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0:09:48

율리우스 랍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90c23, #c8102e 20%, #c8102e 80%, #990c2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제1공화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카를 레너 미하엘 마이어 요한 쇼버 발터 브라이스키
제3대2 제5대 제6대 제5대2
요한 쇼버 이그나츠 자이펠 루돌프 라메크 이그나츠 자이펠
제7대 제3대3 제8대 제9대
요한 쇼버 카를 바우고인 오토 엔더
제10대 제11대
카를 부레슈 엥겔베르트 돌푸스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연방국
(제11대) 제12대 제13대
엥겔베르트 돌푸스 쿠르트 슈슈니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제2공화국
초대2 제14대 제15대 제16대
카를 레너 레오폴트 피글 율리우스 랍 알폰스 고르바흐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요제프 클라우스 브루노 크라이스키 프레트 지노바츠 프란츠 프라니츠키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빅토르 클리마 볼프강 쉬셀 알프레트 구젠바우어 베르너 파이만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6대2
크리스티안 케른 제바스티안 쿠르츠 브리지테 비어라인 제바스티안 쿠르츠
제28대 제29대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카를 네하머 }}}}}}}}}

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
오스트리아 제14대 총리
율리우스 랍
Julius Raab
파일:율리우스 랍.jpg
<colbgcolor=#D81E05><colcolor=#fff> 출생 1891년 11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니더외스터라이히
사망 1964년 1월 8일 (향년 72세)
오스트리아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임기 오스트리아 상무부 장관
1938년 2월 14일 -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총리
1953년 4월 2일 - 1961년 4월 11일
오스트리아 대통령
1957년 1월 4일 - 1957년 5월 22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81E05><colcolor=#fff> 학력 빈 공과대학교 (중퇴)
종교 로마 가톨릭
소속 정당
[[오스트리아 인민당|
인민당
]]
약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복무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지사
오스트리아 상무장관
오스트리아 연방 경제 회의소 회장
오스트리아 총리
오스트리아 인민당 당수
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
}}}}}}}}} ||
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상무장관직과 총리직을 역임했다. 전임 총리 레오폴트 피글과 마찬가지로 파시즘 정권에 부역한 전적이 있다.

2. 생애

1892년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상크트 푈텐(Sankt Pölten) 지역에서 중산층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에서 공대를 다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징집되어 이탈리아 전선에서 군복무를 한 바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귀국하여 학업을 지속하고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러나 결혼을 한지 2년만인 192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랍 본인도 정치계에 발을 담그게 됨에 따라 그는 공대를 중퇴하게 되었다.

그는 우파 성향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에 입당하고 192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32년 후일 당권을 두고 경쟁하게되는 레오폴트 피글의 준군사조직에 가입하고 엥겔베르트 돌푸스와 인연을 맺어 극우 파시즘 정당인 조국전선에 입당했다. 이후 쿠르트 슈슈니크 정권 하에서 상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불과 한달만에 안슐루스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장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치 독일 시절 레오폴트 피글을 비롯한 수많은 오스트리아 구정부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나[1] 그만큼은 나치 고위 공무원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구금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발목을 잡게되어, 오스트리아 신정부가 세워질때 유력한 총리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부역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총리직에 오르면 안된다는 소련의 압박 때문에 결국 총리직을 레오폴트 피글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글 내각 당시에 오스트리아 연방 경제 회의소 회장을 맡으면서 영향력을 확대했과, 1953년 피글 총리가 파시즘 정권 당시의 유착 논란과 사민당과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제14대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총리직을 지내는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중립국 선언, 자유주의에 기반한 강력한 경제 성장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부흥을 주도하였으며 높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56년에는 인민당이 46%를 득표해 압승하고 총리 연임에 성공한다. 1957년에는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örner) 대통령의 사망으로 잠깐 대통령 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였음에도 사민당과의 연정을 당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유지했고, 중도파에게도 지지를 받으며 인민당의 장기 집권기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195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61년 총리직을 알폰스 고르바흐에게 물려준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사민당 소속의 아돌프 셰르프(Adolf Schärf)에 패배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 은퇴 1년 뒤인 1965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기독교 사회당 1925 - 1934 정계 입문

[[조국전선|
조국전선
]]
1934 - 1938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8 - 1945 안슐루스로 정당 해산

[[오스트리아 인민당|
인민당
]]
1945 - 1964 창당

[1] 당시 오스트리아 파시즘 정권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하여 나치 독일과 사이가 안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