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5년 11월 4일 |
평안남도 순천군 용북면 용승리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명덕은 1895년 11월 4일 평안남도 순천군 용북면 용승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경운(劉景雲)이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2월 28일 기독교 신자 박창빈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순천으로 귀환한 뒤 자신을 만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즉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는 박창빈과 감리교회 목사 이윤영, 금융조합 서기 황경환(黃慶煥), 신창면 면장 김삼봉(金三鳳), 의사 함태호(咸泰鎬), 김찬수(金贊洙), 면내 유지 이수홍(李秀弘), 여전도사 김온유(金溫柔), 청년대표 이대근(李大根), 김순효(金純孝) 등 30여명의 동지들과 만나 시위계획을 협의하였다.그는 이들과 여러차례에 걸쳐 회의를 거듭한 끝에 거사일자를 신창 장날인 3월 5일로 결정하고, 총책임자를 이윤영, 2번 책임자로 황경환, 3번 책임자로 그가 결정되었는데, 이 순번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필사적인 것이었다. 또한 면장 김삼봉은 면사무소에 대한독립운동 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장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문·선전문·동원장 등 10여종의 격문을 인쇄하여, 먼저 일본 측에 통고하고 각면에도 배포하였다. 특히 총책임자인 이윤영은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교사이던 아내 이마대(李瑪大)에게 거사 당일의 합창단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3월 5일 오전 10시, 3천 5백여명의 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는데,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연설, 애국가 봉창, 만세 삼창의 순서로 식이 진행되었다. 이때 그는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이 끝난 뒤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중국 임강현 모아산에 근거를 두고 이춘삼(李春三)을 단장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에 가입하여 순천지방 백산무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1년 3월 초 이춘삼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 순천에 온 이모(李某)와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는 곧 자산군 천도교구실에서 등사기를 이용하여 경고문(警告文)·입단청원서(入團請願書)·입단표(入團票)·자금 영수서(資金領受書) 등을 인쇄, 각 지방에 배포하여 군자금 모금과 함께 백산무사단원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이해 9월 초에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평양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명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