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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석(19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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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두석(남원 독립운동가).jpg
이명 이중현
본관 재령 이씨[1]
출생 1912년[2] 8월 26일
전라북도 운봉군 북상면 아곡리
(現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3] 660번지)
사망 1947년 10월 7일 (향년 35세)
전라북도 남원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1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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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12년 8월 26일 전라북도 운봉군 북상면 아곡리(現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의 유학자 집안에서 아버지 이수홍(李壽洪)[4]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되던 1924년 운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최남선· 이광수의 저서를 탐독하고 삼국지 원전을 읽는 등 신문물과 한국사에 밝았다.

운봉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29년 봄부터 고향에서 형 두산(斗山) 이두현(李斗鉉, 1905 ~ 1956) 등과 함께 야학당을 세워 문맹퇴치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수양전진계(修養前進契)를 조직한 뒤 40여 명의 계원들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장하고 청년들의 체력을 단련시키는 등 농촌 경제 건설을 꾀했다.

그러던 중 일장기 천황 히로히토의 사진을 찢어 소각한 일로 일본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이에 1931년 일본으로 도주해 생고무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며 주로 오사카시· 고베시 등지에서 일본 내의 좌익 민족운동단체에 참가하여 일제 타도와 독립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12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에 가입하여 고베시 지구 노조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日本共産靑年同盟)에도 가입하였고, 고베시 위원회 서부지구 조직책임자로 선임되어 청년동맹의 조직 정비와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월에는 제2의 '쌀내놓으라회'를 결성한 뒤 건국제(建國祭), 실업반대투쟁, 기념일 투쟁 등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같은 해 4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던 중 탈출하여 1937년 1월 오사카시에서 김인택(金仁宅) 등 10여 명과 함께 좌익극단(左翼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김철산(金鐵山) 등과 더불어 경제학이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지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38년 1~2월 오사카시에서 공산주의그룹의 동지들과 함께 현 시국에 있어서 좌익 민족운동의 방침에 관하여 협의하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다가 그해 7월 다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11월 26일 고베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얻었으며 1941년 출옥하였으나 지속적인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7년 10월 7일 남원군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3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4년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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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수형인명부, 호남인물검색 시스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참조. [3]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4] 호남인물검색 시스템 형 이두현에는 李壽으로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