. 그녀의 부츠 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블린은 타케다의 책상 반대편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았다. 방 안 가장자리로 그림자가 걷히자 타케다는 이블린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빨간색 가죽 재킷을 걸친 몸매는 날씬하게 죽 뻗어있었고, 노란색 눈동자의 두 눈은 동그랗고 길게 찢어진 아몬드 모양이었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눈매였다. 진홍색 붉은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고, 한 번씩 지어 보이는 씁쓸한 미소 너머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난 별명이 꽤 많은데. 굳이 이블린 양이라고 한 이유는? 뭐, 새롭긴 하군.” 타케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아닌 척 했지만, 짐짓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대부분 학살자로 부르긴 하지.” 이블린은 그제야 제대로 된 호칭을 썼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아. 최소한 사실이긴 하니까.” “나는 뭐, 결혼 같은 거 안 했지만... 바론 아르테가 홀트, 이 자는 결혼을 했고 부인도 있어. 거기에 수도 없이 정부까지 뒀더군. 이들 모두를 말끔하게 해결해줬으면 해.” 타케다가 말했다. “어머머 세상에. 대체 얼마나 멋진 사내이길래.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그자가 떠나면 통곡할 여인네가 한둘이 아니겠는데!” 이블린은 과장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 정식으로 주문하기 전에 몇 가지 확실히 해 둘 게 있어. 우선, 이블린 당신이 이 일에 꼭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지?” 타케다가 물었다. “내가 직접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 말이야? 무슨 뒷골목 깡패도 아니고, 나 원 참. 내가 자운 바닥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얼만데. 지금 나보고 오디션이라도 보라는 거야 뭐야!” 이블린의 목소리에는 한껏 짜증이 베어 있었다. “진정해. 진정해. 물론 이블린 당신의 전적은 익히 잘 알고 있지. 작년에 데마시아 기사단 단장을 처리한 것도 아마 너였지?” “맞아.” 이블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필트오버에서 코자리 결사단 후계자를 죽인 것도?” 순간 이블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건 내가 한 거 아니야. 회색의 숙녀 작품이었지.” “아. 재미있군. 역시 소문 따위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이래서 난,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단 말이지.” 타케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실망했다면 참으로 미안하게 됐는데, 타케다?” 이블린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푸른 살갗의 암살자 이블린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일순간 얼어붙은 타케다의 호위병들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타케다 역시 조심스레 좌우를 살피며 그녀의 모습을 포착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어둠이 삼켜버린 듯,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쁘지 않은데.” 타케다가 말했다. 그 역시 이블린의 막강한 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때로 그러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블린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확인한 타케다는 매우 흡족해 했다. 타케다의 등 뒤로 기다란 손톱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타케다를 위협했다. 그림자 속으로사라졌던 이블린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타케다의 머리통을 붙잡고 치켜세우자 굵은 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흡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였다. 이블린의 송곳니가 타케다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순간 타케다의 호위병들이 이블린을 막아서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타케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한 제스처임을 타케다는 알고 있었다. “자, 어때? 이래도 뭔가 더 보여주길 원해?”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차가운 입김이 그의 목을 조이는 듯했다. 타케다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전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어. 전적으로 믿어, 이블린. 자, 이제 그럼 내 제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볼까?” “좋아. 그만한 대가도 충분히 준비됐으리라 믿어. “그런데 나를 여기서 시간 낭비하게 한 건 큰 실수야.” 타케다는 끌어 오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미안해. 내 실수야.” 이블린을 그를 놓아주며 떠밀었다. 그러고는 탁자 가장자리에 앉았다. 마치 고양이처럼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비용 문제는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이블린이 물었다. “얼마가 됐든, 원하는 대로 지불하지.” 타케다가 대답했다. “타케다, 난 돈 따위에 관심 없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이블린이 답했다. 그러자 타케다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글쎄, 뭐가 됐든 네가 생각하는 훨씬 이상일 것 같은데. 아, 근데 똑똑한 타케다는 지금쯤 알아차렸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식은 곤란해!” 타케다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여긴 내 구역이야. 그 누구도 내게 요구 따위 할 수 없다고!” “타케다, 네가 본 건 내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해. 그 정도 요구할 권리는 내게도 충분히 있다고. 알겠니?” 등을 뒤로 젖힌 채 알 수 없는 냉소를 지어 보이며 이블린이 대답했다. 타케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이블린은 쉿,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저지했다. “어떤 말도 그렇게 성급하게 해서는 안 되지, 타케다. 입 벙긋 하기도 전에 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걸?” 완전히 얼어붙은 표정으로 타케다가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블린이 대답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네가 부탁한 아르테가 홀트는 동이 트기 전에 처리해주지. 곧 다시 만나 첫 번째 대가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대가?” 타케다가 놀란 듯 물었다. “맞아. 내가 원하는 수많은 대가 중에 가장 첫 번째. 못 알아 들어?”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명심해. 그런 의미에서 자운은 최적의 장소지.”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타케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타케다에게 윙크를 날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또다시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네가 내 화를 돋우지만 않는다면 이 관계는 우리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야.” 타케다는 말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얼마 뒤 그의 오른팔 오르토스가 방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오르토스가 물었다. “없어.” 타케다가 이를 꽉 문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부터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은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 나 그냥 내버려둬. 말 걸지 말라고! 그리고 난로에 불 좀 더 때. 이 많은 그림자들 좀 없애버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