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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1:54

웨슬리 스네이더/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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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웨슬리 스네이더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AFC 아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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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약스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2002-03 시즌에 1군 스쿼드에 공식 합류했다. 이후 2003년 2월 2일, 빌럼 II와의 경기에 첫 출전하면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3월 5일 FC 흐로닝언과의 KNVB 베이커에서 첫 득점을 기록하였다. 데뷔 시즌 17경기 4골을 기록, 2003-04 시즌에는 리그 30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여 아약스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후 비슷한 또래인 판데르파르트와 함께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UEFA 유로 2004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판데르파르트가 2005년 여름 함부르크 SV로 이적한 이후 아약스 부동의 주전으로 도약하면서 성장해갔고, 점점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즐라탄이 말하길, 이 때 그는 어린 선수임에도 머리 회전이 매우 빠르고 플레이를 즐길 줄 아는 선수였다고 한다.[1] 특히 2006-07 시즌에는 무려 리그에서 30경기 18골을 기록했으며, 총 47경기 22골을 기록하였다. 2002-03 시즌부터 2006-07 시즌까지 5시즌 동안 총 180경기 58골을 기록하였다.

1.2. 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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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2일, 네덜란드 커넥션의 일환으로 아르연 로번, 로이스톤 드렌테 등과 함께 이적료 €27M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한다. 등번호는 직전 시즌까지 데이비드 베컴이 달았던 23번이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처음 출전한 라리가 경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마드리드 더비 경기로,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면서 주인공이 되었다. 2번째 경기 상대는 비야레알이었고, 이 경기에서는 무려 2골을 기록하였으며 본인의 장기인 프리킥으로 득점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적 초반에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으나 갈수록 눈에 띄는 플레이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결국 이 시즌에도 레알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16강에서 탈락하고, 스네이더르도 시즌 초반에 보여준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도 07-08시즌 라리가 마지막 경기에서 절묘한 프리킥으로 리그 9호골을 터뜨리면서 승리에 기여했으며, 첫 시즌부터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2008년 8월 3일 프리시즌 에미레이츠컵에서 큰 부상을 당하여 안 그래도 첫 시즌에 다소 아쉬운 모습이었는데, 팬들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한편, 그 사이에 호비뉴 맨시티로 이적하면서 등번호 10번을 받게되었다. 어쨌든 프리시즌에서 당한 부상으로 3달 간의 결장이 예상되었지만, 빨리 회복하면서 10월 21일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하지만 우려대로 경기력은 2007-08 시즌에 비해 더욱 떨어진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계륵같은 입지가 되었고, 끝내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모든 대회를 합쳐서 고작 30경기 2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렇게 두 시즌 동안 눈에 띄는 활약 없이 보내다가 페레스 회장 재집권 이후 2009년 여름, 갈락티코스 2기 정책으로 데려온 카카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잃었고, 폐예그리니 감독이 중앙 공미로 카카를 쓰고 좌 로번, 우 날두를 쓰는 삼각편대를 구축하려 하면서 다른 네덜란드 출신 선수들과 함께 본인 의사에 관계없이 이적한다. 이때 밀려난 오렌지 커넥션의 면모를 살펴보면 과거 아약스의 에이스에서 이후 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 명성이 자자한 콰밥만훈의 일원이 된 클라스얀 휜텔라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다. 이 때 함께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바로 다음 시즌 토트넘 홋스퍼 FC로 떠난 과거 아약스 선배인 라파엘 판데르파르트와 훗날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출당하는 수모를 겪은 로이스톤 드렌터도 넓은 의미로는 쫓겨난 네덜란드 커넥션이다.

이처럼 자국 선수들이 줄줄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자 격분한 아르연 로번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나게 된다. 이때 얼마나 사무쳤으면 공공연한 레알가 되었다.[2]

1.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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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7일, €15m의 저렴한 이적료에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인테르로 이적한 그는 팀에 오자마자 곧바로 밀란 더비에 출전해 인테르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레알에서의 부진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팀에 녹아들면서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양발잡이에 강력한 중거리 슈터[3]에 창의적인 패스 공급으로 플레이메이커가 절실했던 인테르에서 군계일학의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특히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를 3-1로 쳐부술 때 그는 1골 1어시스트로 MOM으로 선정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맹활약을 펼쳤다.[4] 오죽했으면 주제 무리뉴 감독이 레알에게 감사 인사를 보낼 정도였다. 한편 레알은 야심차게 영입한 카카가 부상 크리로 기대만큼 활약을 못해줬으니 속이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도 FC 바이에른 뮌헨을 맞아 밀리토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2-0으로 완승, 이탈리아 클럽으로는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소속팀 인테르의 트레블과 조국 네덜란드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스네이더르는 발롱도르 수상이 유력해 보였으나... 때마침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이 통합되면서 FIFA 발롱도르 라리가+ UCL 득점왕인 리오넬 메시에게 돌아가자 팬덤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메시가 라리가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고 챔스 득점왕도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소속팀 바르셀로나는 리그 우승에 그쳤고 조국 아르헨티나 또한 남아공 월드컵 8강에서 독일에게 4:0의 대패를 당할 때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다.[5] 결국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가 통합된 원년도부터 인기상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포디움에 들지도 못하고 메시, 이니에스타, 사비 바르셀로나 3인방만 뽑혀서 논란이 더욱더 가중되어버린 것. 비록 2010-11 전반기는 그 전 시즌과는 달리 부진하면서 발롱도르 수상이 당연시되는 건 아닌 분위기였지만 적어도 포디움에는 충분히 들만하고도 남을 활악상이었다.

발롱도르 투표에서 스네이더에게 불안했던 요소라면 모든 대회에서 골고루 활약했지만 방점은 찍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과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을 모두 팀 동료 디에고 밀리토에게 내줬고, 월드컵 골든볼은 디에고 포를란이 가져갔다. 그런데 스네이더보다 뛰어났다는 밀리토가 발롱도르 후보 23인 명단에도 못들면서 투표 이전부터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스네이더가 밀리토에게 밀릴 수는 있어도 바르셀로나 선수들보다 아래로 평가 받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고 스네이더와 밀리토 두 선수가 모두 저평가 받는 결과가 나와버리니 인기 투표라는 비판이 더욱 거셀 수 밖에 없었다.

2010-11 시즌 챔피언스 리그 2라운드 베르더 브레멘과의 홈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2010-11 시즌 리그 24라운드 AS 로마와의 홈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하였다.

2010-11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FC 바이에른 뮌헨전에서 1-2로 뒤지고 있던 63분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하였다. 한편 인테르는 이 득점 이후 나온 고란 판데프의 득점으로 지난 시즌 결승전에 이어 또다시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AS 로마를 상대로 1어시스트를 하여 팀은 3대1로 승리하여 이탈리아 슈퍼컵을 우승하였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2어시스트를 하여 팔레르모를 3대1로 꺾으며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이끌었다.

2011-12 시즌을 앞두고 맨유, 첼시 등의 구단의 타겟이 되어 거의 하루 단위로 이적에 관한 루머가 양산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본인도 인테르의 스쿼드가 얇음에 불만을 토하는 등 분위기가 인테르에 낙관적이지는 않다. 일단 이적료가 40M 정도라고는 하는데 요즘 맨시티의 엄청난 현질 덕분에 선수 가격 인플레가 일어난 요즘엔 대체로 싼 값에 영입하려 하는 듯하다.[6]

한편 과거 이적 시장의 큰손으로 불렸던 인테르는 2010년 트레블 이후 긴축 정책으로 전환하여 구단의 씀씀이가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다. 세리에 A의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구단의 적자가 늘어났고, 트레블 시절의 멤버들을 하나둘 판매하면서 팀 전력은 하락하는 중이다. 결국 2012년 챔스 진출에 실패하면서 적자는 더 늘어났다. 이제는 있는 선수도 제대로 못 지키는 판국이다. 스네이더르는 이러한 구단의 행보에 실망을 하기 시작했고 점점 약해지는 전력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2012-13 시즌에는 부상으로 시즌 초반 결장하다 9월에 복귀했으나 구단과 재계약 문제로 경기에 못 나서고 있다. 인테르는 스네이더의 높은 주급을 삭감하려고 하는데 스네이더는 주급 삭감에 반대하며 재계약을 안하고 있다. 그런데 스네이더만을 욕할 수 없는게 원래 '2015년까지는 이 연봉 줄께' 하고 계약 했었는데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연봉 깎아야 재계약을 해준다고 말하니 선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거기다가 경기 출장도 못하고 있으니, 이 문제는 사실 인테르 보드진과 구단주의 심각한 병크가 원인이다.[7]

감독도 나는 모르겠다는 생각인지 배째라는 듯하고, 스네이더를 안 쓰고도 인테르는 리그에서 비교적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는 있다. 그 와중에 요새는 터키 갈라타사라이에서 스네이더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 양 구단도 1,000만 파운드로 이적료가 합의되었고, 개인 협상만 남은 상태. 그리고 스네이더는 터키행 비행기를 타면서 이제는 인테르를 탈출하는가 했더니 며칠째 묵묵부답 중이다.

본인은 잉글랜드행을 선호하는데 높은 주급 탓에 잉글랜드 클럽들은 영입을 주저하는 모양이고, 스네이더르 본인도 주급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아직도 갈라타사라이 이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인테르도 현재 주급으로 재계약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은 지금 터키 가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반응과 트레블 1등 공신인 스네이더를 저렇게 내치다니 모라티가 노망난 거 아닌가는 반응으로 나뉘어져 있다. 인테르는 트레블 당시의 멤버를 제값 주고 판 적이 없기 때문에 스네이더도 그렇게 될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1월 21일 갈라타사라이가 스네이더 영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연봉은 500만 유로(71억)로 알려졌는데 인테르 시절의 연봉인 1,000만 파운드(170억), 그 이후 인테르의 재계약 제시안인 750만 유로에 비해 굉장히 적은 규모였다.

1.3.1. 인테르 시절 스네이더에 대한 고찰

윗 내용만 보면 인테르 시절 스네이더는 지속적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준것으로 보이나, 스네이더의 전 커리어를 놓고보자면 2009-10 시즌과 2010 남아공 월드컵이 특이하게 잘했던 시즌이고, 그 외의 시즌들은 월드 클래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빠른 타이밍에 킬패스 내어주는 능력과 날카로운 중거리 슈팅 등 스네이더의 킥 능력은 월드클래스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다. 패스 타이밍을 재며 잠깐 볼 소유권을 지켜낼 정도의 키핑력은 보유했으나 그 이상의 탈압박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며, 상기한 이유에서 드리블로 직접 볼을 운반하는 것에도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한계가 분명한 키핑 밎 탈압박 스킬과 전진 드리블 능력의 미비는 스네이더르가 경기에 개입 할 수 있는 상황을 한정시킨다.

즉 스네이더는 빠른 템포에서의 찬스메이킹은 가능하지만, 볼을 순환시키는 등 팀의 템포를 조절하며 경기 전체를 조립하는 것은 다소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상대 수비가 갖춰진 지공 상황에서 스네이더르의 플레이메이킹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긴 어렵다.

이런 특성들이 혼합되어 스네이더는 2000년대 초반까지 자주 보이던 포워드 아래에서 활동하는 전통적 공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예컨대 스네이더에게 찬스메이킹을 넘어서 미드필더진을 아우르며 경기를 조립하는 넓은 의미의 플레이메이킹을 맡기는 것은 여러 이유로 무리였고[8], 빼어난 킥능력을 살려 절정기 카카처럼 1-2선을 아우르며 골을 노리는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스네이더르의 피지컬과 드리블링의 한계가 뚜렸했다. 흘러나오는 세컨볼을 욱여넣는 일은 가능하나 직접 수비진과 경합하기에는 무리라는 의미다.

결국 스네이더는 라인을 내리고, 역습을 중시하는 역습 전술의 시발점 역할 외에는 날카로움이 크게 저하되는 선수였고, 이는 스네이더가 빠른 템포의 번뜩임이 필요한 역습 전술에서는 월드 클래스의 모습을 보였으나 레알 마드리드와 라파엘 베니테스 체제의 인터 밀란 등 점유율 축구에서 실패를 맛보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렇게 팀의 전술에 따라 활용도와 활약상이 크게 갈리는 선수에게 마냥 고액의 주급을 주는 것은 팀 입장에서 제법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2009-10 시즌은 월드클래스였으나, 2010-11 시즌부터 전술에 따라 활용도가 크게 갈린다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여기에 매년 20~25경기 출장에 머물 만큼 잔부상이 잦다는 문제점은 마시모 모라티가 스네이더의 가치를 재고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네이더는 2009-10 시즌 인테르와 2010 월드컵의 네덜란드 같이 자국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에게 안티 풋볼이라는 디스를 당했던 팀[9]. 즉, 자신이 활약하기에 최적화된 전술에서 순간적인 번뜩임을 과시하며 월드클래스급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모든 팀과 감독이 이러한 전술을 사용하는 건은 아니며, 이는 2009-10 시즌 절정의 활약을 한 스네이더가 2010-11 시즌 베니테스식 점유율 축구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됐다.[10]

물론 스네이더가 베니테스 스타일의 점유율 축구에 맞지 않았던 것에 대해선 팀의 전술 기간을 바꾸려한 베니테스에게 책임을 물을 여지가 존재한다. 무리뉴 체제하에서 스네이더는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사네티, 티아고 모타, 데얀 스탄코비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마르크 판보멀, 나이젤 더용의 보조를 받아 약점을 보완하고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던 반면, 무리뉴 시기보다 팀의 라인이 높아진 베니테스 체제하에서는 상기한 한계를 모두 노출하며 무너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논쟁만큼 한정된 전술에서만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네이더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일도 드물 것이다. 자신이 활약하기 좋은 여건이 갖춰진 상황이 아닌 상황에선 날카로움이 없다는 의미다. 단, 이건 전통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스타일을 지닌 대부분의 선수들이 현대축구에서 보여주는 한계이기도 하며, 이런 스타일의 선수들이 스타일이나 포지션을 바꾸거나 아예 도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스네이더와 마찬가지의 전통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로 도태되었던 대표적인 선수로는 메수트 외질, 세스크 파브레가스 등이 있다.

그리고 인테르가 이런 스네이더에게 과거보다 줄어든 주급을 제시하고 결국 처분한 일이 스네이더가 역대급으로 운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선수 자신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는 각자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다.

1.4. 갈라타사라이 SK

갈라타사라이에서 보여준 행보는 실망스럽기만 하다. 비록 2012-13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역전골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수치상으로 보나 내용상으로 보나 스네이더의 기량은 확실히 쇠퇴한 것이 역력하고, 이 때문에 갈라타사라이 팬들 사이에서도 들인 돈에 비해 활약이 미미하다고 까이고 있다.

잔부상까지 심해져 자주 리그 경기에 결장하는 것 또한 비판받고 있다. 그나마 로베르토 만치니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난 후,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그 놈의 유리몸 기질이 또 발목을 잡고 있는 중. 이적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으나, 정작 본인은 갈라타사라이에서의 생활에 대해 '내 집과도 같은 곳이다'라며 매우 만족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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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12월 11일에 열린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천금과도 같은 결승골을 넣으며 팀이 16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그나마 생명 연장에 성공하게 되었다.[11] 이후에도 부르사스포르와의 경기에서 이적 후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경기력은 여전히 기복이 심하고 그렇게까지 우수하다고 보기 힘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네이더 특유의 폭발적인 슈팅은 여전해서, 4월 6일 페네르바흐체 SK와의 더비경기에서 팀의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넣었고, 5월 7일 튀르키예 쿠파스 결승전에서도 다시 결승골을 기록했다. 또한 5월 11일 트라브존스포르와의 경기에서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전반적인 경기력은 전성기에 비해 확실히 떨어진 모습이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득점 및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크랙'으로서의 본능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013-14 시즌 리그 28경기에 출장해 12골 7어시스트의 준수한 성적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현지 팬들의 평가도 시즌 초반에 비해 많이 좋아졌는데, 이는 시즌 후반기 중요 일전에서(위에 상술한 바와 같이) 미칠 듯한 해결사 본능을 보여준 스네이더의 활약상 때문이다.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취임한 후, 갈라타사라이의 부주장을 맡게 되었다. 리그 6라운드 페네르바흐체 SK와의 더비에서 후반 43분과 46분에 그림과도 같은 중거리슛 두 방으로 2골을 성공시켰다. 지난 시즌에도 홈에서 팀의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넣었던 스네이더는 이 날도 맹활약하였고, 갈라타사라이는 스네이더의 극적인 2골에 힘입어 379번째 이스탄불 더비에서 2-1로 승리하였다. 팀의 에이스로서 프란델리 감독이 터키어를 배우지 않고 이탈리아어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기사 이후에도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2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10골)을 기록했고, 갈라타사라이의 리그 20번째 우승 달성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2017년 7월 15일에 갈라타사라이와의 계약을 해지하며 팀을 떠났다. 이탈리아 세리에A 구단이나 북미 프로축구 MLS 구단으로의 이적설이 나오고 있었는데 프랑스 OGC 니스로 이적을 택했다. 니스라는 도시 자체가 프랑스의 대표적 휴양 도시인데다 구단도 리그앙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챔스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상태라 여러모로 본인에겐 매력적인 선택지였던 듯 하다.

1.5. OGC 니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부진한 경기력으로 주전에서 밀려나고 반 시즌만에 MLS행 루머가 나오고 있다. 리그에서는 겨우 5경기 출장에 그쳤고, 시즌 8경기에 출장한 것을 끝으로 겨울 이적 시장에서 니스를 떠나 카타르의 알 가라파로 이적했다.

1.6. 알 가라파 SC

2018년 1월 9일, 알 가라파로의 이적을 완료한 스네이더는 12일 데뷔전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의 2-1 승리에 도움을 주었다. 3월 4일 스네이더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9월 6일, 페루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 은퇴경기를 가졌다.

2019년 8월 13일,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하였다.


[1] 아이러니 하게도, 즐라탄이 '유로스포츠 시청자들이 뽑은 최고의 골'을 기록한 경기에서 스네이더와 처음으로 같이 뛰었다. 당시 판 더 파르트는 부상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바이에른 팀 동료 프랑크 리베리가 레알 이적설이 불거졌을 때마다 '가려면 바르샤로 가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3] 양발로 중거리슛을 때릴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점으로 작용한다. [4] 공식 MOM은 1골 2어시스트의 밀리토였다. [5] 단, 독일전을 제외하면 공격포인트는 하나 뿐이었음에도 전체적인 활약상은 좋았다. 골든볼 후보 10명 중에 한 명으로 뽑혔을 정도니까. [6] 40M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월드 베스트 11에 오르는 선수의 클래스에 비하면 대체로 싸다는 평이 많다. 앞서 말했듯이 선수가격 인플레도 있었다. [7] 오죽하면 인테르 팬덤에서 차라리 옆동네로 이적해서 보드진에게 빅엿을 선사했다. [8] 수비력이 탁월하지도 않았고, 활동량이 아주 많은 선수도 아니었다. 그리도 레지스타 롤을 맡기며 기대하는 경기 조율 능력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즉 플레이메이커보단 찬스메이커에 가까운 선수였단 것이 발목을 잡았다. [9] 그런데 이 안티 풋볼에 대한 비판은 조금은 걸러서 듣는 것이 좋다. 요한 크루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축구를 하지 않는 팀과 선수에게는 가차없이 독설을 가했던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 유명한 히바우두 후안 로만 리켈메와 같은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크루이프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크루이프가 가장 극찬했던 팀은 당시 월드컵에서 우승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FC 바르셀로나였는데, 중원에서 계속 볼을 돌리다가 빈틈을 한 번 노려 1:0 승리로 꾸역꾸역 올라가는 스페인 팀의 축구가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말하는 팬들도 당연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팀의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결국 이기는 축구가 가장 최선의 축구인 것이고, 응원하는 팬 입장에서도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기는 축구가 재미있는 축구이니 거기에 대고 뭐라 할 것은 없지만, 이런 잣대는 이른바 안티 풋볼에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한다. 결국 경기에 임하는 코칭 스태프와 선수 입장에서는 승리를 하는 게 최선이기에 요한 크루이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안티 풋볼로 알려진 텐백 축구는 상대적으로 전력상 열세에 있는 팀이 강팀을 잡는 전술로 애용하긴 하지만, 사실 이 또한 구현하기 매우 어려운 전술이다. 전원이 수비에 가담하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상대 선수들이 공간을 차지하여 기회를 노리지 못하도록 더 많이, 그리고 더 민첩하게 뛰어야 하기 때문에 막판으로 갈수록 체력 부담이 커진다. 그 와중에 막판에 1골이라도 허용한다면? 동점을 만들기 위해 뒷공간을 열고 공격에 임해야 하는 반면 체력에 한계가 생기기에 뒷공간을 내줘 점수차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즉, 1골에 모든 것을 거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하루종일 반코트 식의 공격만 당하다가 막판의 한 방의 역습으로 상대팀을 무력화시키는 식의 축구가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더 긴장감 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안티 풋볼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필요도 없다. [10] 이런 점 때문에 월드컵 후 1위에 올랐던 스네이더의 발롱도르 배당률은 투표일 즈음 3위까지 추락했다. 사실 기존의 발롱도르 형식에서 가장 손해를 본 선수는 스네이더보다는 사비로,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상 수상과 투표일즈음 발롱도르 배당 1위를 차지하며 발롱도르에 가장 가까운 선수로 여겨졌으나(특히 엘 클라시코에서 5-0으로 대승한 이후 최유력 후보로 여겨졌다.) FIFA 올해의 선수상과 통합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한 FIFA 발롱도르 체제에서는 메시에게 밀렸다. 스네이더의 기자단 투표건은 애초부터 발롱도르 수상하던 기자단과 피롱도르 기자단이 다르기도 하고, 구성이나 수여기준으로 볼때 과거 발롱도르의 전통을 이은 것은 2011년부터 신설된 UEFA 올해의 선수 쪽이다. 하지만 UEFA 올해의 선수는 오직 유럽 기자들에게만 투표권이 있기에 전체적으로 유럽 선수들에게 후한 편이고 개인의 퍼포먼스보다 팀 성적을 너무 중시한다는 비판점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조르지뉴의 수상. [11] 국내 언론에서는 '신의 한 수'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정작 터키 내에서는 그 정도로 추앙받은 적이 없다. 갈라타라사이에서 가장 칭찬받는 플레이어는 위 문서에 조롱조로 설명되어 있는 펠리페 멜루이고, 스네이더는 '어쩌다가 한 번 생명연장골을 넣는 플레이어'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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