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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8:10

우에스기 요잔

파일:250px-上杉鷹山.jpg

上杉鷹山
1751년 ~ 1822년 (향년 71세)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우에스기 요잔은 에도 시대의 대표적 명 다이묘이다. 요잔은 은거 후의 이름으로, 본명은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이다.

2. 생애

휴가국 타카나베번 9대 번주 아키츠키 타네미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차남이었으므로 승계권은 없었고, 외할머니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 인연으로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츠나노리의 손자)의 서양자가 되었다.

이후 요네자와번을 계승하게 되었으나 당시 요네자와번의 경제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과거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에 섰다가 아이즈 120만석을 잃고 요네자와 30만석으로 전봉될 때 많은 가신들이 따라나섰기 때문에 다른 번에 비해 가신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이것이 충성심이 강한 가신들을 가졌다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으나 어쨌든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20만냥의 큰 빚을 지고 있어 요네자와번의 좋지 못한 재정 상황이 에도의 서민들에게까지도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1] 오죽하면 우에스기가에서도 그냥 영지를 막부에 반납해버릴까 하는 고민도 했다고.

요잔은 타케노마타 마사츠나 등의 새로운 얼굴들을 발탁해 대대로 내려오던 가신들과 대립했고, 검소함과 절약을 강조하고 하녀들을 크게 줄였으며 무명옷을 입었다. 또한 신분의 귀천과 관계없이 교육을 받게 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폈다. 또한 관개 시설을 만들고 다른 번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교육을 하게 했으며, 놀고먹던 무사들을 황무지 개간이나 나무 심기에 투입했다. 또한 비단 산업을 키워내 최고급 비단 생산지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약초를 재배하는 식물원 등을 짓고 양의학을 도입하는데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창을 폐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가 크게 반발해 몇몇 가신들이 할복하거나 은거하게 되는 큰 소란이 있기도 했다.

요네자와번은 이로 인해 15년 만에 빚을 모두 갚고 매우 풍요로운 지역이 되었으며, 대기근이 들었을 때도 굶어죽는 사람을 과거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였다고 한다. 이후 선대 시게사다의 차남인 양아들 하루히로에게 번을 물려주고 은거했고, 1822년 사망했다.

후일담을 풀자면 도쿠가와 가문과는 안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우에스기 가문이지만, 보신전쟁시에는 의리를 지켜서, 아이즈번, 센다이 번 등과 함께 오우에츠열번동맹을 결성, 막부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 판적봉환이 실시되면서 요네자와도 몰수된다. 그래도 후손들은 신정부로부터 본가는 백작, 지번은 자작위를 받는 등 화족으로 대우받고 관직도 부여받으며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았다.

2021년 현재 요네자와 우에스기가의 당주는 가게카쓰의 15대손에 해당하는 우에스기 쿠니노리(上杉邦憲, 1943년생)라는 사람인데,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우에스기의 본거지 요네자와에서도 시립 우에스기 박물관을 우에스기가의 재단이 운영하는 등 지역유지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 동생인 우에스기 다카하루(上杉隆治)는 음악가였다.(2004년 사망) 이 두 사람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출신이라서 오늘날 도쿠가와 종가와 요네자와 우에스기가는 인척 관계인 셈이다. [2]

3. 여담

참근교대로 인해 에도에 가다가 노숙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 가신이 꺼진 불씨를 살리기 위해 화로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며 "요네자와번은 꺼진 화로와 같다. 하지만 끈기있게 입김을 불면 되살아나게 된다. 나는 이와 같이 영지와 영민을 살려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도몬 후유지가 쓴 소설 우에스기 요잔[3]에 요잔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투씬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전투를 다룬 소설처럼 치열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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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다가 4대 번주인 우에스기 츠나노리 시절에는 감봉까지 되었다. 사유인즉 3대 번주인 우에스기 츠나카츠가 후계자도 없이 죽었는데 이러면 짤없이 개역신세라 우에스기 가문 역시도 개역 위기에 놓였지만, 츠나카츠의 장인이었던 호시나 마사유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자)의 도움으로 영지의 절반인 15만석이 감봉되는 대신 개역만은 피할 수 있었다. [2] 쿠니노리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17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마사의 장녀이기 때문에, 이에마사의 차녀의 아들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와는 사촌 관계가 된다. 참고로 츠네나리는 막말의 교토수호직으로 유명한 아이즈번 9대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아들이 없는 외할아버지 이에마사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했다. [3] 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불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