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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49

이가의 난

1. 1차 이가의 난2. 2차 이가의 난3.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가의 난4. 3차 이가의 난?

1. 1차 이가의 난

텐쇼 7년인 1579년, 이가닌자 중 네임드였던 시모야마 카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에게 이가의 정보망이 쇠약해졌고 단결력이 약해졌으니 토벌하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진언을 올린다.

오다 노부카츠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마루야마 성을 보수, 침공거점으로 삼아 이가토벌을 계획하는데 토벌계획이 오다가에 숨어있던 이가닌자 소속의 공작원들에게 새어버렸다. 이가닌자들은 마루야마성에 집결 중인 오다군에 게릴라 전술로 기습을 걸어 대승리를 거두게 되며, 이것을 1차 이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노부카츠는 1만명의 군사를 동원했는데 이틀만에 무장 츠게 야스시게(柘植保重)를 비롯한 3천 명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허가없이 군대를 움직였다가 패한 오다 노부카츠는 패전의 책임문제를 추궁받게 되고, 오다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한번 더 이런 실책을 범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뜻을 밝히고 상황을 정리했다.
今回伊賀の地で大敗したそうだが、これは天の道理に反することで正に天罰と言えよう。その理由は、信雄が遠国へ遠征すれば兵達は疲れ果てるというので、つまり、隣国で合戦となれば遠国へ出兵せずに済むという考えに引きずられ、もっと厳しく言えば、若気の至りでこうなったということであろうか。

まことに残念なことだ。上方へ出陣すれば、それは天下のためになり、父への孝行、兄・信忠への思いやりともなるのだ。そして巡り巡って自分の功績になるではないか。

当然だが、今回、柘植保重およびその他の武将を討ち死にさせたのは言語道断、けしからぬことである。 いつまでもそのような考えなら、親子の縁を切ることになると思うがよい。 なお、詳細はこの書状を持参する使者が伝えるであろう。

信長 織田信雄殿
(해석) 이번에 이가 땅에서 대패했다는데, 이는 하늘의 도리에 반하는 것으로 천벌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노부카츠가 먼 구니로 원정을 나가게 되면[1]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버리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웃 구니에서 전투를 벌이면 먼 나라로 출병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에 치우쳐서[2] 엄밀하게 말하면 젊은 혈기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

참으로 딱하도다. 보다 높은 곳까지 뻗어 나아간다면 그것이 천하에 보탬이 되는 길이고 아비에 대한 효도, 형 노부타다에 대한 우애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돌고 돌아 네 자신의 공적이 되지 않겠느냐.

당연하겠지만 이번에 츠게 야스시게 및 다른 무장들을 전사로 내몬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断)[3], 괘씸한 일이다. 언제까지나 그 따위로 생각한다면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는 줄로 알아라. 또한 자세한 내용은 이 서한을 가지고 온 사자가 전할 것이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카츠 도노(殿)

2. 2차 이가의 난

1차 이가의 난으로부터 2년 뒤인 텐쇼 9년, 1581년에 오다 노부나가는 직접 4만의 군사를 끌고 이가 토벌에 나선다.

오다 가문의 수장이 직접 출전한 것은 둘째치고, 4만이라는 대병력의 움직임에 놀란 이가닌자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가지만 이가닌자 중에서 배신자가 2명 나와 지름길을 알려주며 길잡이 노릇을 하였고 에이로쿠 11년에 이미 오다가에 충성 선언을 하고 고정 고용이 된 코가 닌자의 네임드인 타라오 미츠토시가 이를 도와 농성중이던 세력은 차례차례 패배하고 마지막 수성인 가시와라성이 함락되며 2차 이가의 난은 이가닌자의 패배로 끝난다.

3.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가의 난

신장공기(信長公記)의 다몬인일기[4]에선 텐쇼 9년 4월, 카미즈케의 후쿠치 소류와 가와이촌의 미미스 야지로 이 두 사람이 아즈치성의 노부나가에게 방문하여, 이가 공략 때에 길안내를 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 두명이 이가닌자 소속이면서 오다가에 길안내를 한 배신자 두명이다.

다몬인일기에선 오다군의 총수를 4만이 아닌 1만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가지역에선 제각기 파벌과 구조에 따라 오다군쪽으로 돌아서는 이들도 있었다. 츠게씨족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2차 이가닌자의 난이 일어나기 2년전인 텐쇼 7년에 이가닌자들에게 목수들의 두령이던 츠게 야시스게가 살해당한 원한때문에 오다군에 붙었다.

신장공기(信長公記)의 다문원일기에선 노부나가의 군대가 9월 3일에 이가닌자에 대한 공격을 개시햇단 기록이 있으며, 이가의 난 기록(伊乱記)에는 9월 27일에 이세 지구에서 오다 노부카츠·츠다 노부스미, 츠게 구에서 니와 나가히데·타키가와 카즈마스, 교쿠타키 구에서 가모 우지사토·와키자카 야스하루, 가사마 구에서 츠츠이 쥰케이, 하츠세 구에서 아사노 나가마사, 타라오 구에서 호리 히데마사·타라오 히로미츠로 총여섯곳으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가촌의 점령을 시작한 오다군은 이가닌자가 아닌 주민들을 공격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척후병의 모습을 눈에 띄이게 해 이가닌자들의 순찰을 강화시키고 마을을 순찰중인 이가닌자들을 집중공격해 토벌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방식으로 오사다 촌의 주민의 하인인 요스케와 코다 촌의 서민 쇼하치가 순회 중이었던 미미스 야지로가 토벌당했다.

히쟈산성을 공략에 나선 츠츠이 쥰케이와 가모 우지사토, 호리 히데마사의 군단은 이가의 모모타 고베에, 무카이 씨, 오자와 토모히사, 스미요시 잇페이, 후쿠키타 쇼칸, 마치이 세베에, 모리 시로자에몽, 무라타 칸시로, 가토 쿠마노스케, 토미오카 씨, 요시다 사콘을 상대했고 츠츠이와 가모우 군은 아사야마루를 지키는 후쿠키타 쇼칸을 공격, 후로 계곡에서 전투를 이어갔다.

히쟈산의 이가닌자군은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에 많은 이들이 심히 지쳤으니, 오늘밤은 인사불성 할 곳으로 위문가자. 모임장소인 나가오카 산으로 야습하면 츠츠이의 목을 얻을 수가 있다"라며 츠츠이 쥰케이의 진지로 야습을 걸지만 오다쪽에 붙은 키쿠가와 세이큐로가 야습계획을 간파해내 실패하고 타키가와 카즈마스나 니와 나가히데 등의 군세가 차후 합류할 것을 상정해 한밤중에 성으로 침입했지만 전군퇴각한 후라 거하게 낚였고 화풀이로 이쟈산성과 인근의 제당에 불을 놓았다.

히쟈산성이 함락되자, 오다 노부카츠의 군은 1차 이가의 난에서 당한 수모를 되돌려 주기위해 이가닌자의 남쪽 거점인 가시와라성의 주변에 집결해 총공격을 걸었을 때 북쪽에서 토호가 궐기하여 오다의 수비대가 지키는 오시다성을 공격했다.

이가 세력은 가시와라성에서 농성하며, 텐쇼 9년 10월 8일 인시부터 전투를 개시한다. 오다는 공격을 퍼부었으나 희생이 클 것이라 판단하여 식량을 빼돌리는 병량공격으로 바꾼다. 오다 군이 농민들을 소탕하지 않는 것을 본 이가 세력은 성의 병사 세 명을 성에서 몰래 빠져나가게 했다. 농민을 모아 횃불을 들고 오다 군의 배후에서 쳐들어가 놀라게 하는 작전을 펼치려 하였으나, 니와 나가히데에게 간파되어 작전은 실패한다.

10월 25일이 되어, 나라의 오오쿠라 코지로라 하는 사루가쿠 상급 배우가 가시와라성에 동맹의 중개자로서 입성 협상을 주도하고 3일뒤인 10월 28일 다키노 요시마사가 이가 소(惣) 대리로서 노부카츠와 만나, 성의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화의를 제의, 결국 성문을 열게 되며 2차 이가의 난은 오다군의 승리로 끝난다.

4. 3차 이가의 난?

오오쿠라 코지로의 중재가 제법 적절했는지, 이가 세력은 할복강요 등을 받지 않고 중요 인물의 보전에 성공했다. 차남이 일으킨 군사가 대패하면서 엉망이된 체면을 차리기 위해 나선 오다 노부나가가 무리한 것을 요구할 명분이나 필요성도 결여되어 있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2차 이가의 난이 이가의 패배로 끝나고 얼마 뒤, 오다 노부나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오다 가의 체제가 급속도로 붕괴하자 이때를 틈타 각지에서 이가닌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제대로 된 구심점없이 "노부나가가 죽었으니 한번 뒤집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일이라서 3차 이가의 난으로 보는 견해는 극소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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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부카츠는 덴쇼 5년(1577년)과 6년(1578년)에 형 노부타다(信忠)의 휘하로써 본거지 미노를 떠나 기슈(紀州, 기이노쿠니)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하리마(播磨)의 간키 성(神吉城)을 공략하고 있었다. [2] 한마디로 "집하고 가까운 곳에서 전쟁 일으켜 싸우게 되면 집 떠나 멀리 원정에 안 나가도 되겠지?" [3] 말문이 막힌다, 즉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는 뜻. [4] 센고쿠 시대때의 승려 다몬인 에이슌이 남긴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