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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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 위씨(姬姓 衛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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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衛)나라 19대 국군 의공 懿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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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희(姬) | |
씨 | 위(衛) | |
휘 | 적(赤) | |
아버지 | 위혜공(衛惠公) 희삭(姬朔)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60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 위나라(衛)의 제19대 군주. 위 의공은 아버지 혜공의 막장 행각[1]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고, 자신의 삽질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그리고 위의공은 공전절후의 학 덕후였다. 즉, 로마의 닭덕후 호노리우스와 쌍벽을 이루는 새덕후다.2. 생애
위 의공은 궁궐에 거대한 새장을 짓고 수집한 학을 거기 모아서 길렀으며 그 학들에게 벼슬[2]을 내리고 국고를 기울여 수입 곡물을 사먹이기까지 했다. 사실 곡물만 먹이는 것은 육식성에 가까운 학의 건강상 좋지 않다는 것이 아이러니.이 때문에 나라 안팎의 불만을 산 나머지 적인(狄人)[3]이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
라고 하며 조롱할 정도였다.
이에 위 의공은 학들을 풀어주고 몸소 방어전을 지휘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박살나고 본인도 피떡이 되도록 칼로 난도질되어 끔살당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였는데 타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던[4] 대부 굉연(宏演)이 나중에 전쟁터에서 주군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은 간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 멸망 직전의 위기라 장사를 지낼 사람과 도구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굉연은 스스로 할복하고 자신의 몸을 관 삼아 그 간을 담고는 순절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부복납간(剖腹納肝)이다.
이유야 어쨌든 위나라 사람들은 위 혜공의 자손들을 멸족시켜 위나라와 위혜공의 일족은 망해버리고 말았다.[5][6] 사람들은 급자의 후손과 공자 수의 자손을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없었다. 위후검모를 되세우고 싶어도 그마저 죽은 뒤였다. 그나마도 위후 검모는 후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급자와 위후검모의 친동생이자 소백과 선강의 아들 공손 신(申)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대공이다.
이후의 위나라의 임금 자리는 문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했는데, 나중에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압박으로 희성(姬姓) 위씨(衛氏) 군주가 퇴출되고 신하였던 희성(姬姓) 자남씨(子南氏) 군주가 들어선다. 그리고 자남씨는 문공의 7세손이며 위 영공의 아들인 공자 영에게서 갈려나온 집안으로 여전히 문공의 자손이다.
3. 기타
사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 자기가 아끼는 애완동물을 사람보다 더 대우하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흔한 일이긴 하다.[7] 과거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죽어가는데 어느 부자는 자기가 아끼는 개나 말에게 사람도 먹기 힘든 귀한 식재료를 먹이고 비단옷 금장신구를 둘러줬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가 종종 있었고, 현대에도 대부호나 연예인이 죽으면서 기르던 개나 고양이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이 심심할 만하면 해외 토픽에 나온다.[8] 하지만 이런 일들은 그나마 개인사의 영역이라 '자기 돈 자기가 쓴다는데 무슨 수로 말리겠냐' 정도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위의공은 학에게 관직까지 주는 등 민생과 연결되는 영역에서까지 공사 구분을 못 한 탓에 '개인적으로 기행을 했다'라는 이야깃거리 수준을 넘어 암군으로 욕을 듣게 되었다.먼 후대의 지도자 중에사도 위의공과 완전히 똑같은 기행을 보인 지도자가 있는데,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애완견 코르부에게 침대와 고급 가구가 딸린 침실을 주고는 최고급 고기와 영국산 개 비스킷을 사먹이며 전용 리무진 행렬을 선물해 준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대령으로 승진시켜주기까지 했다.[9] 이쯤이면 위 의공이 더 정상으로 보일 지경인데, 더 가관인것은 차우셰스쿠는 기원전 사람들에게도 비웃음을 당할 정도의 기행마저 양호해 보일 기행을[10] 무려 1970~80년대에 저질렀다.[11] 또 2010년대에는 태국의 라마 10세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푸들인 푸푸를 대령으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 똑같이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나락으로 간건 덤이다.
[1]
자세한 것은
선강 항목 참조.
[2]
심지어는 대부가 타는 수레에 학을 태우고 놀러다녔다.
[3]
당대 패자국이었던
제나라에게 원병을 청했지만 이때 제나라는
연나라에 쳐들어온 이민족을 상대하느라 군이 피로했고, 무엇보다 당장 가서 싸워 얻는 이득보다 전후 복구를 원조함으로 얻는 이득이 많다는 점을 들어
관중이 원정을 반대했다.
[4]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위의공이 학 모이로 줄 메밀을 사러 보냈다.
[5]
사실은 의공의 아들
개방이 있긴 했으나, 그는 일찍이 제 환공을 섬겨 제나라에 있었다.
[6]
헌데 이 아들도 결국 평이 좋지 않아서 역아,
수초등과 함께 제나라의 승상인 관중에게 간신배 취급을 받았다. 결국 제환공의 죽음에 일조해버린 것은 덤.
[7]
경우에 따라선 식물이나, 심지어
수석 등 사물을 가지고 그러는 사람도 있다.
[8]
사실 이런 경우엔 이 동물들을 돌보도록 지정된 후견인이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어 유산을 운용할 수 있다. 때로는 동물은 학대 수준으로 방치하고 후견인만 노가 나는 일도 있을 정도.
[9]
참고로 차우셰스쿠는 애완견을 대령으로 승진시킨 직후에 축출, 처형되었는데, 이는 차우셰스쿠가 대령으로 승진시킨 개를 상관으로 섬기게 될(...) 군인들이 분개해서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국민들의 민주화 혁명으로 루마니아의 공산당 독재 정권이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10]
참고로 위 의공은
예수는 커녕
석가모니도 태어나기 한참 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11]
로마 제국의
칼리굴라가 자신의 애마 인키타투스를
집정관에 임명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나, 사실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사실 칼리굴라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들은 거의 전부가 요즘말로
찌라시 수준의 헛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유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애마를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게 낫겠다고 농담한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