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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1:48:20

윤지평

尹志平
(1169 ~ 1251)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3.1. 사조영웅전의 윤지평3.2. 신조협려의 윤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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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구처기의 제자이자 전진교 6대 조사로 자는 태화(太和), 도호는 청화자(靑和子).

2. 생애

하북성 창주 출신으로 스승인 구처기가 1219년에 서정을 하던 칭기즈 칸의 부름을 받아 대설산의 아무강(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갈 때 동행하던 18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1227년에 스승인 구처기가 사망하자 장춘궁 동쪽에 백운관을 지었으며 1229년에는 그 장소에 처순당을 짓고 스승인 구처기의 시신을 매장했으며 묘도광화진인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황제인 오고타이 칸의 지지를 얻어 더욱더 전진교의 번영을 가져왔으며 이후에 이지상, 장지경, 왕지탄, 기지성 등의 구처기의 제자들이 조사 직을 계승하는 등 전진교의 용문파는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북유록>이라는 저서가 있으며 <북유록>에는 전진칠자에 대한 것들이 있다.

3. 창작물에서

3.1. 사조영웅전의 윤지평

사조영웅전에서는 양강의 동문 사제로 등장한다. 몽골에 있는 강남칠괴에게 구처기의 메시지를 전하러 와서, 당시 무공이 별볼일 없었던 곽정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황약사 황용이 죽은 줄 알고 강남칠괴를 잡아죽이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구처기의 명령을 받고 곽정을 찾아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우가촌에 나타난다. 마침 육관영 정요가 후통해와 싸우고 있을 때라 끼어들어서 후통해를 제압한다. 참고로 그후에 육관영이 곽사숙이라는 말을 썼는데, 윤지평은 "왜 당신은 그를 사숙이라고 부릅니까?"라고 하자 육관영이 아버지와 같은 항렬(황용이 사부의 딸이니 항렬이 같은데 그 정혼자니 역시 항렬이 같다.)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 했는데, 그 당시 곽정은 주백통의 아우였으니 윤지평의 사조였다. 주백통이 항렬 여럿 망쳐놨다.

그런데 그 후 육관영이 이곳에 온 사정 이야기를 듣다가 " 황약사가 어쨌다는거요? 그가 전진칠자보다 강하답니까?"라는 등의 오만한 말을 하며 전진교의 무공을 내세우며 황약사를 무시하다가 황약사 문하인 육관영과 싸움이 붙어버린다. 육관영은 몰아붙였지만 완안홍열의 무리가 돌아오자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황약사가 나타나 살아났다. 하지만 방금 전에 황약사를 욕한 것이 걸려 곤욕을 치르게 되자, 죽을 것을 각오하고 황약사의 눈 앞에서도 꿋꿋하게 욕을 한 것 때문에 그 기개와 배포가 마음에 든 황약사에게 용서를 받고 도망쳤다.

나중에 전진칠자가 천강북두진을 써서 황약사와 싸울 때, 죽은 담처단 대신에 가진악이 천강북두진의 일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가진악은 진법을 잘 몰랐으므로 그에게 붙어서 진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황약사에게 붙잡혀서 지붕 위로 날아가 기절하는 수모를 당했다.

구처기가 칭기즈 칸에게 도를 설법하러 갈 때 몽골로 따라갔다.

3.2. 신조협려의 윤지평

신조협려에 이르러선 전진교의 중심인물이 된다.

조지경의 제자였던 양과가 탈주하여 고묘에 숨었을 때 소용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노심초사하다 결국 소용녀가 수련 중 구양봉에게 점혈당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노려 겁탈한다. 소용녀는 양과가 그런 줄 알고 있었으나 이후 그 상황을 엿본 조지경이 발설하여 알게 되고 윤지평의 목숨을 노린다.

윤지평은 이 일을 계속 숨기며 전진교와 강호에서 인망을 쌓아 왕중양, 마옥의 뒤를 이어 전진교의 제3대 장교가 되나 조지경의 협박으로 바로 자리를 내놓게 된다. 마침 전진교를 침범한 금륜법왕 일당과 복수를 하러 찾아온 소용녀와의 삼파전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소용녀의 목숨을 구해 주고 용서를 빌다가 소용녀의 칼에 맞아 죽는다. 신판에선 소용녀에 의해 칼에 찔린 다음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자살한다.

순간의 큰 죄과로 인해 평생을 후회하고 살았으며 나름 심지도 있고 의협심도 있는 인물이었으나 엎질러진 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팬들한테 욕을 많이 먹는 인물. 10대 청소년일 때 읽고 이제는 40, 50대가 되어 등장인물 이름이나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진 독자들조차 윤지평과 그가 저지른 짓만큼은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소용녀 사건만 아니었어도 그저 그렇거나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을 인물인데 그 놈의 한 순간 욕정 때문에... 그나마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애국심만큼은 작중에서 나름 고평가되고 본인도 스스로 죗값을 치렀다는 점에서 재평가 아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의천도룡기>에서 거의 비슷하게 겁탈죄를 저지른 양소와 비교해도 평이 훨씬 나쁜데, 양소의 경우는 주인공인 장무기와 같은 명교에 피해자인 기효부가 양소를 사랑하게 되기라도 한 반면 윤지평의 진영인 전진교는 악역은 아니라도 주인공 양과와 이래저래 갈등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 입장에 이입하는 독자들이 좋게 볼 여지가 없다.

구처기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로 전진교 조사까지 지낸 견실한 도사였는데 이따위 쓰레기 인간으로 묘사한 탓에 당연히 후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김용에게 항의를 했고 결국 신조협려가 개작될 때 견지병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정확하게는 견지병이라는 인물을 따로 만들어서 윤지평의 성폭행 범죄를 죄다 몰아버린 것. 소용녀와 얽히는 게 없는 장면에서는 그대로 윤지평으로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는 건 여전히 윤지평이다.[1] 그리고 원래는 수석 제자로 임명되었지만 교단 사무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 수행에만 심취했다는 설정으로 초반에 하차시켰다.

참고로 이 사람 곽정보다 두세살 더 많다. 그 나이에 10대의 소용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1] 신조협려가 연재를 시작한 게 1959년이고, 견지병으로 대신시킨 3판이 나온 게 2003년이다. 윤지평의 이미지를 돌려놓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서 인식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