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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3-16 20:51:08

이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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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생 졸 미상
관향 원주(原州)
호(號) 송헌(松軒)
시호 충절(忠節)
작위(爵位) 경원군(慶原君)
관직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號衛領中郞將)
예부상서(禮部尙書)
슬하 4남 1녀

1. 개요2. 일생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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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작위(爵位)는 경원군(慶原君)이며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원주 이씨 이신우(李申佑)의 12세손의로 경원군파(慶原君派)의 파조(派祖)이다.

문제는 이 인물에 대한 당대 기록이 전혀 없어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

2. 일생

이반계(李攀桂)는 공민왕조(恭愍王朝)에서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號衛領中郞將) 예부상서(禮部尙書)등의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였고 고려조(高麗朝)로 역성(易姓)된 뒤에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치악산(雉岳山)에 은거(隱居)하였는데 태종(太宗)과는 구의(舊誼)가 있어서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太宗)이 이반계(李攀桂)의 처소(處所)를 직접 찾아 간청(懇請)하므로 드디어 독약(毒藥)을 마시고 혀를 깨물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그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봉작(封爵)하고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諡號)가 추서(追敍)되었다.
유적(遺跡)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황직동 계좌(癸坐)에 모셔있다.

그 당시(當時) 대의(大義)를 고수(固守)하여 새 왕조(王朝)에 굴복(屈服)하지 않은 길야은(吉冶隱)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이반계(李攀桂)등 72현인(賢人)이 일시에 관(冠)을 벗어 걸었는데 이들이 세칭(世稱) 두문동(社門洞) 명현(名賢)으로서 청절비(淸節碑)가 세워졌고 조선역대왕조(朝鮮歷代王朝)에서 여러 차례 포장(襃獎)한 사실(事實)이 병절록(秉節錄)[1]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3. 기타

맏아들은 이이(李頥)이고 자(字)는 안지(安之), 호(號)는 송우(松愚),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이이는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門下生)으로 정주학(程朱學)에 정통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이 대제학(大提學)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교지(敎旨)를 받지 않았다.
당시 34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이견(李肩)이고 자(字)는 우오(友吾), 호(號)는 운촌(雲村)이다.
고려(高麗)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조선조(朝鮮朝) 초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여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강송(强送)되었으며, 임기만 마치고 병을 핑계로 은거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는 영사철비를 세웠고,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는 그의 호(號)를 따서 부르고 있다.

셋째 아들은 이오(李腰) 고려(高麗)말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 초 참의(參議)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거절하여 파주목사(坡州牧使)로 강송(强送)되었다.

넷째 아들은 이족(李足) 조선조(朝鮮朝) 초 선무랑(宣務郎)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거절하여 산음현감(山陰縣監)으로 강송(强送)되었다.
[1] 최소한 구글에서 이 "병절록"을 검색할 경우, 이 문서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문서들 말고는 전혀 검색 결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