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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성종과의 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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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문3. 상세4. 선물5. 월산대군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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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금이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나의 하나뿐인 형(兄)이다."
《성종실록》 60권, 성종 6년 10월 24일 경자 3번째 기사 中
조선 의경세자 아들 월산대군 성종 형제의 우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서문

월산대군은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보통 왕의 형은, 왕보다 서열이 높다는 특성 상 왕위계승으로 인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을 피해가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 형제는 우려와 달리 평생 우애가 좋았다.

다만, 조선에는 이미 무려 세자였다가 폐세자 당하고도 동생인 왕의 우애어린 배려를 받고, 천수를 누린 왕의 큰형이 있다. 월산대군과의 우애는 성종 자신의 성품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또한 성종은 세종을 존경하고 닮고자 한 만큼 양녕대군의 전례를 의식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리고 세종 재위기에도 숱한 비행으로 자주 탄핵을 받은 양녕대군도 동생 덕에 처벌을 면했는데, 월산대군은 그와 달리 처신을 상당히 잘했으니 성종은 더욱 형을 배척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3. 상세

성종은 월산대군과 우애가 도탑고 지극하여 서로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며, 시편(詩篇)을 창수(唱酬) 하면서 쉬는 날이 없었다. 상방(尙方)의 정미하게 만든 물건과 내부(內府)의 진선(珍膳)은 연락 부절(連絡不絶) 하였으며, 친히 화상찬(畵像贊)을 지어 하사하기도 하였다.
《국역증보문헌비고》, 제45권 제계고6 부록 종실의 고사 돈서 내용中
먼저 형인 월산대군은 임금인 동생에게 짐이 안되기 위해서 가능한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와 술을 벗삼아 풍류적인 생활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사람도 함부로 사귀질 않았는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모함에 휘말릴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월산대군과 교우관계에 있었던 문인과 종친들은 조신, 임덕여, 부림군, 강양군, 주계군과 처남인 박원종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아들 부림군[1] 이식이 먼저 세상을 떠난 월산대군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悼子美(도자미)
자미를 애도하며
冥寞人間隔(명막인간격)
적막하게 인간 세상과 헤어져
嗟君向此行(차군향차행)
아아 그대 이렇게 떠나다니
英靈埋厚土(영령매후토)
영령은 땅에 묻히고
名字寄銘旌(명자기명정)
이름은 명정에 부쳤네
鳥噪高陽宅(조조고양택)
새는 고양의 옛집에 울고
雲封望遠亭(운봉망원정)
구름은 망원정을 에워쌌네
遺稿盈一篋(유고영일협)
유고는 상자에 가득하니
千載揖芳馨(천재읍방형)
천년 후에도 그 향기에 절하리라

친동생인 성종 또한 월산대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각별해서 궁궐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형님을 불러서 모셨고 월산대군은 잔치에 입시할 때 항상 종친과 신하들보다 왕의 바로 옆인 제일 윗 자리에 배석하였으며 성종은 일본과 명나라 사신 접대 자리에 반드시 월산대군을 초청하여 연회를 함께 즐겼다.[2] 또 성종은 스스로 좋은일이 있으면 반드시 월산대군과 함께 즐겼는데 하루는 새로 수확한 맛 좋은 참외를 먹다가 문뜩 형이 생각나서 어제시와 함께 참외를 하사하기도 했으며 맛있는 먹거리가 생기면 늘 혼자 먹지 않고 같이 먹었다고 한다. 월산대군이 한강변 정자에서 시를 짓고 뱃놀이와 낚시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성종은 술과 각종 궁중 음식을 보내주어 형을 위안해 주기도 했고 월산대군 또한 계절마다 웅어, 황복, 잉어 등 직접 낚아올린 물고기라든지 궐 밖에서 구한 맛있는 음식들을 성종에게 보내서 즐기게 하였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 내전(內殿)에서 선온(宣醞)을 가지고 이르렀는데, 은호(銀壺)가 세 개였다. 은호의 양면(兩面)에는 금(金)으로 글자를 썼는데 혹은 오언시(五言詩)이거나, 혹은 칠언시(七言詩)이었다. 그 제목(題目)에 이르기를 ‘형(兄)과 함께 기뻐한다[與兄歡]’하였고, 또 이르기를 ‘형(兄)을 위하여 짓는다[爲兄作]’하였는데 모두 어제시(御製試)였다. 전교하기를,

"대군(大君)에게 은호(銀壺)에 시(詩)를 새겨서 주려고 하였는데 뜻하지 아니하게 대군이 나가서 경 등에게 보여주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경 등은 그 운(韻)에 의하여 화답(和答)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서거정(徐居正)·병조 판서(兵曹判書) 유지(柳輊)·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紐)·병조 참판 어세겸(魚世謙)·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 등이 모두 화답하여 바쳤다.

4. 선물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많은 물품들을 하사 하였는데 이중에서 알려진 것들 몇 가지 소개하자면 효령대군에게서 얻은 희우정( 망원정)이라는 정자를 월산대군에게 선물하였고 금으로 성종의 어제시를 세긴 선온, 일본 국왕이 보내온 냄비, 숟가락, 금부채, 천아(天鵝), 경기 관찰사가 바친 흰 기러기, 성종이 형의 장수를 빌고 근심을 깨뜨리길 바라며 '백년배'라는 이름을 짓고서 직접 제작한 우수한 구리 술잔과 하품의 옥 술잔, 성종이 형수(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생일을 맞아서 임신을 기원하며 겸금을 아끼지 않고서 훌륭한 장인을 불러 좋은 말로 깨우쳐 황금 여섯 냥으로 만든 메뚜기 형상 이외에도 중미, 황두, 청밀, 진유, 진맥, 면포, 정포, 사슴, 붕어, 이화주, 홍소주, 인삼차, 우각차, 설화차, 소룡차, 단봉차, 작설차, 청심연자음, 참외, 후추, 매, 황리, 강매, 밀감, 귤, 인삼, 황감, 산다화, 불두화, 먹, 벼루, 자문지, 유둔, 어의, 비단, 목면, 녹색 사모, 아청색 화문의, 돈피 이엄, 도홍색, 목면으로 만든 홑단령, 초록색 운문 비단으로 만든 핫더그레, 대홍주 철릭, 백주 과두, 한삼, 비단철릭, 유고, 침향목에 순금으로 배꽃 문양을 장식한 띠, 녹피화, 필단 초피 이엄, 감토 이엄, 서피 내공 주유 과두, 이피 내공 녹비화, 단의, 당표리, 호피, 대홍 필단, 초록 필단, 남라, 아마, 유마, 내구마, 조방양마 등 수 많은 물품들을 직접 지은 시와 글과 함께 자주 보내서 형제애를 돈독히 나누었다.
춤추는 거위(舞鵝)
일본국에서 천아(天鵝) 한 쌍을 진상해 왔는데 상께서 궁중에 두지 않고 즉시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하사했던바 상께서 그 집에 행행(行幸) 했을 때 마침 거위가 음악 소리를 듣고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성현 허백당집(虛白堂集), 제6권 내용中

월산대군은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매일 아침 입궐하여 삼대비전과 성종에게 문안을 드렸고 대군이 궐 밖으로 나가있을 때는 서로 편지로 시를 수창(酬唱)[3]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한다. 성종은 월산대군과 잠시 떨어져 있을 때에도 형을 그리워했는데 혹여나 형이 적적해 하거나 건강을 염려하여 시를 쓴 편지와 함께 각종 먹거리와 물품들을 먼 지방까지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었다. 아래는 성종이 월산대군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분이다.
봄날에 회포를 진술하다. (春日陳懷)
형이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다. (憶兄寂坐)
입춘에 시를 지어 화답을 요청하다. (立春拙賦求和)
안부를 묻고 한가함을 틈타서 시를 짓다. (安否乘閑作詩)
대군을 위해 봄날에 절구를 짓다. (爲大君春日絶句)
대군을 위하여 두견화 시를 짓다. (爲大君作杜鵑花詩)
개구리 소리를 듣고 장난삼아 바로 부를 짓다. (戱寫鳴蛙卽賦云)
날이 추워 특별히 술을 내리고 아울러 시를 짓다. (日寒特賜酒倂題)
윤정월 눈이 쌓인 속에서 지은 시에 화답하다. (和閏正月雪中題韻)
형이 왕자의 탄생을 읊은 시에 삼가 화답하다. (恭和尊兄誕王子韻)
밤에 앉아 빨리 시를 지어 이효‎지 편에 부치다. (夜坐走筆 付孝智傳)
석양을 마주하여 형을 생각하며 서툴게 율시를 짓다. (對斜暉 憶兄拙律)
중사 이효‎지를 파견하여 선온과 시를 보내다. (遣中使李孝智送宣醞幷詩)
안부를 묻고 불두화 한 가지와 시를 봉하여 주다. (安否封贈佛頭花一枝幷詩)
가을에 형과 후일에 유람하기로 약속한 것을 떠올리고 회포를 쓰다. (秋日憶兄約後日之遊 寫懷)
형이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시를 써서 한바탕 웃음을 산다. (恨尊兄不來 爲寫拙詩 以買一粲)
단오에 형을 위해 시를 지으니 비루하다 여기지 말고 질정을 구한다. (端午日爲兄拙作 勿陋求正)
내가 병을 앓고 난 뒤 형을 생각하며 근체시를 지으니 비웃지 말고 화답하라. (予病餘 憶兄拙賦近體 勿笑是和)
어제 고맙게도 말고기와 포도차를 보내주었기에 시를 지으니 비웃지 말라. (昨日惠送馬腹與葡萄茶 作拙詩勿哂)
안부로 지금 인삼차 세 근과 근체시 한 편을 보내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安否今賜送人參茶三斤 幷近體一篇 一哂)
갠 하늘을 바라보며 시 두 수를 지으니 비웃지 말고 화답하여 보내줌이 옳고도 옳다. (作望晴二首 勿笑和送 是可是可)
초봄에 영산홍을 보고 쓸쓸히 앉아 있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지어 봉함하여 보내다. (早春見暎山紅 憶兄寂坐 爲賦封送)
늦봄 삼월이 국기이기 때문에 조용히 안석에 기대어 있다가 형을 불러 배율을 짓다. (暮春三月 以國忌靜然憑几 却招尊兄 爲賦拙律)
진상한 생선 여섯 마리를 받고 매우 기뻐서 시로 보답하니 수창은 다른 날에 해도 된다. (受所進鮮魚六尾 甚喜 報之以詩 所酬在他日也)
사월에 비가 온 뒤 쓸쓸한 형을 떠올리며 궁중의 일을 적어 심심풀이로 삼으니 비웃지 말라. (四月雨後 憶兄寂歷 用錄宮中事爲破閑 勿笑)
빗속에 형이 나에게 준 것을 생각하고 한결같은 시를 지었는데, 비루하다고 여기지 말고 가르침을 달라. (雨中憶兄之與予 一般拙賦 勿陋見敎)
오늘 아침에 보내는 사슴의 배 속에 편지가 있으니 형이 한바탕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고시를 짓는다. (今朝所送鹿尾之腹有書 兄之可以爲一笑者也 作古詩)
듣건대 오늘 형이 득남하였기에 경하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기쁨의 시를 짓고 뒤에 회포를 펼치겠다. (聞今日兄得男 不堪慶賀 先作喜詩 後當展懷)
나는 특별한 목면 한 필이 있어서 형을 생각하며 지금 내리고 아울러 시를 쓰니 사양하지 말고 화답하라. (予有別樣木綿一匹 憶兄今賜 幷書拙詩 勿謝只和)
어제가 원정이라 시를 보내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다. 오늘 시를 지으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昨日元正 欲贈詩以示意 然無暇焉 今日拙稿一笑)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도 안부가 들리지 않는가? 나는 마음이 유쾌하지 않아서 소회를 편지에 쓰고 또 서툰 시를 짓는다. (安否何其昨與今無聞來 予心不快 敢以所懷作簡 且賦拙篇)
형이 매우 쓸쓸함을 알아 재주가 천박함을 헤아리지 않고 털 빠진 붓을 뽑아 조롱박을 그렸으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知兄太寂 不揣才賤 抽禿中書君 摸畵葫蘆 爲之一笑)
자문지 네 장과 시를 내리니 비웃지도 말고 사양하지도 말라. 이 종이는 품질이 좋아 입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보낸다. (賜咨文紙四張幷拙詩 勿哂勿謝 此紙品好 可作笠帽 故送之)
한가롭게 앉아 형이 극심한 더위로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다가 기쁘게도 혹독한 더위가 가셔서 부를 짓고 화답을 청하다. (閑坐憶兄之苦熱寂坐 因喜晴酷熱賦 請和)
선위사 풍천위와 이효‎지를 보내어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뜻을 돈독하게 하고, 아울러 시를 보내니 성내지 말고 오직 웃기 바란다. (遣宣慰使豐川尉及李孝智 以篤親親之義 幷詩勿怒惟笑)
오늘은 형의 생일이어서 전날 올린 붓으로 근체시 한 편을 쓰고, 아울러 아래의 변변찮은 물건으로 정성을 펼치니 비웃지 말라. (今日乃兄之生日 以前日所進尖橫 寫近體詩一篇 幷展忱薄物如左 勿笑)
병이 이미 회복되었다는 안부를 듣고 내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한 편의 시를 지으니 어찌 꼭 억지로 화답하랴? 오직 심심풀이로 삼길 바란다. (安否病已平復 予不勝喜 爲之一詩 何必强答 惟冀破寂)
형을 위해 회포를 보이니 비웃지 않고 비웃지 않으면 매우 다행이고 무척 다행이다. 사방의 논밭에서 깊은 정을 살필 만하다. 운자는 60개이다. (爲哥致懷 勿哂勿哂 幸甚幸甚 東西阡陌 可究深情 韻是六十)
안부를 묻는다. 나는 일본 국왕이 보내온 냄비와 숟가락 각 한 개, 금부채 다섯 자루를 얻어서 형에게 보내니 사양하지 말라. 아울러 빨리 시를 짓는다. (安否 予所得日本國王所送銚鍉各一金扇子五把 贈焉勿謝 幷走筆)
여름에 쓸쓸히 앉아 있는 형을 생각하며 홍소주 다섯 병과 황리 백 개를 보내고, 겸하여 서툰 시 몇 편을 부치니 비웃지 말고 질정해주기를 구한다. (夏日憶兄寂坐 送紅燒酒五壺 黃梨百箇 兼寄拙詩數篇 勿笑勿笑 求正)
안부가 며칠 동안 오지 않았으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아마도 사고가 있는가 걱정되어 저절로 근심이 생겼다. 편지와 시를 썼으나 돈독한 정에 부끄럽다. (安否數日不來 未認厥由 恐有其故 自生曲慮 作簡且詩 用篤情愧)
오늘 중관을 보내어 빈 뜰을 위로하고 또 서툰 시를 내리니, 한편으로 멀리서 그리워하는 정을 보이고 한편으로 형제의 [빠짐] 우애를 돈독하게 한다. (今日遣中官 慰來曠庭 且賜拙詩 一以視緬邈之情 一以篤鴒原之□云)
섬돌 앞에 불두화가 활짝 피어 내가 감상하다가 한 가지를 꺾은 뒤 적적하게 앉아 있는 형을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지었지만 봉함하여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階前佛頭花盛開 予翫之 因折一枝 憶兄寂坐 作詩一首 非封送也)
하향으로 재계하고 조용히 작은 정자에 앉으니 갑자기 꾀꼬리가 낮은 담장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형도 이러한 즐거움을 알 것이라 생각하였다. 바로 시를 쓴다. (戒夏享 靜坐小軒 忽看黃鶯過短墻 却憶兄亦知此樂也 卽書拙句云)
갑자기 우애의 은혜를 만나 기쁘게 문방의 보배를 받았는데, 이미 정이 가는 물건인 데다 정묘하였다. 기쁜 일이 없어서 오로지 서툴게 시를 지어 감정을 펼칠 뿐이다. (忽逢湛樂之惠 欣受文房之寶 旣爲之情玩 又爲之精妙 無以爲歡 聊以拙詞 庶展情緖云耳)
고열에도 거친 시를 지어 보내 부끄러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칭찬을 그만둘 수 없다’는 말을 보고 더욱 부끄러워 땅에 엎어질 정도였다. 시를 보내왔을 때 장난삼아 빨리 시를 짓다. (苦 熱爲拙詩來 感愧不已 觀稱贊不已之語 尤慚到地 及來時 走筆以戱)
한가할 때 잠시 동안 적적한 형을 위해 부천사가 기자 무덤을 배알하며 지은 첫 번째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니 다투어 비웃지 말라. 다만 시가 매우 차이가 나서 비웃을 것임은 알겠다. (閑暇暫刻 爲兄寂寞 和副天使謁箕子墓第一詩韻 勿以爭爲嗤 但以知懸絶爲笑)
봄이 가고 꽃이 져서 온 후원이 쓸쓸하여도 어찌 싫겠는가? 하늘이 큰비를 내려 바야흐로 추수할 희망이 있어 기쁘다. 생각건대 형은 조용히 앉아 있으리니, 부족한 시편을 보내지만 비웃지 말고 질정을 바란다. (春盡花落 何嫌萬苑寂寥 天將大雨 方歡西成之望 憶兄寂坐 以贈拙篇 勿笑求正)
내가 생각건대 봄과 가을은 흥이 한 가지이고 아우와 형은 뜻이 같아서 감히 가을의 사물로 아우의 정을 보내니 형께서 살펴보고 받았으면 한다. 또 국화를 읊은 율시 2수와 봄꽃을 읊은 율시 1수를 비웃지 말고 살펴보기를 깊이 원하는 바이다. (予惟春與秋一興 弟與兄同志 敢將秋物兼附弟情 惟兄察受 且菊花律二詩 春花詩一律 不哂諒察 深所願也)
오늘이 형수의 경사스러운 날임을 알아 풍속에 따라 선물을 주려고 하였으나 궁중 창고에 볼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황금 여섯 냥으로 주나라의 메뚜기를 만들고, 속마음을 피력하여 사물에 가탁한 뒤 주어서 징표로 삼고 또 부를 짓는다. (今日知尊嫂之佳辰 欲脩俗以贈物 而帑藏無可見之物 故以兼金之六兩 製周家之阜螽 披懷托物 遺以成驗 且爲之賦)
안부를 들었는데 구설창은 어떠한가? 나의 경우에는 정치를 돌보는 여가에 두 도위와 여러 차례 대화하였다. 매번 궁원의 자리에서 중처럼 쓸쓸한 형을 생각하며 속으로 아파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지금 편지와 시를 보내니 한바탕 웃어라. (安否 口舌瘡何 若我則萬機之暇 與兩尉相話屢矣 每當苑席 思兄之寂然如禪 暗傷懷者 不知其幾也 今致簡幷詩 一哂)
이 먹이 지극히 좋고도 귀하지만 내가 보배로 여기는 먹은 이것보다 낫기 때문에 아끼지 않고 형에게 주니 문방의 보배로 삼기 바란다. 이에 고시를 지어 하루의 한적함을 깨트리고 장년의 웃음을 이루려고 한다. 시를 비루하다고 여기지 말고 질정을 구하고 또 먹을 사양하지 말라. (此墨至精且貴 而予之所珍 猶勝乎此 故不惜以贈 爲作文房之寶 仍題古詩 以破一日之閑 以成長年之笑 勿陋求正 且勿謝)
오늘 형이 희우시를 올렸는데, 문중선이 대군의 말을 잘못 듣고 아뢰기를 “전일에 차운한 시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정오 가까이 시를 펼쳐보고서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바로 붓을 잡고 벼루에 먹을 갈아 시를 지었으나 보고 들은 바가 지극히 천박하여 바로 보내지 못한다. (今日尊兄進喜雨詩 文仲善誤聽大君之語以啓曰 次韻前日之詩也 以是近午披覽 不堪驚心 卽秉寸管磨硯 而所見聞至淺 未卽送之)
안부를 듣고서 음주 중에 새콤한 맛이 없어서는 안 되기에 가지고 있던 밀감 80매를 또 떠올렸다. 정자에서 오늘 흥이 나서 시를 짓고 내관 최치돈을 보내 아울러 내 뜻을 보인다. 보내는 기생과 시인은 밤잔치에 머물도록 해서는 안 되니 술을 마신 뒤에 서울로 보내는 것이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다. (安否 酒中不可無酸 以所有柑子八十枚且憶 亭中今日興作詩 遣內官致敦 幷諭予意 所送妓伶詩人 不可留夜宴 飮罷後送京 至可至可)
근래에 가뭄으로 인하여 궁궐 정원의 모임을 오래 그만두어서 천륜의 정이 막혀 애통하고 친한 뜻이 소원하여 슬프다. 그러나 일에는 경중이 있고 [빠짐] 에는 심천이 있다.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니 어찌 형제가 상견하는 일 때문인가? 잔치를 여는 날에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자 하니 옳지 않겠는가? 시로 정을 말한다. (近因旱魃之暵 久停園囿之會 倫情痛隔 親意悲踈 然事有輕重 □有淺深 天縱大旱 豈緣兄弟相見之故哉 欲於淸宴之日 暫會一語 無乃可乎 詩以言情)
이제 그림을 그림에 남방에서 온 물새 두 마리였다. 물새라고 칭한 것은 이름이 가마우지와 갈매기이다. 먼 곳에서 왔으나 길이 잘 들었기 때문에 은어 아홉 마리를 주자 순식간에 삼켜버리니 진실로 물고기를 탐하는 새이다. 그림에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모두 놓아 보냈는데, 가마우지는 못에 풀어주었다. 한바탕 웃고 아울러 시를 짓는다. (今以摸畵 自南方來水鳥二首 稱鳥者 名加亇烏灰者 名蘆未烏者 自遠而來馴甚 故賜食銀魚九尾 頃刻而呑 眞貪魚鳥也 而於畵無用 故兼送 灰鳥放池 一笑倂拙詩)
오늘 수전을 보려고 형의 화려한 정자에 행차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마음이 유쾌함을 알면서도 속마음을 펼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러한 흥취의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겠는가? 오로지 변변찮은 물건으로 작은 정성을 보인다. 또 아래와 같이 물품을 기록하고 겸하여 서툰 시를 짓는다. 상품 비단 1필, 조방양마 1필, 비단철릭 1벌, 목면 50필, 후추 10말, 2장을 붙인 유둔 2부 (今日以觀水戰 幸尊兄之華亭 予心甚有快焉 知所以心快 而不披中情 安知此趣之無盡也歟 聊將薄物用視寸忱云 且錄之如左 兼以拙詩 上品紗一匹 照房良馬一匹 紗帖里一襲 木綿五十匹 胡椒十斗 二張浮油席二浮)
비가 갠 뒤에 옹인이 직무를 수행하여 살곶이에서 붕어를 그물로 잡아 한가한 날에 나에게 한 대야를 올렸다. 내가 우연히 붕어를 살펴보니 모두 죽지 않은 채 입을 벌리고 물을 급급하게 마시려고 하였다. 내가 저절로 붕어를 불쌍하게 여겨 몇 말의 물을 주도록 하자 어릿거리다가 마치 서호의 즐거움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감격하여 형에게 붕어 두 마리를 보내고, 아울러 시를 보내니 심심풀이로 삼았으면 한다. 붕어를 구워서 먹든 삶아서 먹든 형의 뜻대로 하고, 붕어를 풀어서 헤엄치도록 하든지 형의 마음대로 하고 부족한 시를 비웃지 말라. (頃雨後 饔人修職 網中鮒於箭串 薦一盤于閑日 予偶觀其身 皆不死開口 欲吸水之汲汲 予自憐之 俾升數斗之水 圉圉然如西湖之樂 感之送二尾于尊兄 幷詩破寂 炙之烹之 任兄之意 放之泳之 適兄之心 勿笑拙詩)
내가 생각건대 봄이 한 번 가면 꽃이 다시 피지 않고, 사람이 한 번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으니 자연히 바꿀 수 없는 천도이다. 쓸 곳이 있는데도 돈을 간수하는 것은 달인의 지혜가 아니고, 쓸 곳이 없는데도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달인의 검소가 아니다. 옛날에 안자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도 포의를 입자 군자가 옳게 여겼고, 공손홍이 한나라 임금을 보필하면서 무명 이불을 덮었으나 군자가 비난하였다. 포의를 입은 것은 동일하지만 평가가 다른 것은 왜인가? 다른 것이 없고 그 뜻이 정성스러운가 정성스럽지 않은가에 달렸을 뿐이다. 나는 우매하여 들은 바가 지극히 천박하고 본 바가 지극히 경박하여 무식한 시골 사람과 같다. 한마음으로 어머니의 간곡한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학문을 익힌 것이 조잡할 뿐이지만 어찌 허비하며 경박한 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저 사람을 경시했던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다만 정과 뜻이 매우 중하고, 쓰고 남은 것도 넉넉하기 때문에 특별히 우수한 구리 술잔과 하품의 옥 술잔을 제작하였다. ‘백년배’라 이름을 짓고서 형의 장수를 빌고 형의 근심을 깨뜨린다. 겸하여 시를 올리지만 곧바로 화답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予惟春一去兮花不再 人一老兮少不回 自然不易之天道也 有用而守錢非達智 無爲費財非達儉 昔者晏子相齊而布衣 君子是之 孫弘輔漢而布被 君子非之 布則一 而評則異何 無他矯其志之誠不誠耳 予以寡昧 所聞至淺 所見至薄 與無知野人同 一心而但受慈訓丁寧 學問粗習 安可費以受輕儒汍瀾薄彼哉 但以情意深重 用餘亦饒 故特製銅盞之優玉斝之下 名之曰百年 以禱兄壽 以破兄愁 兼呈拙筆 卽度不雕)

또 궁궐에서는 임금과 신하로서의 구분이 엄격하여 형제간의 정분을 다할 수 없으므로 월산대군의 사저나 별장[4]에 자주 들러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며 반드시 가인례(家人禮)[5]를 행하여 형을 예우하였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3살 차이인데 어렸을 때 일찍 아버지 의경세자(덕종)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형제는 궁중에서 조부인 세조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성종과 월산대군의 어머니 수빈 한씨는 타고난 성품이 반듯하면서도 엄격한 사람이였다. 수빈은 학문을 중요시 했을 뿐더러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은 자녀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험담을 듣지않게 하기 위해서 매우 엄격하게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이에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허물과 실수를 보이면 얼굴빛을 바로 하고서, 절대 감싸주거나 봐주지 않고 정색하면서 꾸짖어 바로 잡았으며 더욱 혹독하게 글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에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는 수빈 한씨를 향해 폭빈[6]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엄한 교육열로 월산대군과 성종은 더욱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공부와 놀이를 같이 하였는데, 때로는 학문을 논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둘다 성격도 비슷해 잘 맞았고 시와 학문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이렇게 성종과 월산대군은 형제이면서 서로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

성종은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여서 부친의 얼굴도 모르고 기억도 없는 편모슬하[7]에서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친형인 월산대군을 매우 사랑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잘 따르고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형인 월산대군도 진귀하고 좋은 물건을 얻게 되면 자신보다 동생인 성종에게 주면서 각별하게 챙겼다. 한마디로 월산대군은 성종에게 피를 나눈 단 하나뿐인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이들 형제는 형식적인 우애가 아니라 진심으로 정이 깊었는데, 월산대군이 교외로 사냥을 갈 때에는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과 매사냥을 돕는 좌우패 응사(左右牌鷹師)를 따르게 하였으며 교년(交年)에는 월산대군과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이때 성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서 아뢰라 전교하였고 성현이 왕명을 받들어 교년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朝野無虞日
온 나라는 근심 걱정 없는 날이요
光陰欲盡時
한 해의 세월은 다해 가는 때로다
萬機勞聖慮
만기 중에 많은 생각을 써 오시다가
一夕樂淸嬉
하루 저녁 좋은 놀이를 즐기시네
花映千條李
꽃은 천 가지 오얏나무에 서로 비치고
光舒八彩眉
광채는 팔채의 눈썹에 환히 빛나누나
御廚分玉饌
수라간에서 좋은 음식 나눠 보내고
鈞樂下丹墀
균천광악을 붉은 궁전에 내리시니
貂珥邀三客
초이 착용한 삼객을 맞이해 오고
犀簪列六姬
서잠 꽂은 육희를 줄지어 앉혔네
長歌和羯鼓
긴 노래는 갈고 소리와 어울리고
急管雜繁絲
관현악 소리랑 왁자지껄한 가운데
貫蝨爭穿的
이를 꿰듯이 다투어 과녁을 뚫고
張燈坐鬪棋
등불 환히 밝히고 바둑도 두누나
笑談方繾綣
한창 곡진히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盤飣點參差
음식 쟁반 들쭉날쭉 늘어놓으니
彤橘輝銀椀
붉은 귤은 은쟁반에 휘황찬란하고
金波凸玉巵
금물결은 옥술잔에 철철 넘치네
天高星斗爛
하늘이 높아 별들은 반짝거리고
夜久漏聲遲
밤이 오래매 누각 소리 더디어라
興極渾無寐
흥에 겨워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情深醉不知
정이 깊어 취하는 것도 모르겠네
惟將稽古力
오직 계고의 힘 하나만 가지고
每侍講書帷
매양 강서의 자리에 모시면서
仰荷需雲澤
우러러 수운의 큰 은택을 입고
恒添湛露滋
항상 담로에 흠뻑 젖곤 하노니
毫毛何所補
털끝만큼도 무슨 도움 있었으랴
空賦太平詩
부질없이 태평시나 읊을 뿐이네

심지어 성종은 월산대군이 한양을 떠나서 지방에 머물러 있다가 오랜만에 궁궐안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하기를 "대군이 궁궐에 들어오니 내가 만나 보고 싶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정지하고자 한다." 라고 했을 정도이다.

또 월산대군은 아버지 덕종(의경세자)의 묘를 돌보기 위해 경릉(敬陵)이 있는 고양에 별장 두고 자주 찾았는데 대군이 고양 별장에 갔다는 소식을 성종이 알게 되면 반드시 내관에게 명하여 선온을 가지고 가서 형을 모셨으며 만약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관리들을 보내서 월산대군에게 문안을 드리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종은 낚시를 즐겨 하는 형을 위해 귀한 생선인 웅어[8]나 횟감용으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 많이 서식하는 난지포(難地浦) 일대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를 월산대군에게만 내려 주었으며 민간에서 빙고의 설치 및 운영을 금한다는 국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형에게만 허락하여 월산대군은 양화도(망원동, 합정동)에 사빙고를 설치하였다.

또한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가 혹시 월산대군을 접견(接見)할 때에는 승지가 대면(對面)하여 아뢸 수가 없을 것이다. 또 긴급(緊急)하지 않은 일 이외에는 모두 대면(對面)하여 아뢰도록 하라." 라고 하면서 형과 만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 이때만큼은 정사를 잠시 보지 않겠다 선언하기도 했었다.

또한 성종은 월산대군이 오랫동안 자녀가 없다가 나이 30세가 넘어서 뒤늦게나마 첩과의 사이에서 서자를 얻자, 조카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며 형의 득남을 축하하는 어제시와 함께 잔치를 내렸고 이이(李恞)[9]라는 이름도 친히 지어서 하사였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이후인 1494년(성종 25)에 성종은 이이가 장성하자 아버지 월산대군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 위해서, 그를 월산대군의 서자가 아닌 적자로 인정해주고 덕풍군(德豊君)이라는 군호도 친히 지어주었다. 그리고 병을 앓자 성종은 내의와 약을 보내서 덕풍군을 치료하게 하는 등, 형의 아들을 소중하게 여겨 각별하게 보살펴주었다.

월산대군은 나이 35세가 되던 1488년(성종19)부터 점차 병약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젊은 나이인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30세가 넘어가면서 매년마다 조금씩 하얗게 세어졌던 머리카락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양쪽 귀옆머리가 모두 다 세어버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백발이 되어버렸고 한때는 한양을 벗어나서 지방으로 나아가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도 이제는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전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앓고 있던 지병에 또 새로운 병이 생겨 월산대군은 고양 별장에서 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였는데 성종은 형이 걱정이 되어 매양 중관을 보내서 직접 쓴 어제시와 편지 그리고 각종 물품들과 치료 약을 가지고 가서 월산대군에게 대신 문병하게 하고 왕실 내의원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나이가 60살이 넘은 의술에 정통하고 침구가 뛰어난 내의 차맹강(車孟康)을 보내서 월산대군을 전담하여 시약하게 해서 치료하게 하였는데 형의 병환에 차도가 있자 성종은 매우 기뻐하여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맹강을 특별히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 대부를 제수하였다.

하지만 12월에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을 밤낮으로 극진히 간호하던 월산대군이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병이 점점 더 심해지자 성종이 깊이 걱정하여 월산대군 집에 군졸을 배치해서 수호하게 하고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며 날마다 중관을 보내어 문병하였는데 좋은 약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내려서 전하는 인편이 길에 끊이지 않고 잇따랐다. 또 왕의 신분이라 병구완을 친히 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형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주고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월산대군이 눈과 시를 좋아하니 가져다주려고 여러 신하들에게 눈(雪), 설청가회(雪晴嘉會)의 제목을 내리고서 "비록 문신(文臣)이 아니더라도 능히 글을 지을 이가 있으면 모두 지으라." 전교하였으며, 성종 본인도 형을 생각하는 진실된 마음을 담은 굉장히 긴 시를 친히 지어서 월산대군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憶疇勝絶當時泰
절묘하게 태평했던 당시를 생각하니
無事還堪發興長
일이 없어 도리어 흥취가 길었네
不邇經營趨競俗
경영을 멀리한 채 시속을 따랐고
更遐羈束負喧郞
속박을 멀리하여 소란함을 등졌네
羲和已識天成用
희화는 하늘의 운행을 벌써 알았는데
水土方知地厚常
수토가 땅에서 상도임을 이제 알았네
天地中間人最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彛倫此處道爲臧
여기에서 떳떳한 도리로 선을 행했네
曾聞人事如蟣蝨
인사가 서캐 같다고 일찍이 들었는데
始信功名似蠅蝗
공명이 파리 같음을 비로소 믿었네
萬卷群書螢雪誦
만 권의 책들은 형설로 암송하고
十年燈火蠹魚攘
십 년 등불로 독서하여 좀을 물리쳤네
波瀾虛盪春江岸
물결이 봄 강 언덕에 헛되이 부딪히고
崖蜜空流白玉堂
석청이 백옥당에 공연히 흘렀네
自敗秋蘭寒雨裏
찬비에 가을 난초 저절로 시들고
多衰野菊夜霜傍
밤 서리에 들국화가 많이도 상했네
廟堂幾許稷皐策
조정에서 얼마나 직고의 계책 올렸나
翰墨誰追班馬香
문단에서 누가 반마의 향기 따랐나
李杜文章無比櫛
이두의 문장과 견줄 수 없었고
蘇黃才思少相當
소황의 재주를 감당할 수 없었네
忘情榮辱仁人趣
영욕을 잊음이 어진 이의 운치이고
樂任窮通智者腸
궁통을 즐김이 지자(智者)의 마음이었네
所說可煩猶自噤
말한 바가 번거로워 스스로 입 다물고
攸懷聊叙庶能張
품은 바를 서술하니 거의 펼칠 만했네
有花荊樹盤行引
꽃이 핀 형수가 구불구불 뻗었고
無價天倫委曲彰
값이 없는 천륜이 곡진하게 빛났네
否隔每憐曹植表
불통을 표현한 조식을 매번 슬퍼했고
忍殘長歎厲王傷
잔인하게 해친 여왕을 오래 탄식했네
牽持愛篤雲天薄
애독을 견지하나 하늘이 박정했고
斗斛期襟契濶疆
두곡을 기대하나 고생이 끝없었네
滄海栴檀僧不棄
중들이 창해의 전단수를 버리지 않았는데
五陵豪貴我何忘
내가 어찌 오릉의 부호들을 잊었으랴
香廚豈憶雕胡滑
어찌 부엌에서 부드러운 조호반을 생각했으랴
玉椀盛漿錦帶芳
옥완에 죽을 담고 순챗국이 향긋했네
氷置玉壺泉一勺
옥호에 얼음 넣으니 한 국자의 샘물이고
氣纏秋月色長光
가을 달이 떠오르니 달빛이 길었네
絶儔符采眞無敵
시문이 짝이 없어 진실로 무적이고
少匹聰明孰並行
총명이 짝이 없으니 누가 나란히 갔나
金距鬪鷄思漢苑
금 발톱의 투계는 한나라 궁궐을 생각했고
玉鞭騎馬入宮墻
옥 채찍의 기마가 궁궐로 들어갔네
紛飛颺雨驚泥燕
흩뿌리는 폭우에 진흙 문 제비가 놀라고
山滿尺童驅牧羊
산 가득한 목동이 치던 양을 몰고 갔네
逆聽春鶯工逬淚
꾀꼬리 소리 듣고 교묘하여 눈물 흘렸고
顧欣花萼巧施粧
꽃들이 활짝 피어 공교롭게 단장했네
題咏長懷江左逸
시를 지음에 강좌의 표일을 오래 품었고
爲文多病鄴中狂
문을 지음에 업중의 광달을 병통으로 여겼네
服膺不失拳拳意
가슴에 깊이 새겨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咂鬢何勞撲撲量
어찌 머리를 뜯고 가슴 치며 애썼으랴
心緖如膠寧吝匱
마음이 아교 같으니 함의 보물 어찌 아끼랴
步蛙容易兀稱觴
팔짝팔짝 쉽게 가서 높이 잔을 올렸네
河間經術江湖大
하간은 경술이 강호처럼 위대하고
子建詞篇霹靂忙
자건은 시편이 벽력처럼 내달렸네
欲學背肩非嗜舊
어깨 맞대고 배우면서 벗과 즐기지 않았는데
安知兄弟鑑興亡
형제가 흥망을 경계할 줄 어찌 알았으랴
雨知天意難諶問
비 내릴 줄 아는 하늘 뜻은 정말 묻기 어렵고
贏得人情易作瘡
이익 구하는 인정은 상처를 쉽게 받네
在澗考槃誠不羨
냇가에서 소요함이 진실로 부럽지 않고
與君湛露正無償
형과 밤이슬에 술 마심은 정말로 보상 없네
軒墀寵鶴將墟衛
수레 타고 총애 받던 학도 위나라 땅에 묻혔고
禁掖尊親寔軼唐
궁중에서 어버이 높인 일이 당나라에서 사라졌네
棲鳳自何疑鎩翮
오동에 사는 봉이 어찌 화살 맞을까 의심하랴
臥麟安得畏迷蹡
들판에 누운 기린이 어찌 비틀거릴까 겁내랴
甲第厭飡龍鳳餠
좋은 집에서 용봉병을 실컷 먹었고
芳腰宜佩紫羅囊
예쁜 허리에 자라낭을 의당 찼었네
璵璠絶價崑崙極
여번은 곤륜산 옥보다 값이 비쌌고
風味全和錦瑟旁
풍모는 금슬 타는 가인 옆에서 화락했네
鴻鴈影來遲彩席
기러기가 돌아올 때 잔치에 더디 왔고
鶺鴒飛急到春浪
할미새가 급히 날 때 봄 물결에 갔었네
金尊泛蟻葡萄熟
포도가 익을 때 술통에 개미 거품 떴고
秋圃採香苜蓿荒
목숙이 시들 때 밭에서 국화를 땄네
處貴自嫌如白屋
귀한 곳을 꺼려서 초가에 사는 듯했고
包華還冷撥寒塘
화려함을 냉소하며 찬 연못을 경영했네
茅亭雪岸叢梅白
모정의 눈 내린 언덕에 매화가 희게 피고
宮苑春溪御柳黃
궁원의 봄이 온 시내에 버들잎이 노랗네
加禮崇惟徐孺榻
예를 더해 서유자의 탑상처럼 높였고
題詩驚岌謝公章
시를 지음에 사공의 시와 같아 놀랐네
龍鍾不是安貧所
못난 내가 안빈낙도할 곳이 아니지만
湛樂深知洛醉場
화락하여 서울에서 술 마실 곳임을 깊이 아네
堪笑神仙燒藥竈
신선들이 선약 다리는 부엌을 비웃었고
自多身世沐恩莊
신세가 임금 은혜 입은 것을 자랑했네
大夫皎潔□機重
대부가 깨끗하면 [빠짐] 업무가 막중하고
兒女安閑細媚良
아녀자가 한가하면 꾸밈이 우수하네
半夜隋珠今我□
한밤중의 수주에 이제 나는 [빠짐]
臺邊燕石昔人猖
오대 옆의 연석에 옛사람이 미쳤었네
承歡頻接南薰殿
기쁘게 남훈전에서 자주 접하고
帶暮徐過敎樂坊
저녁에 교악방을 천천히 들렀네
仙李蟠根繁玉葉
선리가 뿌리내려 옥엽이 번성하고
海桑綿祉擬金湯
부상에 복이 이어져 금성탕지에 비겼네
知兄每喜無憂日
형이 근심 없어 매번 기뻤지만
顧己長慙寡德王
나는 덕이 없어 오래도록 부끄러웠네
欲罷不能宣側佇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어 갈망하였고
却將無盡步踉䠙
도리어 끝이 없어 걸음이 비틀거렸네
淺深莫得飜離間
정이 깊어 떨어진 동안에 바뀌지 않았고
臨履何爲抵咎殃
조심하니 어찌하여 재앙에 이르렀으랴
風雨寒山佳桂樹
비바람에 차가운 산에는 계수나무가 아름답고
衣裳高處整秋霜
높은 곳의 단풍이 가을 서리에 정연했네
沈淪勳業增文采
공업이 영락하여 문장을 증가시켰고
偃息山林惡自强
산림에서 쉬면서 자강불식하였네
玉斝解愁傾琥珀
시름 풀며 옥 술잔에 호박주 기울였고
金盤酬謔薦檳榔
농담하며 금 소반에 야자열매 올렸네
蹉跎白日忽如擲
세상에서 불운하여 갑자기 내던졌고
寥落胸中明不佯
마음이 쓸쓸해도 방황하지 않았네
學貫天人何灑落
학문이 천리 인사 꿰뚫어 무척 쇄락하고
情窮造化不荒凉
정은 조화를 다하여 황량하지 않았네
畢竟斯時無限樂
마침내 지금은 무한히 즐거운데
了然當日有誰防
분명히 당일에 누가 방해했으랴
璿源獨立提庸道
왕실에서 독립하여 중용의 도 잡았고
戚里威儀有義方
왕족의 위엄 보여 의로운 도리 있었네
兩不猜疑如見肺
두 사람이 폐부를 보여주듯 의심하지 않았고
初無技癢久聞痒
애당초 기양이 없는데도 오래 병을 앓았네
一代風流誰是主
한 시대의 풍류는 누가 주인이었나
三朝宗室共如倀
종실로서 세 조정에서 분주히 함께했네
朝來紫陌鳴金騕
아침에 도성 거리에 준마가 울었고
暮入靑門響玉鉠
저녁에 청문에서 옥 방울을 울렸네
合沓濃恩猶可勝
큰 은혜가 중첩해도 오히려 견뎠는데
慇懃孤臆也何遑
은근히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황급할까
秉心不過存惺法
마음가짐이 성성법을 보존함에 불과하니
爲政那踰迪吉康
정치가 어찌 편안히 인도함에서 벗어나랴
今日不圖逢此歲
오늘 뜻하지 않게 이 해를 만났는데
一方愁在白衣鄕
한 나라의 근심은 평민의 마을에 있네

5. 월산대군 사후

이러한 성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산대군은 그해 12월 21일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의 갑작스런 죽음에 친동생인 성종은 "창자가 찢기는 듯이 슬프고 애통하다."라고 했을 정도로, 스스로 견디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아서 울부짖으며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죽어서까지 성종에게 짐이 안되려고 "내가 죽어서 묘가 남쪽(궁궐)으로 향해 있으면 성상께서 부담을 가질 것이다.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말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하게 살기를 바라니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10]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기 열흘 전에 친히 형의 집으로 거둥하여 병문안을 했는데 다음날까지 오랫동안 월산대군 곁에 머무르는 바람에 정무를 돌보지 못하여 성종실록 1488년(성종19) 12월 13일 기사 내용이 없다. 이후에 성종은 월산대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가보려고 거가를 대령하게 하고서 차비를 하고 있던 중 내관이 달려와 이미 대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몹시 놀라서 당장 가보려고 재촉하였는데 때마침 그러한 성종의 거둥을 말리는 인수대비의 전교를 받고 어머니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매년 1월1일에 열리는 정조(正朝)의 하례를 정지하게 하였으며 성종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수라도 거르면서 식음을 전폐했고 화산대도 파했으며 왕의 거둥시 울리는 고취(鼓吹)까지 폐지시켰다. 오랫동안 조회나 경연에 나가지 않아 조정일을 돌보지 않을만큼 힘들어 했으며 애통하고 마음이 아파서 결국 작은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병석에 눕게 된 성종에게 신하들이 문안을 와서 슬픔을 억제하고 수라와 육선 들기를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으며 전교하기를,
"나의 이 증세는 본래부터 있었는데 마음이 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지난번 자위(慈闈)께서 편찮으시자 침식(寢食)을 편히 못한 것이 오래였는데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거의 평복됨을 얻었었다. 이제 또 형님의 상화(喪禍)를 만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한갓 울부짖을 뿐인데, 이로 인해 작은 병을 얻은 것이고 별로 다른 증세는 없다."
"나는 다른 증세는 없고 다만 마음이 상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뿐이다. 다만 생각하건대, 대비께서 편찮으시다가 평복되신 지 오래 되지 아니하였는데 대군(大君)의 일로써 진선하지 아니하시니, 마음이 아프고 망극하다. 여러 번 진선하기를 청하였던 바, 비록 청한 바에 따르신다고는 하나 진어하는 바가 심히 적으시니, 내가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나는 백성의 임금이므로 필부(匹夫)와 같지 아니한데, 어찌 대의(大義)를 헤아리지 아니하고서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하늘이 나를 돕지 아니하여 하나인 형님을 일찍 잃게 된 것을 슬퍼할 뿐이다. 어찌하여 대비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겠는가? 경 등이 대비께 진선하시도록 청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대군(大君)이 병이 위독하자 내가 가서 보고자 하였으나 대비께서 말리시므로 자지(慈旨)를 어기기 어려워서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미 영결(永訣)하였으니,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어제 의정부에서 진선(進膳)하기를 청하였고 또 자지(慈旨)를 받들어서 이미 진선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고기를 먹은 뒤에야 밥을 먹었다고 하겠는가? 형제의 정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으며, 하물며 형님의 몸이 식지 아니하였는데 갑자기 좋은 반찬을 먹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눈물이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겠다. 내가 친히 대비전에 나아가서 육선(肉膳)을 진어하시기를 권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작은 병에 걸려서 아마도 일어나서 가기가 어려울 듯하다. 만약 병이 낫기를 기다린다면 또한 늦어질 것이니, 경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대비전에 나아가서 아뢰어 청하는 것이 사체에 마땅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월산대군 사후 성종은 형의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호조에 전교하기를 "졸(卒)한 월산대군 이정에게 3년을 한하여 녹봉(祿俸)을 주라." 하였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간 닫았으며[11] 동부승지를 보내서 형의 상사(喪事)를 살피게 하였다. 또 부의를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더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품질이 제일 좋은 상등의 물품으로 준비하여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그리고 월산대군이 어린 두 명의 서자들만 남겨 놓고 적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형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부림군의 장남인 회안부정(淮安副正)[12]으로 하여금 대군의 상사(喪事)를 주관하게 하였고 장례 이후에도 제전(祭奠)을 받들도록 배려하였으며[13] 도승지 송영(宋瑛)을 보내어 월산대군 빈소에 치전하였고 우의정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지를 가려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에 있는 월산대군의 별장 서쪽으로 정하면서 형의 장례와 제사에 정성을 다했으며 시호를 봉상시에서 공간(恭簡)으로 논의했으나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자신이 직접 지어서 내렸다.[14]

월산대군 묘역 조성 당시 장지의 규모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친 1품 이상 장지는 백보로 명시되어 있는데 월산대군의 장지 규모가 4백 20보 정도로 명시된 제도보다 지나치게 넓어 사헌부에서 문제가 있다며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성종은 "장지(葬地)를 고르는 것은 유래한 바가 오래인데, 어찌 한두 무덤을 옮기는 것을 염려하여 대군의 장례를 보통 사람과 같이 하겠는가?" 라고 전교하며 특별히 어머니 인수대비의 사촌 오빠인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겨 감독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종의 애틋한 마음이 오롯이 배어 있는 월산대군묘는 시원하게 트인 전망과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규모도 왕릉 버금가게 장엄하며 봉분이나 석물들이 다른 왕자묘에 비해 매우 크고 조각이 섬세한 편이다. 후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도굴이나 훼손이 되지 않았고 묘역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대군묘의 대표적인 예이다. 1986년 경기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1489년(성종20) 3월 2일에 성종은 백관에게 특지를 내려 거애(擧哀)하고 회장(會葬)[15]하게 한 가운데 국장 버금가게 예장(禮葬)으로 고양에 장례를 치렀는데 이때 성종은 주서 김숙향(金叔響)에게 명하여 장례 일을 가서 살피게 하였고 9일에는 좌승지 이계남(李季男)을 보내서 월산대군묘에 치제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거의 1년간 공식적인 제사나 행사 때 연주되는 음악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음악을 듣지 않았으며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도 형이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에 처음으로 행할 만큼 월산대군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또 형의 3년 상을 치른 후에 1491년(성종22) 2월20일 월산대군의 우제(虞祭)에 우승지 허침(許琛)을 보내어 홍제원에서 치제하게 하였다.

성종은 당대에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임사홍을 불러 형의 신도비 비명을 짓게 하고 월산대군이 생전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서 문장이 뛰어난 신하들에게 명하여 서문을 짓게 하고 풍월정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 화원에게 월산대군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초상화를 보면서 느낀 감상을 시와 문장으로 적은 초상찬을 성종이 친히 짓기도 했으며 완성된 초상화를 보면서 성종은 형을 매우 그리워 했다고 한다.

또한 월산대군의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3년상을 치른 후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근처에 흥복사(興福寺)라는 큰절을 창건할때 불교를 배척하고 존숭(尊崇)[16]하지 않았던 성종이었지만 흥복사는 일반 사찰이 아닌 월산대군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의 역할도 겸한 원찰이었기에 형과 과부가 된 형수를 위해서 사찰 건립에 필요한 물자와 재정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는데 신하들이 이를 문제 삼아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월산대군(月山大君) 묘소(墓所)에 동철(銅鐵)·채색(采色)·촉랍(燭蠟) 등 잡물(雜物)을 많이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동철과 채색은 모두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타국(他國)에서 무역하여 쓰는데, 더구나 상장(喪葬)에는 쓸데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대군의 부인이 사찰(寺刹)을 창건하려고 그러한 것입니다. 청컨대 금지하소서."
"전하께서는 민력(民力)을 손상시키는 것을 중하게 여기시어 영선(營繕)이 지나치지 않았으며, 한 번 가뭄을 만나자 곧바로 줄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묘(墓)에 큰 절을 창건(創建)하여 역도(役徒)가 수백 명이나 되는데 공적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서, 국가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서 비용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사찰(寺刹)을 짓는 것이 과연 명복(冥福)이 있다면 성상께서 우애(友愛)하시는 정으로 마땅히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을 것이나, 결단코 유익한 바가 없는데 동철(銅鐵)과 채색(采色)을 내려 주신 것이 적지 않습니다. 또 대군(大君)의 부인(夫人)이 영안도(永安道) 여러 고을에 곡식을 바치고 경기(京畿) 고을 군자 미곡(軍資米穀)을 바꾸어 받았고, 또 듣건대 충청도에 전지(傳旨)를 내려 대군의 집안에서 재목을 베는 것을 금하지 말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 절은 비록 대군의 부인이 짓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에서 준비하는 힘이 진실로 많습니다. 성상께서 평상시 의논은 불씨(佛氏)를 가혹하게 배척하고 성도(聖道)를 존숭하셨는데, 이번에는 금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실로 도와서 이루게 하시니, 신은 진실로 실망됩니다."

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이 일은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며 신하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형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특별히 녹봉을 계속 지급했고 많은 물품들을 하사하며 예우하였다. 그리고 월산대군을 기리는 마음에 성종은 두번 다시 망원정(望遠亭)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의 애통한 마음은 이에 그치지 않고 1492년(성종23) 월산대군의 처남이었던 박원종을 특지를 내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 배경에는 월산대군이 정실 승평부대부인 사이에서 적자는 없었고 서자인 늦둥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서자가 태어나기 전에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이 처남인 박원종을 아들 대하듯 총애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성종이 박원종의 나이가 20대로 젊은축에 속했고 무관 출신이어서 승지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월산대군을 생각해서 박원종을 전격 발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신하들의 반대가 심해 박원종이 동부승지를 사직하겠다고 청하자 성종이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글을 배우라며 선생까지 붙여주면서 배려하였다. 성종은 박원종을 월산대군의 피붙이라 생각하고 곁에 두고서 아꼈다고 한다.이게 수십년 후 미친 복선으로 흐르게 된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형을 늘 그리워했는데 특히 대군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사경에 산이 달을 토해 내니 미명에 물이 누각을 환히 비추는구나(四更山吐月 殘夜水明樓)와 옥당영월(玉堂詠月) 등 유독 월(月)이 들어간 시귀와 제목을 내리고서 신하들로 하여금 율시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사무치게 그리운 형을 생각하며 시 한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鶴唳庭松
뜰의 소나무에서 우는 학
胎化神區去幾年
태생하여 선경으로 떠난 지 몇 년인가
冲天警露是禽仙
학이 이슬을 경계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네
昻藏自有林溪態
기상이 뛰어나 숲 속 자태 절로 있고
飮啄都忘歲月遷
먹고 마시며 흐르는 세월을 온통 잊었네
華表一歸悲世變
화표주에 돌아와 변한 세상 슬퍼했고
九臯淸唳屬時蹁
구고에서 학이 맑게 울어 춤출 때에 속하네
庭松偃亞淸陰處
뜰에 솔이 드리워져 그늘이 진 곳에서
縮頸閑眠待月絃
목 움츠리고 잠자며 반달을 기다리네

평생동안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애는 매우 깊었고 이를 두고서 후세에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도 알려져 두고두고 칭송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두 형제의 우애에 대한 일화 중에서 하나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탁은 돌아가는 길에 한강을 건너 10여리를 가다가 냇가 모래밭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었다. 월산대군도 휴가를 얻어 남도 여행을 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내려 냇가에 이탁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점심을 은그릇에 담아 내왔는데 이탁이 은그릇을 손에 쥐고 두루 살펴보다가 도로 소반 위에 놓자 대군이 말하였다. “자네 그 그릇을 가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줌세." 이탁이 웃으며 말하였다. “제 평생에 일찍이 은그릇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라 구경했을 뿐입니다. 어찌 선비 대접을 그리 야박하게 하십니까?” 하고는 헤어져서 갔다.

월산대군은 바로 성종의 친형이었다. 그날 성종은 제천정까지 거둥하여 대군을 맞이하였는데 월산대군의 손을 잡고 맞으며 성종이 “여기저기 힘든 곳을 다니시느라 피로하시지는 않으신지요? 오래 뵙지 못해서 마음이 매우 울적했습니다.”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인재는 나라의 으뜸가는 기운입니다. 형님께서는 여기저기 장거에 두고 찾아보셨는지요?” “이미 성상의 하교하심을 받들었사온데 어찌 감히 소홀히 했겠사옵니까?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찾아보았사오나 만나지를 못하다가 아까 길가에서 어떤 선비 한 사람을 만났사온데 그야말로 기이한 선비였사옵니다.” 하고는 이탁과 주고받은 말을 성종에게 아뢰었다.

성종은 기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즉시 내사복시에 명하여 쫓아가 그를 데려오게 하였는데 성종은 이탁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뒤에 매우 기뻐하며 즉시 홍문관 수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탁은 품계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다가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국역기문총화(國譯紀聞叢話), 제405화 내용中

월산대군은 왕의 형이란 지위를 내세워 얼마든지 세도를 부릴 수 있었지만 동생의 예우에 대해 겸덕으로 답하였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서 왕위에 있는 동생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조정의 언관들은 성종의 지나친 월산대군 사랑에 대해서 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월산대군의 행실에 대해 비난한 적은 없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그 형에 그 아우였다. 형은 최선을 다해 종친으로 살았고, 동생은 최선을 다해 국왕으로 살았기에 성군(聖君)의 명성을 얻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믿을 수 있는 벗이였으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속마음도 편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진정한 형제지기(兄弟知己)[17]였다. 왕이 된 동생과 그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형. 그러나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피를 나눈 형제애이다. 못할 것 없는 권력의 유혹도 끝내 어쩌지 못한 것이 바로 형제이면서도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성종과 월산대군의 아름다운 우애였다.
어제(御製)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에 거둥하였더니, 대군이 정자(亭子)를 짓고서 명명(命名)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풍월(風月)로써 이름을 짓고, 또 이 시를 지었더니, 대군이 이미 현판을 걸고서 화운(和韻)하는 자가 없는 것을 한(恨)하니, 모든 승지(承旨)는 각각 화운(和韻)하여 올리라." 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 상서(上書)하여 다시 풍월정(風月亭)의 시(詩)를 내려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 글을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풍월정을 지었는데 감히 시(詩)로 쓴 것이 아니나 척령(鶺鴒)의 생각을 다 읊었을 뿐이었다. 대간(臺諫)들이 시(詩)를 짓는 잘못을 말하였기 때문에 명하여 이를 없애버렸다. 지금 이 글을 보니, 형제 사이의 좋은 정의를 능히 스스로 금할 수가 없다. 마땅히 다시 잘 써서 보내야겠다." 하였다.

성종은 형인 월산대군과 시를 많이 주고 받았는데 알려진 시 만해도 엄청 많지만 이중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가 느껴지는 동생이 형을 위해 지은 시 몇수만 소개한다.
問兄何事送羲娥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遐想洋琴與渭歌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期會親戚 聘招佳妓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義雖君臣 恩則兄弟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만 은혜는 곧 형제이다
新苽初嚼水精寒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兄弟親情忍獨看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此日兄何去
오늘형은 어디로 가는가
秋風霜更淸
가을바람에 서리가 더욱 맑네
知鴻不失伍
기러기가 줄을 잃지 않으니
可以識我情
내 마음을 알았으면 하네
淸秋節欲晩
맑은 가을의 절기가 늦어지는데
楓葉幾日紅
단풍잎은 몇 날이나 붉었던가
離夏蟬聲匝
여름 지나 매미 소리 두루 들리고
依籬菊蘂濃
울에 기댄 국화꽃이 진하네
尊兄今却疾
형이 이제 도리어 병이 나서
惟弟政深衷
동생은 정말로 속으로 걱정하네
調護無疑日
조섭하여 병이 다 나은 날에
相歡後苑中
후원에서 서로 만나 기뻐하세
斜陽暎屋角
석양이 집 모퉁이 비추는데
夏日正濃濃
여름 해가 정말로 뜨겁네
樹裏鶯嬌韻
숲 속에서 꾀꼬리가 곱게 울고
階頭花滿紅
섬돌 위에 꽃이 가득 붉구나
氷梨兼旨酒
노인이 맛난 술을 겸하고
團月灑薰風
둥근 달빛이 훈풍에 쏟아지네
閑樂誰相及
한가한 즐거움을 누가 미치랴
今知大醉翁
크게 취한 늙은이가 지금 아네
病摺多愁思
병이 겹쳐 시름이 많은데
氈簾僅捲開
전렴을 겨우 걷고 내리네
撒成雲葉下
흩어져서 구름이 내려오고
旋撲玉塵回
휘몰아쳐 눈송이가 선회하네
灞岸千條柳
패수 언덕에 천 그루 버드나무
梁園幾樹梅
양원에는 몇 그루 매화가 있었나
東風無巧意
동풍이 공교로운 마음 없어
吹入太虛來
바람 불어 허공에서 내려오네
春歸愁思起
봄이 가서 근심이 일어나는데
花落有新聲
꽃이 지자 꽃 파는 소리 나네
爲厭紅裙醉
물리도록 붉은 꽃에 취하고
期忘白髮驚
잊으려도 백발에 놀라네
擔枝來夢幻
가지를 메는 일이 꿈속에 들어오고
拾蘂賴晴明
꽃을 줍는 일은 맑은 날에 의지하네
正値風兼雨
정말로 비바람을 만났으니
功名一銖輕
공명은 일수전처럼 가볍네
簡藏鹿尾腹
사슴의 배 속에 편지를 넣었는데
豈是秘書謨
어찌 비서의 계책이랴
所以今日術
오늘 이 방법을 썼지만
徒然意衷無
헛되이 의중에는 없었네
兄應知食物
형은 음식을 알고 있으니
奚暇健奴呼
어느 겨를에 건장한 종을 부르랴
與其鬱不暢
울적하여 펼치지 못하는 것보다
寧若淸讌娛
차라리 잔치 열어 즐기리라
夜砌蛩響急
밤 섬돌에 귀뚜라미 소리가 빠르고
高枝蟪聲癯
높은 가지에 쓰르라미 소리가 약하네
節序三秋好
계절은 늦가을이 좋으니
雲物此時腴
풍경이 이때에 풍성하네
近約勞身事
근래에 힘든 일을 줄여서
悤悤更怡愉
허둥대다 다시금 기쁘네
想今如夢幻
생각건대 지금은 꿈 같으니
何忍心踟躕
어찌 차마 마음을 머뭇거리랴
題句自慙拙
시가 서툴러서 부끄럽지만
然非富醇儒
풍부한 순유는 아니네
明朝如有意
내일 아침에 마음이 있다면
携春須一壺
봄 술 한 병을 들고 오라
相對山茶手自裁
손수 심은 산다화를 마주하니
雨中如火一枝開
빗속에 불꽃처럼 한 가지 피었네
分明有意兄知否
분명히 마음 있는 것을 형은 아는가
欲暎天晴携酒來
하늘에 비가 개면 술을 들고 오리라
何心不覺年華晩
어찌하여 봄이 저무는 것도 알지 못했나
自聘姸姿秋日開
고운 모습 불러서 가을에 꽃이 피네
應是爲予深寂寞
나 때문에 응당 매우 적막하리니
與兄相玩泛金杯
형과 함께 즐기면서 금 술잔을 띄우리라
山北山南錦雉飛
북쪽 산과 남쪽 산에 꿩들이 나는데
非渠何以致朱扉
네가 아니면 어떻게 좋은 집에 잡아 올까
頑雲氷雪春無力
먹구름과 빙설도 봄에는 무력하니
更副兄心空不歸
형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네
妙年得慶良可驚
묘년에 경사 얻어 진실로 놀랐는데
微兄誰識弟深情
형이 아니면 아우의 깊은 정을 누가 알랴
聯茵相對竢有日
자리 깔고 마주할 날이 오길 기다리고
談笑自應肝膽傾
담소하며 마땅히 속마음을 터놓으리라
宮壺催箭曉鷄鳴
궁궐 시간 빨리 가서 새벽닭이 우는데
憑檻沈吟感慨聲
난간에 기대 감개의 소리 내며 시를 읊네
花露濕衣烟一炷
꽃에 내린 이슬이 옷을 적셔 등불 켜니
杯中兩得有心情
술잔 속에 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네
半成拙句羞猶改
시를 반쯤 짓다가 부끄러워 고치고
一失佳辰悔莫追
좋은 때를 놓쳐서 후회해도 소용없네
招得撫琴兄破寂
형은 심심풀이로 불러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期知讀易我啣疲
나는 피곤한 몸으로 주역을 읽으려네
山雲匹練樓前度
흰 비단 같은 산 구름이 누각 앞을 지나가고
樹葉錦裁階下來
붉은 비단 같은 나뭇잎이 섬돌 앞으로 날아오네
無限秋光何處送
무한한 가을 풍경을 어디에서 보내오는가
夕陽兄醉綠尊開
석양에 술통 열고 형과 술에 취하리라
況是時節正東風
게다가 계절도 봄바람이 불 때여서
紅白花開春雨濛
붉고 흰 꽃들이 봄 가랑비에 피었네
皇華竢儀東歸後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돌아가길 기다려
與兄典禮遵周隆
형과 함께 융숭한 주나라의 전례에 따라
絃歌擬聽□無窮
풍악을 울리며 [빠짐] 끝없이 즐기리라
予有一兄無寂寞
나에게 형이 있어 쓸쓸하지 않은데
日論三德更溫純
날마다 삼덕 논하고 또 온순하네
慇懃自不堪情重
은근히 중한 정을 감당할 수 없거니와
詩句何從寫意眞
시구는 어디에서 진의를 표현할까
故製蓮杯無所吝
일부러 연배 만들어 아끼는 바 없는데
待看宮苑泛靑春
궁원에서 봄날에 띄우기를 기대하네
殿閣微凉日半斜
해가 반쯤 기울어 전각이 시원한데
靜然危坐截紛挐
조용히 앉아서 번잡한 생각을 끊네
非空不是參禪意
비공은 참선의 참뜻이 아니고
對晩聊成解慍嗟
저물녘에 오로지 분노를 해소하네
花賞金錢貧欲濟
금전화를 감상하며 빈곤함을 벗어나고
酒斟紅露醉知涯
홍로주를 마시며 취한 채 살아가네
憶兄汗透羅衣滴
형의 땀이 비단옷에 스며서 흐를 텐데
御暑流涎莫此加
더위 막느라 침 흘림을 더하지 말라
梅雨初晴景倍嘉
매우가 막 개자 풍경이 배나 좋고
華亭春日錦烟霞
봄날 정자에 안개 노을이 비단 같네
閑多自覺登臨數
한가하여 정자에 자주 오름 알겠는데
目極還驚望遠賒
응시하니 망원정이 멀어서 놀라네
樂許佳賓分半席
즐겁게도 좋은 손님이 자리에 나눠 앉고
靜饒飛鷺占平沙
조용히 날던 백로가 백사장을 차지하리
知兄此處吟情豁
형은 여기에서 시정이 활달함을 알겠거니
故送宮壺一醉華
일부러 궁궐 술을 보내어 취하게 하네
病餘愁思逐閑生
병 뒤에 시름겨워 한가한 삶 따르니
炎赫隆隆麥未榮
불볕더위 성대하여 보리가 피지 않았네
樑燕啣泥粘却落
들보 제비가 진흙 물어 붙이려다 떨어지고
宮鶯如響聽非聲
궁궐 꾀꼬리가 울어도 그 소리가 아니네
沈沈晝景烘如火
무더운 대낮은 불처럼 뜨겁고
寂寂低軒念在兄
고요한 난간에서 형님을 생각하네
何日天瓢傾數夕
어느 날에 하늘 바가지를 며칠 기울여서
一催檀板共金觥
단판을 치면서 술을 함께 마실까
華亭落落與雲平
정자가 높아서 구름과 평평한데
檻外澄江一泒橫
난간 너머 맑은 강이 비스듬히 흐르네
芳草連天春雨綠
고운 풀이 하늘에 닿아 봄비에 푸르고
翠巒浮地海風淸
푸른 산이 땅에 떠서 해풍이 시원하네
楚雲萬里侵軒繞
만 리의 초나라 구름이 난간에 들이치고
吳樹千重入座明
천 겹의 오나라 나무가 자리에 들어오네
遙憶兄懷不盡興
형의 회포 생각하니 흥이 다하지 않아
更驅歌妓起纖聲
가기에게 말 몰아 노랫소리 일어나리
我得蒼鷹毛骨淸
푸른 매를 얻으니 모습이 깨끗한데
一飛千野衆禽驚
온 들판을 한 번 날면 새들이 놀라네
韝邊萬里心先發
토시에서 만 리 나는 마음이 먼저 일고
呼處多能氣自呈
부르면 능력 많아 기운 절로 솟아나네
却憶尊兄開別墅
형님이 별장을 지은 것을 생각하니
深知錦雉送春聲
꿩들이 봄 보내며 우는 것을 알겠네
纖纖雨霽花明日
부슬부슬 비가 개어 꽃들이 선명한데
應不忘吾選貺情
내가 가려 선물을 보낸 정을 잊지 않으리
風攬碧霄氣轉嚴
바람이 하늘에서 불어 날씨가 추워지고
六花飄亂半堆鹽
어지럽게 눈이 날려 소금이 쌓인 듯하네
粧成宮苑梅千樹
궁궐의 천 그루 매화를 단장하고
蕩漾雕欄玉四簷
난간 위의 네 처마에 눈발이 일렁이네
鷄誤曉來三搏翼
닭들이 새벽 온 줄 잘못 알아 날개를 치고
雀驚枝折數回瞻
참새들이 가지 꺾여 놀라서 자주 돌아보네
憶兄家興有堪樂
생각건대 형의 집에 즐거움이 있으리니
低唱淺斟心不厭
노래하고 술 마시며 싫어하지 않으리라
憶兄酒後思新橘
술 마신 뒤 형이 떠올라 새 귤을 생각하니
始得猶酸色未黃
처음에 시큼하니 누렇게 익지 않았네
的皪豈同桃李子
빛깔 선명하니 어찌 복숭아 오얏과 같으랴
芳新肯比枳棖香
향긋하니 어찌 탱자 정자 향에 견주랴
甘成石蜜皤翁笑
단 꿀을 만들어 파옹이 웃음 짓고
金鑄彈丸公子揚
황금으로 탄환 만들어 공자가 드날리네
欲飮瓊漿王母遠
경장을 마시려니 서왕모가 아득하여
不如醉裏恣心嘗
취중에 마음껏 먹는 것만 못하네
望遠登臨水拍天
망원정에 오르니 강물이 하늘을 치고
主人迎我笑聲先
주인이 나를 맞아 웃음소리 앞서네
松陰滿檻秋光動
솔 그늘이 난간 가득하여 가을빛이 일렁이고
雲影搖尊醉色牽
구름이 술잔에 흔들려 취기에 이끌리네
危坐便知財一粟
바로 앉으니 재물이 좁쌀 한 톨 같음을 알겠고
相談何遠享千年
서로 이야기하니 천 년을 사는 것이 어찌 멀랴
雖慙薄物難充寶
변변찮은 물건으로 보물 보태기 어려워 부끄럽지만
洞我深情作□仙
나의 깊은 정을 알아 [빠짐] 신선이 되었으면 하네
兄不見
형은 보지 않았는가
如蠅道士掛帝眼
파리 같은 도사가 황제의 눈에 띤 것을
又不見
또 보지 않았는가
會稽王朗傳奇功
회계의 왕랑이 기이한 공 전한 것을
爭姸張李不足慕
고움을 다툰 장과 이는 사모하기 부족하고
燒竈致富頗如蒙
부엌 태워 치부함도 매우 몽매한 듯하네
忽然深憶兄在寂
갑자기 쓸쓸한 형을 깊이 생각하며
封贈欲曉予深衷
먹을 주어 나의 깊은 마음을 밝히네
養之錦囊堪掇裏
비단 주머니에 보관하다 꺼내어서
應憶靑蓮幕下翁
청련 막하의 노인을 생각하리라
尊兄畵像贊
존경하는 형님의 화상에 쓴 찬문
溫溫玉質
온화한 옥의 자질로
栗然縝密
엄숙하고 치밀하며
器範自天
기량이 하늘에서 나와
璿儀表帥
종친의 모범이었네
肅穆盛容
엄숙한 모습은
璠璵煥瑟
옥처럼 빛나고
孶孶往賢
현인에게 힘써 가서
乾乾終日
부지런히 종일 공부했네
孝以事親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忠以作臣
충으로 신하가 되어서
履道無遹
정도 걸어 잘못이 없고
尙德若人
남들처럼 덕을 숭상했네
哲工運思
철인처럼 사색하고
粹姿逼眞
순수한 자태가 핍진하여
豁如披霧
운무가 활짝 갠 듯하고
粲瞻星辰
빛나는 별을 보는 듯했네
琅琅尊哥
낭랑한 형의 말이
昻昻獨鳴
높이 홀로 울렸지만
他人奚識
남들이 어찌 알랴
我愛篤誠
나는 정성 다함을 아꼈네
心胸恢廓
마음이 드넓어서
海闊天晴
넓은 바다와 갠 하늘 같았고
文章陶鑄
문장을 단련하여
觸物混成
사물 보고 글을 지었네
時接華萼
형제를 때로 만나
友愛實深
우애가 실로 깊었고
韞匱飄馥
상자의 옥에서 향이 일어
灼乎知心
마음을 밝게 알았네
麒麟鳳凰
기린과 봉황은
千載難尋
천 년 뒤에 찾기 어렵고
風流氣像
풍류와 기상은
丹靑合臨
초상화에 모였네
一雇明鏡
명경을 한 번 보면
撫掌應驩
손뼉 치며 기뻐하리니
何以爲樂
어찌하여 즐거운가
澄瑩大觀
맑고 밝아 볼만하네
玉壺秋露
옥호의 가을 이슬 같고
英炯猗蘭
난초처럼 빛나서
天錫眉壽
하늘이 장수를 주었으니
永保鴻
영원히 큰 은택을 보존하라

[1] 1458년(세조4) 세종의 서자 계양군(桂陽君)과 인수대비의 언니인 정선군부인 한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으며 휘는 식(湜), 자는 낭옹(浪翁), 호는 사우정(四雨亭)이다. 시문에 능하였고 명창(名唱)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슬하에 회안부정(淮安副正)과 도안군(道安君) 2남을 두었으며 대표 저서로는 사우정집(四雨亭集)이 있다. [2] 외국 사신 접대 자리는 나라의 외교와 관계되는 중요한 행사이므로 종친이나 신하들 중에서도 아무나 입시할 수가 없었는데 이 자리에 종친을 대표해서 월산대군이 늘 참석하여 성종과 함께 사신을 맞이하였다. 명나라 사신도 월산대군의 풍모가 조용하고 반듯하며 예의가 있는 것을 보고서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3]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 [4] 정릉동 연경궁(延慶宮) 저택, 풍월정(風月亭), 망원정(望遠亭) 등 정자, 고양 별장 [5] 임금과 신하 관계를 떠나 집안 식구끼리 행하는 예법 [6] 폭군 같은 며느리 [7]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 [8] 임금님이 드시던 귀한 청어목 멸치과의 바닷물고기로 회유성 어류로 맛이 좋아 조선시대부터 수라상에 올랐으며 뼈째 먹을 수 있다. [9] 연산군과 중종을 비롯한 성종의 16명 왕자들의 이름은 모두 항렬자로 忄심방변 부수를 사용했는데 이이 역시 이름에 忄자를 따랐다. [10] 월산대군묘는 한양을 뒤로 하여 아예 북쪽을 향해 있다. 볕이 좋은 남향을 택하는 게 풍수지리의 상식인데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는 것. 묘지를 이런 지역에 세운 이유는 후대에 자신의 가문에서 큰 인물이 나와서 정치에 관여하게 되지 말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길 바란다는 월산대군의 유언을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산대군의 뜻대로 이후 그의 후손들 중에서 큰 벼슬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한때 월산대군의 후손들도 묘의 방향을 바꿔볼까 하는 의논이 있었지만, 차마 선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여 묘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11] 조선시대에는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후궁,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의빈, 왕비의 부모나 예장 대상의 공신과 종2품 이상 종친, 종1품 이상 문무관들이 사망하였을 경우에 조회를 정지했는데 국장 대상자는 5일 정지, 예장 대상자는 1~3일 정지하였다. [12] 부림군의 장남이며 슬하에 외아들 덕양부수(德陽副守)를 두었다. [13] 이후 월산대군의 서자였지만 대군의 유일한 아들이라 적자로 인정받은 덕풍군이 장성하자 회안부정에 이어서 월산대군의 제사를 받들었다. [14] 임금이 대신이나 종친의 시호를 직접 짓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성종은 봉상시에서 논의한 형의 시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이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친히 지었으니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가 지극했음을 알 수가 있다. [15] 임금이나 왕비 및 2품 이상의 장례에 각사(各司)의 관원이 각각 1인 이상씩 참례하여 장사 지내던 제도 [16] 존경하고 숭배(崇拜)함 [17] 형제이면서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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