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공화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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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총리 |
양 아맛 브르바하기아 툰 하지[1] 유솝 빈 이샥[2]
Yang Amat Berbahagia Tun Haji Yusof bin Ishak
출생 | 1910년 8월 12일
사망 | 1970년 11월 23일 (향년 60세)
1. 개요
싱가포르의 초대 싱가포르 대통령.2. 생애
말레이계 유명 언론인 출신으로, 싱가포르 독립 전에도 영화 항소 위원회 위원 겸 천연 자원 및 말레이 위원회 위원(1948~1950)으로 활동했고 1959년에는 정부 인사위원회( 인사혁신처 격)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959년에 영국은 싱가포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 총선이 치러져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자치정부의 총리는 그 전부터 유력 정치인이었던 리콴유가 되었고 총독에 해당되는 자리인 지역 수장(Yang di-Pertuan Negara)에 유솝 빈 이샥이 지명되었다. 이샥은 리콴유와 함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문제에 나서 1963년에 싱가포르는 자치정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영국 식민지에서 말레이시아의 주가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연방정부 뿐 아니라 각 주에서도 영국식 내각제를 실시하였는데, 유솝 빈 이샥은 싱가포르 주의 실권 없는 상징적 주 대표 역할인 싱가포르 주 지역 수장(Yang di-Pertuan Negara)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갈등으로 여러 번의 폭동이 일어나는 등 국가 통합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는 국가 안정을 위해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쫓아낸다. 이에 싱가포르는 자치정부를 독립정부로 개편했고 이에 따라 유솝 빈 이샥은 초대 싱가포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총리로 취임했다. 영국식 내각제도를 채택한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가 사실상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솝 빈 이샥은 상징적 국가원수에 가까웠으나 싱가포르의 민족 통합에 헌신하며 3선까지 재임하였다.[3]
1970년 11월 23일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0세.
3. 여담
현재 싱가포르 달러의 4번째 시리즈(현행권)에 그의 얼굴이 나오고 있다.
[1]
이것은 모두 수식어로, 영국령 말레이시아 시절의 직함과 이슬람 순례자(하지)가 더해진 것이다. 공화국이기에 이렇게 긴 수식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2]
아랍어 인명
이스하크(إِسْحَاق /ʾisḥāq)가 어원인
말레이어 인명 이스학(Ishak / إسحاق)은 s-h를 구분하여 [ishɑk̚\](이스학)으로 발음하지만 '이샥'이라는 표기가 관용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3]
당연히 중국계가 당선되었다면 말레이계나 인도계들이 또 다시 폭동 일으킬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해 인민행동당 주도로(1993년 이전에는 간선제) 연임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