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베트남의 인물.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 청룡부대가 저지른 퐁니-퐁녓 학살의 유가족이다.2. 생애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1] 디엔안사 퐁니·퐁녓촌에 한국군 해병대 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이 진입한 뒤 민간인 74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당일 고향인 퐁녓마을에 와 있던 응우옌전 가족은 총 4명이 피해를 입었다. 양쪽 가슴이 잘리고 왼팔에 중상을 입은 딸 응우옌티탄(19)은 다낭병원에서 수술을 통해 팔을 절단했지만 다음날 사망했다. 부인 팜티깜(40)과 딸 응우옌티흐엉(11)은 총에 맞아 즉사했다. 5개월 된 아들 응우옌디엔까인은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이후 10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000년 11월 ‘한겨레21’을 통해 주월미군사령부의 사건 관련 문서와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때 공개된 사건 당시 응우옌티탄의 처참한 사진은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학살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 [ 펼치기 · 접기 ]
2019년 4월, 16명의 같은 마을 피해자 및 유가족과 함께 청와대에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2024년 7월 14일, 향년 98세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퐁니·퐁녓 학살의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 중 최고령이었다. 생전 그와 여러 활동을 함께했던 한베평화재단은 성명을 내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베평화재단의 추모 성명
- [ 펼치기 · 접기 ]
- >
퐁니·퐁녓학살 유가족 응우옌전 님(향년 98세)의 부고를 전합니다.
꽝남성 퐁니·퐁녓학살 유가족 응우옌전 님이 향년 98세의 나이로 지난 7월 14일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는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퐁니·퐁녓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74명이 희생된 학살 사건의 유가족입니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잃었고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큰딸 응우옌티탄(20세)의 처참한 주검의 사진이 세상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의 막내 아들도 학살 피해를 당했는데 사건 이후 생긴 장애로 힘겨운 삶을 살다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2019년 베트남의 피해자·유가족 103명이 한국에 청원서를 제출했을 당시, 응우옌전은 그의 아들과 딸 4명과 함께 청원에 참여하여 한국 정부에 진실규명과 사과를 요구한 바 있습니다.
퐁니 마을의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 님이 한베평화재단에 부고를 전해주셔서 15일 저녁에 조화를 보내드렸습니다. 응우옌티탄 님의 제안으로 탄 님과 유가족 레딘믁 두 분이 재단의 조화를 직접 고인의 영정에 헌화해주셨습니다. 재단은 8월에 진행될 평화기행 일정에서 응우옌전 님의 두 딸 응우옌티호아, 응우옌티바 님을 찾아뵐 예정이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조화를 보내 유가족 분들에게 애도를 표했고, 8월에 있을 평화기행에서는 두 분을 직접 찾아뵙고 아버님을 떠나보낸 두 분의 마음을 다시 한번 위로하고자 합니다.
응우옌전 님은 전쟁 시기 다낭에서 목수로 살며 피난민 생활을 했습니다. 학살 사건의 충격으로 그는 몇 개월간 곡기를 끊고 일이 끝나면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남은 자식들마저 내팽개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다시금 삶에 대한 의지를 되살렸다고 했습니다. 종전 이후 그는 퐁니·퐁녓 마을로 돌아와 폐허가 된 집을 다시 지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며 오랜 세월 가장으로, 귀여운 손주들의 할아버지로 퐁녓 마을의 한 사람으로 생을 이어갔습니다.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이자 다낭외대 한국어학부 교수 응우옌응옥뚜옌 님의 추도글도 함께 올립니다.
“응우옌전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이었다.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 마을로 취재를 간 고경태 기자를 도와 통역을 했던 시기였다. 그때 응우옌전은 거의 90세에 가까웠는데 여전히 명민해보였다. 특히 그는 매일 명상을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오후에 그의 집을 찾았는데 명상을 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고, 집안의 공간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정말 평안해보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평온치 못했다. 1968년 퐁녓, 퐁니, 퐁룩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으로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잃었다. 가장 큰 고통은 큰딸 응우옌티탄(20세)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한국군의 대검에 두 가슴이 도려져 있었는데 마치 중세 시대에 야만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식과도 같았다. 그녀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아직 살아있었고 다낭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응우옌전이 그를 돌보기 위해 병실로 들어가자 그녀가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는 소리를 고통스럽게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점점 작아지고 작아져 다음날 아침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남은 자식들을 키워내고 시집 장가를 보냈다.
그는 논밭을 일궜고 정원도 가꾸었다. 그는 죽은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과 자신의 심장 속에 늘 간직했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학살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상세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아주 명확히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1968년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1]
현 디엔반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