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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428b>국가 | 우산국 · 세라 |
역사 | 역사 전반 · 우산국/역사 | |
전투 | 신라-우산국 전투 · 우산국 여진족 해적의 침입 | |
왕사 | 우해왕 · 풍미녀 | |
유적 | 저동리 고분군 · 사동리 고분군 · 천부리 고분군 · 나리 고분군 · 현포리 고분군 · 태하리 고분군 · 당양리 고분군 · 남서리 고분군 | |
인물 | 토두 · 백길 | |
기타 | 우산도 · 울도군 · 지증왕ㆍ 이사부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우산국의 역대 군주 | |||||
?대 우해왕 |
왕호 | 우해왕(于海王) |
성 | 불명 |
휘 | 우해(于海)? |
생몰 기간 | ? ~ ? |
재위 기간 | ? ~ ?[1] |
1. 개요
설화로 전해지는 우산국 국왕.울릉도 설화에 따르면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하여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라고 전해진다.
2. 행적
울릉도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때가 우해왕이 다스리던 때인데 우산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바다에서는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힘이 세었다라고 설화에서는 전해졌다.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산국 인근 해역에서는 대마도에서 온 왜구가 자주 나타났고, 어느 날 우해왕은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수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대마도수장을 항복시키고 앞으로 다시는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이후 대마도를 떠나 올 때 우해왕은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대마도수장의 셋째 딸인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삼았다고 한다.
우해왕이 풍미녀를 왕후로 맞은 후 우해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멀리하였고 사치를 좋아하는 풍미녀를 위해 신라에서 몰래 노략질을 해오는 일도 있었고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한 신하를 목을 배거나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신하들과 백성들은 우해왕이 무서워 한 마디도 못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라가 망하겠구나!, 풍왕후는 마녀야, 우해왕이 달라졌어라는 소문이 온 우산국에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우해왕은 그런 소문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신하를 수장시켰고 이를 본 신하들은 되도록 왕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 지 몇 해 후 우산국은 신라에 망하고 말았다. 라고 울릉도 설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3. 가족관계
본인 : 우해왕아내 : 풍미녀
장남 : 하발
그 외 자식들 : 현우 외 6명
4. 여담
- 조선 인조 임금 시절에 조여적이란 사람이 쓴 책인 청학집에 의하면,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고 나서 우산국 왕자인 하발은 7명의 동생과 함께 고구려로 달아나서 계루부 대형의 벼슬을 받았다가, 나중에 하발의 형제 중 7명은 중국의 북위로 도망쳤고 그들 중 1명인 현우는 지금의 함경남도 비백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우의 자손들이 각각 현씨와 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2]
- 현재 울릉도 주민들은 우산국 시절부터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조선말 전라도 및 경상도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의 후손으로 고려 중기 여진 해적들과 여말 선초 시기의 왜구들로 인해 울릉도가 조선말까지 무인도 상태였기에 우해왕 설화 또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설화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 초기 동해안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