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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05:04:44

유로파가 하고싶었지만~

1. 개요2. 엔딩3. 등장 국가
3.1. 아시아
3.1.1. 부여 공화국
3.1.1.1. 통합제국 부여의 탄생3.1.1.2. 제국의 성장과 붕괴, 그리고 혼란기3.1.1.3. 아시아의 푸른 용, 승천
3.1.2. 중화민국3.1.3. 실론 - 인도 공화국3.1.4. 몽고계
3.2. 유럽
3.2.1. 이탈리아3.2.2. 러시아3.2.3. 신성로마제국
3.2.3.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얻다3.2.3.2. 라이히의 완성, 그리고 위기3.2.3.3. 카이저라이히, 마침내 승천하다.3.2.3.4. 라이히의 몰락
3.2.4. 프랑스3.2.5. 알바니아3.2.6. 팔츠3.2.7. 헝가리3.2.8. 영국/영연방
3.3. 아메리카
3.3.1. USSA
3.3.1.1. 미공화국(ROA)3.3.1.2. 아즈텍 제국

1. 개요

유카리◆hZRRHU0kKU 참치 인터넷 어장에서 진행한 AA작품. 56스레 완결, 이후에 엔딩 이후를 다루고 있는 증량 중이 5스레 정도 연재하였다. 링크

통칭 '유카리의 역설사 시리즈' 중 하나로 유로파 유니버설리스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서기 1784년부터 1927년[1]까지 약 14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그려낸 대체역사물.

네푸네푸◆d85FAmtyv가 스레주의 허락을 받고 제작한 3차 창작 작품으로 유로파가 하고 싶었지만 목숨까지 배에 실어서 보내면 안되는 (주)부여상사가 있다.

2. 엔딩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3. 등장 국가

작중 최후까지 남은 국가를 기준으로 서술하되, 영국&영연방, USSA, 몽고와 같은 케이스는 별도로 서술.

3.1. 아시아

3.1.1. 부여 공화국

세계의 중재자이자 경찰인 극초강대국. 시대를 선도하는 사상, 문화와 체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빚을 수십배로 돌려주는 국가특성.
농담이 아니라 부여 및 그 전신인 고려-일본과 악연을 맺었다가 엔딩까지 국가가 멀쩡하게 남은 곳은 중화민국 하나뿐이다. 그것도 중화민국은 부여가 화북에서 병크를 터뜨린 탓에 숙여줄 수밖에 없어서 그리 된 것. 특히 고려와 일본을 지옥도로 만들었던 몽골에 대한 악감정이 장난 아니라, 진지하게 칸코레(칸 모가지 콜렉션)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스레 등장 국가 중 사실상의 주인공 국가. 관련 AA는 사죠 마나카, 호라이산 카구야, 카미조 토우마, 우에스기 겐신, 아시카가 챠챠마루, 네라우오, 키루코→히메가미, 로이 머스탱, 히이라기 시노아→신죠 나오에, 무라사 미나미츠 등.
3.1.1.1. 통합제국 부여의 탄생
부여의 전신 중 하나인 고려의 경우, 요나라와 한판 붙어서 요를 박살내고 만주를 획득하는 데 성공. 이후 몽고의 침략에 송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의 일본과 손을 잡고 대응했으나, 송은 국경방위체제가 붕괴하자 빠르게 몽고에 복속을 선언하고 전쟁에서 빠지고 남경으로 천도한다. 이후 고려 본토가 깡그리 털리는 바람에 왕실은 일본 혼슈로 피난해야만 했고, 한술 더 떠서 일본 큐슈(남만)까지 몽골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고려 본토에 남은 승려+무신들이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식 항전을 지속(!), 고려 본토(압록강까지의 자연 국경선) 및 혼슈의 점령지를 회복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일본의 경우엔 남만의 역습으로 시고쿠까지 떨어지고 만다. 이후 만주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한 고려의 주도 하에 총 10회의 원정군이 구성, 결국 10차에서 무굴과 월남의 지원까지 받았던 남만(일본 큐슈)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고, 시고쿠는 일본이, 큐슈는 고려가 차지한다. 한편, 이 대몽항쟁의 여파로 인해 기나긴 전쟁 와중 고려 무신귀족층과 일본 다이묘간의 통혼이 빈번해져 최종적으로는 고려와 일본 양국의 작위 및 영지겸작은 물론이고 문화까지 섞여버리는 전개가 발생한다. 어느 정도냐면 고려와 일본을 오가며 장사하는 대상인이 언어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고, 심지어는 "우리 나리님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걸?" 이라고 할 정도. 정작 고려 황실과 일본 천황가 사이에선 후에 부여로 결합되기 전까진 혼인관계가 딱히 없었고 이런 혼종관계를 참 껄끄럽게 봤지만서도.[2]

또한 기나긴 전쟁의 여파+명의 경제침략 대응 과정에서 상인(젠트리)계층이 대두, 고려에는 평민원, 일본에는 삼부회에 해당하는 기관까지 탄생한다. 그리고 이 시기, 학자 성향이던 고려의 황제(마나카 AA)는 당시 국교이던 천도교[3]의 신학자가 탄생시킨 계몽주의 사상을 깊이 연구, 사상적 위험성을 단박에 짚어내곤 당시 세력이 대두중이던 상인계층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을 겸 귀족들을 견제하고 고려를 연착륙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여 하사한다. 앞서 언급된 평민회는 상인계층의 무력성장 및 고려 황제가 내려준 이 계몽주의가 합쳐진 결과물. 덧붙이자면 황제 자신은 계몽주의란 사상 자체는 잘 만들어졌지만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평가. 그러면서 수용한 것만으로도 명군이지만.

한편 일본은 결혼을 통해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막부를 이어받은 우에스기 막부가 일본 내 불교의 모순을 지적해 일어난 일본판 신구교 대립에서 구교의 손을 들어주면서 신교를 탄압하자 지방 다이묘들과 중앙 막부의 대립이 발화, 여기에 인플레이션 문제까지 겹쳐버리면서 내전이 발발해 최종적으로는 아시카가 막부가 들어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인계층이 무력행사를 하게 되고, 아시카가(구 다이묘) 측이 아슬아슬하게 상인계층의 무력집단을 제압할 뻔 했으나, 천황가가 상인계층의 손을 들어준 대신 아시카가 막부를 공인하면서 동시에 상인계층에 의한 평민원 설립으로 임시 봉합에는 성공하게 된다.

여담으로 고려-일본 둘 다 농업혁명이 터졌고, 그 와중 고려는 만주-한반도 혼합문화에다 안 먹는 게 없을만큼 아주 미식 끝판왕을 달리는 아시아의 프랑스급 국가로 다이스가 떠 버리면서 다들 카오스를 맛봤다(...) 정작 이 세계선 프랑스는 신교국가라 요리문화가 사망한 게 함정.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악명높은 경신대기근 당시 평민들이 굶어죽기는 커녕 몇 달 동안 고기 구경 하기 힘들었던 정도로 끝.[4]

영국이 아편전쟁[5]을 일으키면서 명 주변의 국가들인 러시아, 고려-일본, 대월을 끌어들임과 함께 명 내부의 군벌들을 지원하자, 중원 정벌따위는 전혀 고려도 하지 않던 고려 황실과 상인 계층은 이를 역이용해 해외원정 명목으로 고려 내 귀족들을 끌어모은 후 중앙의 철기군으로 일소해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했듯 고려-일본 양 국의 작위겸직으로 인해 9할이나 되는(!) 일본 다이묘들도 같이 쓸려나가 버리고 남은 것은 맨몸이 된 아시카가 막부 뿐. 결국 아시카가 막부 역시 몰락하고 기존의 모든 작위들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영지를 회수한 고려와 일본은 양국 상인계층에 의해 대부여 제국으로 통합된다.[6]
3.1.1.2. 제국의 성장과 붕괴, 그리고 혼란기
신생 통합제국 대부여는 수백년의 원수 오이라트 몽골을 공격해 서하로 밀어내버리고, 그 와중 부여의 성장&친러 성향인 부여의 스탠스를 훼방놓기 위해 영국의 뒷공작으로 발생한 국내 무반귀족잔당&구교 불교세력들의 반란까지 말끔하게 처리한 뒤[7] 내정다지기에 들어갔는데...이 과정에서 전 국민 의무교육 시행에, 토지개혁, 기초복지[8]는 이미 완료되었다는 충격과 공포의 계몽주의 끝판왕급 포스를 선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선거권 부여는 19세기에 불과한데도 만 19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녀에게 부여하는 걸로 나오면서 왜 이것들 1세기 넘게 앞서가는건데? 하고 당시 관람하던 스레민들이 경악. 이후로도 국력을 축적하며 과거 일본의 번국이던 대만, 류큐로 영향력을 재확대하는 동시에 홋카이도, 사할린까지 개척하고 군제개혁에 착수한다.

중원의 세력이 월과 제 양강으로 슬슬 정리되는 기미가 보이자, 전부터 남만 몽골이 차지했던 큐슈 쪽 문제로 시비를 걸 기미이던 남원(구 월나라)에게 역으로 서하의 영토를 문제로 전쟁을 선포, 원래 유목민족이었던 국가를 상대로 드라군 스웜 전술+해상봉쇄로 수도 난징을 포함 골수까지 털어버린다. 이후 북명(구 제나라)과 패권을 두고 전쟁, 이 세계에선 최초로 전쟁에서 철도를 이용한 전략을 선보인다. 첫 시도라 이래저래 시행착오는 있지만 전장에 먼저 도착한 이점을 살려 80만 포격기병(...)으로 종심돌파를 선보이며 단 두번의 돌격으로 수도인 북경을 함락시키는 등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후 화북을 속국으로 삼는다.

허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영러동맹이 틀어지면서 영국에 의한 친러국가들 무역봉쇄가 실시, 여기에 화북의 민족주의 물결까지 겹쳐 국가 내외적으로 혼란을 겪던 도중, 황제(AA 페르펙티)에 의한 친위 쿠데타가 발발하고 만다. 하지만 이미 계몽주의 끝판왕급 체제이던 부여에 있어 이런 시대착오적 친위쿠데타[9]는 역풍으로 황제에게 불어닥쳤고, 결국 황제는 음독자살하면서 내란은 일단 종식, 부여는 민주연방제 공화정으로 체제가 전환된다. 하지만 혼란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던 와중 황제의 친위 쿠데타 당시 그나마의 속국 위치까지 빼앗기고 강제 합방당한 화북의 독립 열기는 더더욱 거세졌고, 결국 화북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 화북 독립전쟁 와중 일선 부대들이 인해전술에 휘말려 각자 단절, 공포의 광기로 인한 폭주가 발생하여 천만이 넘는 민간인 학살이 발발하고 만다. 이에 남원을 거꾸러뜨리고 탄생한 중화민국은 화북 수복을 결의, 전쟁은 중화민국과 부여의 전면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학살극을 비롯해 이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된 부여 내 시민 여론은 반전으로 돌변, 정부와 군부는 어떻게든 중화민국을 거꾸러뜨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부여 육군은 전략 전술에서 중화민국군을 압도하고 다대한 피해를 강요했지만 결국 시간 제한을 넘어서지는 못했고, 최후의 철수전에서 큰 병력 피해를 보고 화북을 놓아주면서 통일 중화민국을 인정하게 된다. 그나마 이 와중 종전 조약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부여에게 불행 중 다행이었고, 화북 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총사령관이던 히이라기 시노아는 군법재판을 거쳐 처형된다.
3.1.1.3. 아시아의 푸른 용, 승천
화북 독립전쟁의 여파로 전 세계가 민족주의 독립의 물결에 휩싸인 동안, 부여는 영러동맹 복구를 힘입어 재개방된 시장의 힘으로 위기 상태이던 재정 적자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감과 함께, 68운동을 통해 그들이 화북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한 사죄와 사회문화적 변혁이 진행된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 러시아의 국제적 입지가 위태로워진 틈을 타 영국이 일단 아시아 쪽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는 대신 이권을 인정받고,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잠식에 들어간다. 그리고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파산 가까이 몰리자 헐값으로 동시베리아를 사들이면서 열강이었으면서도 국제 무대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던 것을 집어던지고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우선 만주와 동시베리아의 자원빨을 제대로 받아 상선들을 마구 뽑아내면서 세계 해운&조선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한데다, 2차대전 이후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은 이탈리아와 해운동맹을 체결하기까지 하면서 급속도로 국력을 축적해나간다.

인도와 영국의 동남아 패권을 둔 경제전쟁으로 양자 모두 진이 빠진 상태에서 해군 드레드노트 급 건함경쟁이 터지자, 그야말로 쇼 미더 머니란 이런 것이란 것을 보여주듯 미친 물량[10]을 뽑아내겠다고 선언하면서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린다. 거기다 그 와중 화북 독립전쟁 이후 비교적 홀대받던 육군마저 단순 기동화력전 수준이 아니라 차량을 통한 기동전에 눈을 뜨고 시제품에서 잭팟이 터져 양산까지 돌입. 이에 영국, 미공화국, 중국, 아즈텍이 손을 잡고 대 부여동맹을 형성하려 있지만, 하필 중국과 손을 잡고 있던 인도가 동맹에 참여하기는 커녕 바로 부여와 손을 잡아버리자 도미노 여파로 중국, 영국까지 부여의 해상패권을 인정하는 흐름으로 흘러간다. 이미 여기서 해상패권국 싸움은 부여가 판정승을 거두다시피 한 상황.

이후 가볍게(?) 하와이 해전이 발발하고, 비교적 준비 만반이던 미국-아즈텍 연합해군에 부여-중화민국 연합해군이 패배를 거두자 부여는 바로 패전을 인정, 결과적으로 70만 톤 정도가 까인 180만톤 선에서 함대보유 제한을 당하는 수준으로 손을 털고 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하필이면 부여를 믿고 있던 영국은 부여의 이 빠른 이탈로 인해 미대륙에서 미공화국-아즈텍이 손을 잡고 미대륙을 통일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유럽에 이어 미대륙의 영향력까지 상실하며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20년간 부여는 NATO와 국제해사기구를 창설. 해군은 350만톤급으로 함대를 확보하고, 그 와중 현실 세계선의 2차대전급 교리과 장비 및 함재기로 무장한 항모만 100만톤급으로 뽑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육군 역시 질세라 공수사단+전략폭격교리로 무장. 그리고 1922년, 러시아, 중화민국, 인도, 이탈리아+@를 이끌고 연합군을 결성, 통일 미대륙 USSA가 장악한 동남아 및 태평양, 아프리카 식민지를 해방시킨 후 오대양을 부여의 호수로 만듬과 함께 USSA가 미대륙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 3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연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승패가 초장에 기울었음에도 5년동안 USSA 공산주의 정권이 되도 않게 뻐팅긴 탓에 부여의 전략폭격+해상봉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켜 물류단절로 인한 미대륙 전역에서 발생한 아사자가 1.3억에 달했고,[11] 참다못한 부여와 연합국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각오하면서까지 상륙함대를 편성하여 수평선을 메우자 정작 저항하지도 않고 백기를 들었다. 종전 후 이 참사에 분노한 부여와 동맹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USSA를 기존의 여러 국가들로 자결권을 주어 쪼개버림과 함께 공산주의 정부 수뇌부를 전범처리하여 형장으로 보내버린다.

이후 부여의 손에 의해 UN이 결성되고, 극초대강국 부여의 패권 아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3.1.2. 중화민국

미치광이 황제와 이어진 난세, 그리고 화북의 참극을 딛고 일어선 통일 중원.
동시에 부여의 영원한 귀빈.

화북 독립전쟁에서 부여군에게 천만 단위로 학살당한 것 때문에 당연히 악감정이 하늘을 찔렀지만, 부여가 정부 국민 가리지 않고 반세기 내내 싹싹 빌어서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엔딩의 마지막 대사가 "우리들은 학살자의 자손과 피해자의 자손들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시대에 도착했다." 였을 정도.

엔딩 이후 세계를 다룬 3차 창작 <(주)부여상사>[12]에서는 부여의 세계 절대패권하에서 사과 겸해 내준 이권만으로도 느긋하게 성장중이며, 대약진 운동 같은 뻘짓이 없었으므로 반만년 중화의 문화가 유구하게 이어져 문화사업의 끝판왕으로 군림한다. 영화를 찍기 위해 세트장을 만들고 부수고 하는 게 아니라 도시를 만들어서 그냥 운용하는 수준이고, 특히 요리문화에 있어서는 부여와 심심하면 천하제일요리대전을 벌이기도 한다는 설정.

어느나라 음식이 제일 맛있냐를 물어보면 국가원수들끼리 육탄전을 벌이고 서로 국경에 군대를 증원해 긴장감이 맴도는 친밀한 관계다. 다만 국가원수 육탄전에서는 4천년 중화 무술의 진수를 이어받은 중화민국 대통령님께서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정성들여 패준다는 듯하다.

부여어장 OVA에서는 동남아를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통제하고 있다. 열심히 동남아산 상품을 구매하면서 치안을 유지할 군사력을 대주는 호구 국가 취급.

3.1.3. 실론 - 인도 공화국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읽고 편승하여 적당한 지역 강국에서 열강으로 승천한 해상무역의 허브.

무굴 제국은 상당히 평온하게 지내왔으나 근대화에 점차 뒤처져 가고 있었으며 실론은 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인도양 무역의 허브로서 상당한 함대를 가져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굴 제국이 통일 인도를 만들겠다고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는 멍청한 짓으로 인해 영국, 러시아, 페르시아, 실론 4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실론은 구 마이소르령을 받아갔으며 영국은 마이소르 령을 제외한 무굴 제국의 영토 전체를 가져간다. 러시아는 전쟁배상금 7000만 루블을 잔뜩 타냈다. 세포이 반란이 일어나자 실론은 엄청난 지원을 하며 범 인도주의를 들고 나온다. 이후 영국이 실론에게 인도 전체를 맡기면서 파키스탄, 버마까지 통합한 통일 인도 공화국을 수립. 중국과는 미묘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대립하지만 부여는 상위의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부여어장 OVA에서는 아프간인 인종청소와 동남아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완전히 불량 국가로 낙인찍혀 외교적 고립을 당하고 있는 처지라 부여에게 철저하게 달라붙고 있다.

3.1.4. 몽고계

3.2. 유럽

3.2.1. 이탈리아

유럽의 2류 국가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오른 SPQR의 부활.

우리 지구의 이탈리아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근성으로 프랑스 패권을 완성하려던 레밀레옹의 발목을 치명적으로 잡아당긴 전적과 부여와의 해운동맹에 의해 유럽 패권을 장악했다. 3차 창작 <(주)부여상사>에서는 부여와 서로 지중해 무역에 끼워다오(조까) 조선소좀 지어다오(꺼져) 하면서도 민달팽이처럼 끈적끈적한 관계로 협조하여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뒤 유카리가 진행한 부여어장 OVA(...)에 따르면 프랑스나 신롬으로부터 워낙에 시선이 안좋아 신롬의 전쟁을 핑계로 유엔 평화유지군이 유럽 한복판에 눌러앉자 진짜로 집사장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심어둔 코어를 통해 부여를 쫓아가고 있다.

3.2.2. 러시아

인본주의의 모태가 된 거대한 보편제국.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 기업 카르텔의 얼굴마담으로 전락하다.

3.2.3. 신성로마제국

영국과 러시아 두 거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어이 완성한 대독일. 그러나 마지막 선택의 실수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살아가는 나라로 추락하다.

관련 AA는 니시즈미 미호 → 이츠미 에리카, 이스즈 하나, 킹 브레드레이, 레이제이 마코
3.2.3.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얻다
166년짜리 종교전쟁의 결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팔츠의 카이저를 축출. 프리드리히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관을 거머쥐면서 호엔촐레른 가의 첫 황제로 등극한다. 제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대제는 신롬의 강역을 완성시키기 위해 종교전쟁 이전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무력침공. 프리드리히 대제가 지휘하는 30만 신롬-프로이센 군은 거의 세 배에 육박하는 오스트리아-베네치아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따내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하나, 오스트리아의 프린츠 오이겐 2세(AA. 프린츠 오이겐(칸코레))와 베네치아의 런장군(AA. 스트레이트 쿠거)의 활약으로 연합군에게 유효타를 넣는데 실패. 급기야 잦은 전쟁으로 프로이센 본국에서 콜투피스 판정이 뜬 틈을 타서 오스트리아 재상 카우니츠(AA. 시로에)가 외교 테이블에서 휴전조약을 맺고 화이트피스로 전쟁을 종결. 사실상 전쟁은 신롬-프로이센이 이겼으나 외교전에서 오스트리아의 판정승이 되고 말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제는 휴전기간 동안 나라의 안정도를 유지한 채 대출상환과 코어박기에 힘쓰다 사망. 어떤 스레민의 평을 빌리자면 한 명의 먼치킨을 여러 레알들이 막아냈다.

팽창하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악감정이 있던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되도록 러시아와의 충돌을 꺼리고 싶어하던 프로이센과는 달리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점유하고 있던 리투아니아 강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참이라 기회만 되면 손절할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발발한 대 라틴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전쟁에서 폴란드를 뜯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 미디움 대출 상태의 프로이센의 재정을 파탄내는 결과를 초래, 거기다 러시아와의 협약에 따라 치러진 알바니아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결국 폴란드를 러시아에게 매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이로서 프로이센 역시 러시아를 동맹에서 가상적국으로 여기게 되어 서로 이를 박박 가는 사이가 되고 만다.
3.2.3.2. 라이히의 완성, 그리고 위기
이후 미국 남북전쟁을 지원하고자 차기 호국경(AA. 류몬부치 토오카)가 영국군의 다수를 이끌고 미 대륙으로 나간 틈을 타서 자국으로 망명온 영국 왕세녀(AA. 마츠미 쿠로)를 영국에 밀입국시켜 영국 내전을 일으키는 데 조력하나 국교회 신자를 제외한 영국 국내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현 호국경이 탈출에 성공하자 이거 안되겠다 싶었는지 영국군에게 덴마크 기항을 허가함으로서 사실상 왕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후 토오카 호국경이 유럽을 휩쓸고 다닐 동안 프로이센은 더 이상의 팽창을 자제하고 신성로마제국의 내치를 다지며 제국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13] 거기에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베네치아가 프로이센을 지원하면서 재정상태도 양호한 상황에서 이집트 문제로 영국과 러시아가 눈을 돌린 사이 오랜 걸림돌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병합함으로서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의 강역을 완성한다. 그러나 신생 신성로마제국의 완성은 한창 떠오르던 영국의 심기를 자극했고, 발트3국을 매각하면서까지 동맹을 맺으려던 러시아였으나 영국의 공작과 튜튼기사단령의 완전한 회복을 갈구하던 프로이센의 입장차이로 파토. 결과는 영국이 러시아가 지닌 이집트의 이권을 인정하는 식으로 영러동맹이 체결되는 바람에 프로이센은 신성로마제국을 완성시킨 것도 무색하게 두 강대국들의 사이에 끼어 사실상 유럽에 고립되어 버리자 옛 독일어권이던 북아프리카의 팔츠와 연계, 영러동맹에 대항한 종단동맹을 성사시킨다.

민족주의 열풍이 유럽에 불어닥친 결과 마침내 육각형 프랑스 공화국이 들어서자, 신롬은 프랑크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프랑스와 동맹. 북해의 영유권과 오랜 숙원이던 폴란드 강역의 회복을 목표로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러동맹과 종단동맹의 주도 하에 1차대전이 발발한다. 기세 좋게 바르샤바까지 밀고 들어갔으나 러시아와 발칸 소국들의 역습으로 16일만에 도로 내주고 빈과 슐레지엔까지 함락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프랑스가 허겁지겁 병력의 4분의 1을 지원으로 보냈으나[14]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러시아에게 수도까지 함락. 현 카이저가 물러나고 의회와 헌법 제정, 폴란드에 대한 영구포기와 전쟁배상금, 비무장지대를 조건으로 종전. 하지만 아직 역량이 살아있던 신롬은 러시아에 대한 복수로 불타는 왕당파가 집권, 비스마르크(AA. 킹 브레드레이)가 수상에 취임한다.
3.2.3.3. 카이저라이히, 마침내 승천하다.
지난 대전 패전국의 처우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알력과 더 이상 양국의 동맹 가치가 없어지자, 새로이 프랑스의 통령으로 취임한 나폴레옹과 신롬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관계개선을 노린다. 그리고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신롬을 선택하자 자연스럽게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동맹의 역전이 벌어진다. 토오카 호국경이 사망하고 난 이후 인도가 영국에게서 독립하고 부여가 화북을 잃고 중화민국이 들어서며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의 광풍이 불어닥치자, 신성로마제국은 분리주의자에 대항하는 복고주의의 수장으로서 프로방스 반환을 문제로 벌어진 프랑스와 신흥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이탈리아의 아군으로서 참전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육군은 알프스를 우회기동하여 순식간에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점령, 이탈리아를 탈락시켰고 이에 신롬 지휘부(AA. 이스즈 하나)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기 전에 프로방스에서 벌일 최후의 회전에 명운을 걸기로 한다. 그러자 프랑스측 지휘관(AA. 이자요이 사쿠야)은 신롬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돌아올 시간을 벌기 위해 시간을 끌어보려했으나 신롬이 프로방스에서 파리로 진군할 기미를 보이자 이에 어쩔 수 없이 회전에 응한다. 그 결과 신롬은 도발에 걸린 프랑스군을 짓밟는데 성공하면서 곧바로 파리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계속된 강행군으로 휴식과 재보급에 3주나 잡아먹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귀환을 허락해버렸다. 파리로 귀환한 나폴레옹은 과거 부여가 사용했던 종심돌파 전술로 신성로마제국군을 격파, 신롬에게서 알자스와 로렌을 넘겨받으며 전쟁을 종결짓는다. 그러나 비록 패전으로 알자스와 로렌을 잃었으나 반 분리주의의 입장과 영국과 러시아의 방어적민족주의와 맞서싸우는 최후의 방파제임을 분명히 보여준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자신들을 수장으로 한 새로운 패권블록을 완성함으로서 국제외교상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머쥔다.

신롬의 승천을 염려한 영국[15]이 경제적 종속 상태였던 프랑스[16]와 러시아를 소집, 이에 맞서 대 몰트케(AA. 레이제이 마코)가 지휘하는 신성로마제국군은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켜 프랑스를 선제공격함으로서 2차대전의 포문이 열린다. 마침 단숨에 이탈리아를 탈락시키려는 영국의 공세에 호응하여 이탈리아로 친정을 나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군에 신경쓰고 있던 사이 신성로마제국군은 프랑스 방위군과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 파리를 함락시킨다. 파리가 함락당한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즉시 회군을 시도하나 이미 세번이나 로마를 털린 탓에 이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이탈리아는 과거 나폴레옹이 했던 알프스 우회기동을 역으로 선보여 72만 프랑스군 중 32만을 전사시켜 끝까지 나폴레옹의 발목을 붙드는 데 성공[17]. 이윽고 영국의 레드코트가 나폴리 상륙에 실패하고 간을 보고 있던 팔츠가 이베리아에 상륙하자 결국 나폴레옹이 항복하면서 서부전선을 정리. 그리고 러시아와 발칸 소국들을 상대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동부전선[18]에 프랑스를 패퇴시킨 서부전선군을 집중시켜 러시아마저 항복시켰고 덤으로 이베리아에서 팔츠, 이탈리아와 싸우고 있던 영국군까지 몰아내면서 지중해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일소하는 데 성공. 과거 자신들을 견제하던 양대 강국인 영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신성로마제국은 화려한 복수전을 마무리짓고 지난 전쟁 때 빼앗긴 알자스, 로렌은 물론 과거 러시아의 강역이었던 발칸반도와 발트해를 손에 넣어 신흥강국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의 패자로 승천한다. 그러나 카이저라이히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3.2.3.4. 라이히의 몰락
러시아의 파산 이후, 동시베리아를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국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부여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고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낸 이탈리아가 승천하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이 부여와 해운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에게 유럽의 해운을 맡긴 것이었다. 신롬의 제조업 생산력이 얼마가 되건 간에 그것을 만들 원자재와 연료를 들여오고 팔기 위해 내보낼 물류를 이탈리아에게 쥐여 있으니 조금이라도 기분 거스르면 전방위에서 경제보복을 당하는 신세. 실론/인도처럼 물류 환적이나 휴양지 등을 해보려 해도 많지도 않은 항구가 유럽 물류의 끝자락인데다 철도는 의도적으로 신롬을 피해갔고 휴양지는 이미 지중해를 내해로 만든 이탈리아가 쥐고 있는 판국이다. 답이 없다.

군사력으로 로마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이 세계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뿐만 아니라 끝물이기는 해도 그 호국경 브리튼의 레드코트까지 저지한 방어전의 귀신들이다. 게다가 호국경 시절의 유산인 대규모 식량기업의 존재로 인해 식량자급조차 제대로 안 되는 상태이므로, 설령 프랑스와 손잡고 어떻게 해보려 해도 공장 다 밀고 순무라도 키워야 국민들 먹일 수 있다고 한다. 즉, 군사력은 유럽 최강일지는 몰라도 경제력으로는 종속당하고 만 셈이었다.

결국 한참 아래로 깔아보던 부여나 이탈리아의 요구에 따라 그 강대한 육군력을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 평화유지군[19]으로 제공함으로써 젊은이들의 피를 뿌려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알량한 간판 한 장과 어느 정도의 외화, 이권 정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카이저로서는 피를 토할 지경이다.

부여어장 OVA에서는 국지분쟁을 일으켰다가 단번에 진압당하고 선제공격권을 박탈, 유럽에 평화유지군 간판 쓴 부여군이 주둔하게 만들어버린다. 진지하게 유럽이 이탈리아 중심으로 뭉치지 못하게 하려고 준비중이던 부여 외교관들은 카이저에게 찐하게 키스해주고 싶었다고. 그래서인지 군사교류도 하고 핵까지 공동개발할 정도로 부여와의 관계는 매우 양호한 편인데 실제로 이탈리아를 대신할 유럽패권국(이라 쓰고 부여 대신 유럽을 관리할 행정국) 1순위로 신성로마제국을 염두에 두고 있을 정도다. 마침 유럽 내에서 날고 기는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독일이 전부 이탈리아와 척을 지고 있는 상황이라 이탈리아 입장에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는 상황. 거기다 프랑스는 대놓고 친부여 성향이며 영국도 부여와 불가침협약을 맺은 상황이라 실상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 거의 왕따인 셈이다.

3.2.4. 프랑스

3.2.5. 알바니아

3.2.6. 팔츠

3.2.7. 헝가리

3.2.8. 영국/영연방

태양이 지지 않던 광기의 사자왕 호국경의 제국.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놓치고 몰락하다.

이 세계의 최대 특이점은 카톨릭 영국을 대대로 지배해 온 호국경 가문의 천재, 통칭 토우카 호국경(AA 류몬부치 토우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세계를 돌며 해적질과 이간질로 날을 지새던 영국을 이어받은 16세의 소녀 호국경은 단숨에 프랑스와 신롬과 러시아를 깨부수고 세계를 발밑에 두었다. 다이스 사기가 의심될 정도로 나쁜 선택지는 절대로 피해가면서 해외에서는 식민지 경영과 경제블럭과 여차하면 무력행사를 강행하면서도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불패를 자랑했고, 국내에서는 때아닌 마녀사냥을 벌여 런던의 겨울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왕실을 쫓아낸지 오래인데도 "내가 '내' 해군을 '로열' 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불만 있습니까?" "있을리가요." 라는 반응을 끌어낼 정도의 절대권력을 쥐고 심지어는 가족사까지 행복했던(...) 이 여자가 노년에 남편을 잃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아들에게 숙청당할 때까지, 전 세계가 무적의 로열네이비와 최강의 레드코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중국마저 과자 깨지듯 쪼개져 갈취당했고, 극동의 강국이었던 부여 연방마저도 대영제국의 경제봉쇄 앞에 망할뻔하다 겨우 받아들여져 목숨을 건졌을 정도다.

정작 식민지에서는 착취한 자본의 6할을 재개발에 투자한다는 무지막지하게 자비로운 통치로 인해 "드디어 우리 영국에도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났구나!"라는 반응이었고 유럽 대륙에서도 "이간질이나 하는 놈들보다는 그래도 낫다!" 라는 평가였다는 게 함정.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호국경직을 이어받고 의회와 협력하여 세계를 통치하던 중, 왕당파 찌꺼기와 영국의 자본가 등등이 일을 벌이고 호국경 가문이 물러서고 세계로부터 착취를 개시하면서[20] 그리고 이에 의한 충돌로 독일과의 전쟁, 인도와의 경제분쟁을 벌이며 그 경제력이 흔들거리면서 대영제국의 몰락이 시작된다. 토우카 호국경은 '완벽하게 이긴 뒤'에 전쟁을 했던 반면 당시 영국 정부는 외교적 실패를 전쟁으로 극복하려 들었던 것이다.

결국 전략적으로 지고 시작한 전쟁에서 패배하고 내분과 혼란이 발생한 시점, 영국은 그나마 본국에 대한 감정이 우호적인 영연방을 보다 확고하게 문화적으로 융합시키려는 호국경의 마지막 유산을 가동시킨다. 유카리의 후일담에서는 이것만 성공했었더라도 영국의 외교승리로 끝나고, 부여 등 기타 열강들이 제발 영연방 구석에 끼워달라고 애원하는 발닦개 취급당하게 되었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때 발동한 건함경쟁에서 부여의 250만톤 함대라는 무지막지한 카드 앞에 인도와 중국이 굴복하자 결국 영국도 태평양 패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에 굴하지 않은 아즈텍 제국은 아직 부여의 건함 드라이브가 가속되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 정정당당한 선전포고 끝에 하와이에서 세계 최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해전을 일으킨다.

이 때 영국의 치명적인 마지막 실수가 있었다. 영국은 부여를 지원하여 미공화국 및 아즈텍 해군과 상잔시킴으로서 영연방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는 시간을 벌려 했는데, 그러기 위해 지원한 것이 '태평양함대의 전함 3척 판매' 뿐이었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처럼 전력을 다해 참전했더라면 영국도 지역 강국 정도로는 유지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전쟁 결과 부여는 해상패권을 확립하였고, 반대로 불가침 조약으로 바다 건너의 강대국 부여를 묶어두는 데 성공한 공산주의 미공화국은 즉각 천만대군을 동원해 아메리카 대륙 통일전쟁을 개시했다. 부여의 생산력과 국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아즈텍 및 미국의 전략가들은 부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종전 조건을 제시하였던 것이니, 그들의 목적은 '180만톤'이 아니라 '불가침 조약'이었다.
한때 영국과 함께 세계의 바다를 양분하다가 '그' 호국경에게 몰락당한 아즈텍은 미국의 유혹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아메리카 연방'의 2인자 자리를 획득했고, 호국경이 심혈을 다해 키워낸 남미는 단숨에 굴복하거나 정복되어 USSA가 탄생한다. 대영제국의 몰락이었다.
<(주)부여상사>에서는 호국경 이후 시절 로마와 나폴리에 아사자가 굴러다녔던 원한에 사무친 이탈리아의 감정 섞인 통치에 의해 인간 구두닦개 취급당하고 있다.[21] 주된 수입원은 유럽 환적항구의 30% 이권(부여와 이탈리아가 35%씩)이며, 모든 기업이 부여와 이탈리아의 지사나 저급한 경공업 소비재 공장이다. 전 국민의 9할 이상이 산업혁명기보다 더한 노동환경에서 신음하며, 외국인 상점에 영국인이 함부로 접근했다간 조준사격이 날아올 수도 있다. 생산지의 10배 이상 가격으로 뿌려지는 부여산 자포니카미가 주식이며 식량자급율은 1% 미만. 그나마 자비로운 부여 쪽 공장에서는 1일 14~18시간 노동과 석달에 하루 정도의 휴일을 준다고 한다. 그럼 이탈리아계는...? 극소수의 유능한 재원들은 외국계 기업에서 관리직으로 일할 수 있지만 파리목숨인 것은 마찬가지라 어떻게 이익 내보려고 유치한 미식대회가 실패하자, 책임자가 즉시 쫓겨나버릴 정도.

이러한 통치에 소요가 발생하면 군대가 나서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굶겨" 한 마디에 식량공급이 끊어진다. 1인당 하루 쌀 100g 미만으로 석달간 처절하게 버티다가 진압당한 사례도 있다는 듯. 그리고 30%의 환적항 이권 중 10%를 또 뺐겼다. 이렇게 식량을 통제하는 것이 통치 수단이기에 실역사의 대구전쟁 시기에는 이탈리아가 트롤어선단을 보내서 씨를 말려버렸고, 로열네이비가 50년 묵은 폐물 전함까지 끌고 나와 저항하자 호흡곤란이 일어날 정도로 웃은 다음 북해 지방대로 압살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런던 최대의 빈민굴이 되어 있는 등 복구는 요원하며, 심지어는 가난 포르노 관광지로까지 사용된다. 미국이나 아프리카 등에서 착취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을 회사 MT 등으로 데려와 보여주고 나면 "그래도 영국보다는 우리가 잘산다."라는 행복감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부자동네에서 온 부러운 사람들."이라고.

부여어장 OVA에서는 남미의 소요로 인해 부여가 남미를 포기하면서 이탈리아가 영국에게 개입을 요청했으며 영국이 나서서 남미의 소요를 진정시키며 남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 결과 영국은 열강 3위로 재부상했으며 부여와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된다. 영국의 목적은 부여와 이탈리아의 냉전에 기생하는 중재자. 즉, 매우 덩치가 큰 프랑스, 스위스.

3.3. 아메리카

3.3.1. USSA

3.3.1.1. 미공화국(ROA)
부자동네.
이는 영국인들의 관점. 실제로는 영국보다는 조금 나은 지옥도다.

한때 영국의 동반자였던 아즈텍 제국에 '아메리카 대륙의 2인자'라는 지위를 제안해 끌어들이고, 바다 건너의 강대국 부여 연방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시간을 번 직후 천만대군을 동원해 캐나다와 남미 등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령들을 정복했다. 그 뒤 다시 해군을 확충하여 부여와 본격적인 군비경쟁을 벌였으나 크리티컬로 항공주병에 눈을 뜨고 사납게 항모를 건조하며 수천 기의 해군항공대를 편성하고 있는[22] 부여와 달리 거함거포주의 전함 해군을 양성하였으며, 동남아에 혁명을 수출하는 등 나름대로 지리적, 전략적인 이점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우선 해외파견군이 갈갈이 갈리고, 미해군이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 해외파견군에 대한 보급이 끊어지고,[23] 알래스카를 통해 넘어온 부여 육군항공대와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해상권을 장악한 부여에 의해 철도, 교통 등이 폭격당해 식량 배급망이 붕괴되었다. 특히 파일럿을 강제징병하다시피 하는 항공력이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식량 배급이 끊어지면 난리가 나는 법인데, 이 와중에 붉은 미국을 지배하는 공산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버팅기는 바람에 억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전쟁 5년째, 그때까지 통상파괴로 미국을 항복시키려던 연합군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대대적인 상륙군을 편성해 미 본토에 접근시켜 전쟁이 가까이 다가오자 저항하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이에 이중으로 열받은 연합군이 몽땅 전범재판에 걸어 싸그리 처형.

이후 미국은 군정을 거쳐 사실상의 식민지 상태로 노동법이나 복지제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부여와 이탈리아의 대기업들은 맨해튼에 고층빌딩 짓기 놀이를 하고 있으며 프리니AA를 쓰는 미국 노동자들은 200층 빌딩을 짓는다는 소식에 "그럼 한 2천명 죽어나가겠구만" 이라고 힘없이 중얼거린다... 백악관이 중소기업 출장소가 되었을 지경.

부여 도심에는 "순결한 미국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결혼정보회사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돈만 더 내면 귀족 처녀도 가능하다. 돈 많은 부여 자본가 중에는 미국 처녀와 결혼했다 이혼하고 다른 처녀와 결혼하는 걸 벌써 세번째나 하는 인간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2천년 초기 한국에도 비슷한 국제결혼 광고가 있었긴 한데, 이 미국 여자들에게는 오히려 거의 유일한 탈출 수단이라는 점이 구제가 없다.
3.3.1.2. 아즈텍 제국
너무 오래 심장을 뽑던 나라.

북미보다 먼저 나라꼴을 갖추고 세계 2위의 해군을 양성한 해군국이기는 했는데, 그때까지도 심장 적출 의식을 버리지 않았기에 참치들로부터 악평이 드높았다. 한때는 토우카 호국경과 협력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였으나 그 호국경에게 뒤통수를 맞고 해군을 상실, 아일랜드에 상륙시켰던 육군 주력까지 잃어버리면서 몰락 직전까지 몰렸다.

이후 영국의 동맹자가 아닌 부하가 되어 휘둘리다가, 영국-인도간의 경제전쟁 및 부여의 해군력 증강 치킨런을 틈타 재건된 해군을 이용해 하와이 해전이 발발, 아직 확충되지 않은 부여 해군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향후 10년간 태평양의 패권을 인정받는다.

이 때 아즈텍의 요구조건을 다이스로 굴려보고 나온 너무나 허접한 요구에 유카리 어장주는 거의 화를 폭발시키며 아즈텍 정부 놈은 대체 전략안이라는 게 없다, 아니면 부여한테 얼마나 돈을 받은거냐, 이건 뇌물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은 거다 할 만큼 악담을 퍼부었으나, 한참 분노한 뒤 미국 다이스로 넘어가자...

사실은 미국과 비밀동맹을 맺고 아메리카 통일전쟁에 부여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손목 스핀)

결국 아즈텍 제국은 통일 아메리카 대륙의 2인자 지위를 차지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파멸은 눈 앞에 와 있었다... 3차 세계대전에서 USSA가 패망하며 아즈텍의 황제는 사형당했다. 사실 USSA가 된 뒤에는 출연이 없다.


[1]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1922년에, 5년 간 진행되었기에 최종적으로는 1927년으로 판정. [2] 그도 그럴 것이, 세금내라면 일본 다이묘라고 주장하고 군사 줄이라면 당장 부여 대귀족으로 돌아오는 등 자신들 유리한 방향으로 작위를 들이미는데 황실에서 이를 좋게 봐 줄리가 없는 것이다. 후술할 젠트리를 양 국 황가가 밀어준 것은 이것 역시 한 원인이 된다. [3] 이 스레에서 천도교는 12세기 중엽에 등장. 스레주인 유카리의 예상으로는 무신정권이 일단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공인하고, 대몽항쟁 및 혼인을 통해 왕씨 고려→최씨 고려로 넘어가는 와중 최씨 가문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밀어줬을 것으로 추정. [4] 아예 고려시대 당시에는 흉년으로 금주령을 때리려고 해도 전부 마유주 같은 젖술을 발효시켜버리는 바람에 의미가 없다는 어장주의 발언이 있었을 정도. [5] 다만 이 세계선의 아편전쟁은 명의 혼란기를 틈타 명에 손을 뻗기 시작한 영국이 아편을 팔아치우는 동시에 벌어진 전쟁이기에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6] 실제 역사에서 찾아보자면 대독일의 황관을 부르주아 계층이 가져다 바쳤던 것과 유사하다. [7]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난징을 강습해서 명의 황제까지 죽인 후 깔끔하게 황궁만 털어가서 챙긴 돈으로 괴도 프린스 오브 웨일즈유럽 각지+부여에서 이간질을 시전했지만, 유럽 각지에서는 미칠듯이 효과적이던 이간질이 부여에서는 큰 효능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아편전쟁 당시 영국이 지원했던 허수아비 군벌 세력이 부여가 참전하지 않으면서 고기방패가 된 바람에 빠르게 분해된데다 명의 금군을 순식간에 털어버린 탓에 부여의 국력까지 오판한 것으로 추정. 여담으로 이 반란은 현실 일본의 서남전쟁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르다. [8] 그것도 육아 정년 근료 의료 전부 풀콤보로 만족. 뭐야 이게에에에에에?!?! [9] 사실 시대착오 수준이 아니라 폭군이라 불러야 하는 게 맞는 수준. 국회의원들 중 공화파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충언을 하던 국회의원들까지, 거기다 충언을 하던 국회의원들의 목을 압도적으로 많이 날려버렸다. [10] 처음으로 별 부담없이 뽑아낸 물량이 드레드노트급 30척에 슈퍼 드레드노트급 5척, 최종목표량 드레드노트급 54척에 슈퍼 드레드노트급 27척으로 도합 250만톤 이상의 대함대.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당시 경제전쟁 여파가 컸다지만 영국은 최종적으론 드레드노트급 52척에 슈퍼 드레드노트급 12척을 뽑아내고 완전히 나가떨어졌고 중국-인도 연합이 드레드노트급 34척에 슈퍼 드레드노트급 6척을 뽑고 다리가 후들거렸을 정도. 그런데 부여는 저 250만톤 대함대를 뽑아내면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 수준에서 끝날 예정.(...) [11]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사자만 따진 것이다. 여기다 5년여의 전쟁으로 최소 2000만쯤이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합치면... [12] 다른 어장주의 작품이지만 유카리 본인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내용이므로 기재한다. [13] 토우카 호국경이 종교재판으로 날뛰자 이로 인한 우려와 공포심 덕에 오히려 제국의 통합에 득이 되었다고... [14] 이때 이탈리아에선 나폴레옹(AA. 레밀리아 스칼렛)이 밀라노를 휩쓸고 로마까지 쾌진격하고 있었다. [15] 영국이 가장 두려워하던 시나리오는 승천하기 시작한 신롬과 미국이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영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신롬과 미국의 사상차이로 동맹이 결렬되고 있었다. 영국 입장에선 언젠가 손을 잡기 전에 독일과 미국을 각개격파 해 둘 심산이었던 셈. [16] 마침 프랑스 역시 동로마의 바실레오스(러시아)와 로마 교황이 인정한 임페라토르(영국의 호국경 가문)과 혼인관계를 프레임으로 프랑크 제국의 후계자로서 제위에 오른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의 프랑크 제국의 계승을 부정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7] 그러나 프랑스군 또한 가로막는 이탈리아군 50만(가용병력 45만+본토방위병력 5만) 중 3만명만 남기고 전부 갈아버리면서 회군에 성공. 역시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스레민들에게 입증한다. [18] 본래 러시아&발칸 동맹을 상대로 38:1이라는 경이적인 교환비로 엄청나게 선전하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차르(AA. 히무라 켄신)이 국채까지 남발하면서 추가병력을 꼴아박아 간신히 뚫어내고 있었다. [19] 말하자면 원자재를 착취당하는 아프리카나 미주대륙 등의 소요진압. [20] 이 당시 영국 영향권에서만 3억 명 이상이 아사했다. [21] 그 시기에도 반찬투정을 했던 부여에서는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이탈리아와 척질 생각은 없다. [22] 미국의 천만대군을 두고 "갸아아악 쟤들 천만이에요 우리 물량 부족해요. (태평양에 운석이라도 떨어지면) 질지도 몰라요!" 하고 예산전사질을 했다. 부여 정부는 알면서 속아줬지만 오히려 부여의 동맹국들이 겁을 먹었을 정도. 지나친 예산전사 행위, 동맹국의 이반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23] 이 와중에도 동남아 주둔군은 부여 육해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기막힐 정도로 버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