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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06 12:32:08

의거 전투

의거 전투
義渠戰鬪
Battle of Yiqu
시기 기원전 402년
장소 의거국 영내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陕西省) 북부 ~ 간쑤성(甘肃省) 동북부)
원인 1차 서하 전투의 대패로 인한 의거의 약체화,
1차 남정 전투의 실패로 인한 진의 분위기 전환 필요성
교전국 진秦 의거義渠
지휘관 지휘관 미상 의거왕
병력 2만 2천여 명 3만 4천여 명[1]
피해 피해규모 불명 6천 1백여명 이상
의거왕 생포당함
결과 의거의 대패, 의거왕이 포로가 됨, 의거의 괴뢰국화
영향 진간공의 입지 강화
괴뢰화된 의거 내 친진파 득세

1. 개요2. 배경
2.1. 의거의 약화2.2. 진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예상 외의 장기화3.2. 성급한 도주, 승패를 결정짓다
4. 결말5. 전후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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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진(秦)이 1차 서하 전투의 대패로 후유증에 시달리던 의거(義渠)를 공격, 의거 군주를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고 의거를 진의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의거는 장기간 독자성을 잃고 진의 부용국(附庸國)으로 활동하게 된다.

2. 배경

2.1. 의거의 약화

기원전 403년의 1차 서하 전투(一次西河戰鬪)로 의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이제이를 노린 진의 부추김에 넘어가 나라 기둥뿌리를 뽑은 수준인 6만 1천여 명의 대병력으로 위의 서하군을 공격했다가 오기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던 것. 반의 반 수준인 1만 5천여 명을 수습하긴 했지만, 처참한 패배를 겪으며 군의 숙련도는 전투를 겪기 이전보다도 도리어 떨어져 버렸다.

2.2. 진의 사정

동쪽에서 위와 의거가 치고받는 동안, 진은 촉 방향으로 남진을 시도해 1차 남정 전투(一次南鄭戰鬪)를 벌였지만 남정 공략에 실패하고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진이 동원한 병력은 의거의 60% 수준인 3만 6천여 명이었고, 국가의 체급으로는 오히려 진이 의거보다 훨씬 큰 나라였다. 이 때문에 B.C. 403년의 패배로 나라의 기둥뿌리가 뽑혀나간 의거와는 달리 진은 재차 군사행동을 실시할 수 있었다.[2] 이에 따라 진간공(秦簡公)은 B.C.403년의 패배를 만회할 겸 손쉬운 상대가 된 의거를 공략하기로 한다.

3. 전투의 전개

3.1. 예상 외의 장기화

진의 공격 소식을 들은 의거왕은 칼을 들 수 있으면 모조리 징집해 병력을 쥐어짜내는 식으로 34,000여 명이란 머릿수를 채웠다. 진군이 22,000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숫적 우위를 취한 셈이었지만, 문제는 말 그대로 쥐어짜낸 이들의 숙련도는 이 시대 징집병의 기준으로 봐도 한참 못 미치는 막장이라 '칼 든 민간인' 이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의거왕은 시간끌기로 나서다가 피해가 심해진다 싶으면 그나마 정예라고 할 수 있는 1,600여 명만 데리고 도주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초반 2차례의 교전에서 의거군은 의외로 선방, 6푼(2,000여 명)의 피해만을 내며 버티는데 성공한다. 장기전을 상정하지 않은 진군 입장에서는 상황이 점점 꼬여가는 셈이었다. 그런데...

3.2. 성급한 도주, 승패를 결정짓다

3번째 교전에서 1할 2푼(4,100여 명)의 피해가 추가로 발생하며 의거측이 1할 5푼을 넘어 2할 가까이 피해가 누적되자, 의거왕은 승패가 정해졌다고 생각하고 지휘를 방기, 앞에서 언급한 (그나마) 정예병 1,600여 명만 데리고 도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지휘부까지 사라진 상황에서 오합지졸들이 진군을 상대로 시간끌기라도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결국 의거왕은 진군의 추격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차라리 계속 버티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장기전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은 진군이 바로 철수했거나, 설사 한 번 더 싸워 의거군이 패해 흩어졌더라도 진군이 이를 계속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란 점을 생각하면 의거왕은 섣부르게 도주하려다 도리어 사로잡힌 셈이었다.

4. 결말

의거의 대패. 의거왕, 사로잡히다.

진군은 사로잡은 의거왕을 진으로 압송했고, 친진파를 새로운 의거왕으로 세우고 의거를 괴뢰화한 후 철수한다. 이후 의거는 서하군을 사이에 둔 진과 위의 갈등에서 장기간 진을 지원하게 된다.

5. 전후처리

압송된 의거왕은 진의 궁궐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3] 다만 이런 완벽한 승리에도 진간공은 의거를 아예 영토로 편입하진 않고 괴뢰화에 만족했는데, 내부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직접 친정한 게 아니었고, 작년엔 패배 책임을 일선지휘관에게 떠넘겼던 만큼, 의거를 완전 병합하면 자신보다도 해당 지휘관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국군의 권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완전 병합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의도적으로 공로를 축소한 것.

이는 나름 일리 있는 판단이었고, 당장은 위와의 분쟁에서 의거를 적당히 보조병으로 동원하는 등 빠르게 전력을 뽑아내는데는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남은 의거가 전성기의 6만 대군 수준의 동원력이 요원해졌음에도 먼 훗날 고춧가루 부대로 활약하게 된 점을 생각하면 화근의 불씨를 남겼다고도 할 수 있다.


[1] 급조 징집병 3만 2천 4백여 명, 정예병(?) 1천 6백여 명 [2] 군주 진간공(秦簡公)이 남정 원정에 본인이나 친위 세력의 병력을 투입하지 않은 덕도 보았다. 진간공은 패전 책임을 오로지 일선지휘관의 탓(...)으로 돌린 다음 연좌제를 적용해 일족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재산을 죄다 국고로 환수, 패전했는데도 오히려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3] 정확히는 후궁(...)이지만 해당 판정은 그 선택지에만 (?)표가 붙는 등 의거왕AA가 여캐라 발생한 일종의 개그 선택지였다고 할 수 있다. (진간공 AA도 여캐 아니었냐는 부분은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