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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9:44

손창섭

우에노 마사루에서 넘어옴
제1회 현대문학상 수상
-
-
손창섭
혈서 / 미해결의 장
인간동물원초
(1956)
김광식
(1957)
제4회 동인문학상 수상
오상원
(1958)
손창섭
잉여인간
(1959)
서기원
이범선
(1960)
대한민국의 소설가
손창섭
孫昌涉|Son Chang-seop
파일:EXH7FHPAURGTVNOOQZO4WIJOGA손창섭.jpg
본명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1]
출생 1922년 5월 20일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안남도 평양시)
사망 2010년 6월 23일 (향년 88세)
일본 도쿄도 후추시 무사시노다이병원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1922~1945)

[[북한|]][[틀:국기|]][[틀:국기|]] (1945~1948)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48~1998)

[[일본|]][[틀:국기|]][[틀:국기|]] (1998~2010)
직업 소설가
서한(西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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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 니혼대학 법학부 (법학 / 중퇴)
본관 경주 손씨
배우자 우에노 치즈코 (1948년 결혼)
부모님 아버지[2] 어머니
자녀 슬하 2남
데뷔작 얄궂은 비 (1949) }}}}}}}}}

1. 개요2. 생애3. 작품 성향4. 대표작5. 기타6. 뉴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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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소설가.

이범선, 선우휘, 오상원, 장용학, 김성한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전후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비 오는 날, 잉여인간이 있다.

2. 생애

1922년 5월 20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5학년때, 과부였던 어머니가 재가해서 칠순이 가까운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친척들이 도와주지 않아 어려운 생활을 살았다.

소학교 졸업 이후 1936년, 만주를 거쳐 일본 유학 생활을 했다. 만주와 일본을 오가면서 교토 도쿄에서 중학교를 여러 차례 옮기면서 유학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밑바닥 일을 했는데, 우유 배달을 하다 어떤 일본인 주인의 집에서 세계문학전집 수백 권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 죄와 벌', 필리프의 '뷔뷔 드 몽파르나스', 체호프의 '아뉴타'에 감명을 받았다.

그 후 니혼대학에 수 년간 머물렀다. 대학생 시절에는 루소 니체에 빠졌다. 특히 루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자신보다 10년 연상인 여인과 사랑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다 일본인 부인인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를 만나 결혼을 해서 자식까지 낳았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향인 평양에 갔다. 그곳에서 38선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남한에서는 미군 구타죄로 범죄자가 되었다가, 고향 평양에서는 반동 취급을 받았다. 1948년 다시 월남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장사를 해서 겨우 먹고 살았다. 이후 중고등학교 교사, 잡지사 기자, 출판사 편집원 등으로 일하면서 점차 생활은 안정되어갔다. 1949년에는 그의 첫 작품인 '얄궂은 비'를 발표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넘어온 아내와 기적적으로 만나 다시 생활을 시작했다. 6.25 전쟁중, '문예'지에서 김동리가 '공휴일'과 '사연기'를 추천해서 등단했다. 그 후 철저하게 은거하면서 비 오는 날, 혈서, 미해결의 장, 인간동물원초, 잉여인간, 신의 희작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62년에는 대중에게 가까이하고 생계를 위해 주로 신문 연재 소설을 연재했다. 그러다가 1972년, 안양 근처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하다가 작가 활동을 중단하고, 아내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손창섭의 소재가 불분명했을 때, 일본으로 간 것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한국에 대해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었다. 워낙 염세적인 그의 작품 때문에 이런 추측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일본에 나가 살겠다며 2년 먼저 떠나온 자신을 따라 홀연히 현해탄을 건너왔을 뿐' 이라고 부인했다. 단순히 아내의 해석으로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거의 25년 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1998년 일본의 외국인 등록법 때문에 번거로워서 어쩔수 없이 귀화했다는 걸 보면 아내의 이 증언은 신빙성이 높다. 게다가 귀화 이름이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 성은 아내의 성을 따랐다. 본의 아니게 데릴사위가 되었다.)인데, 저 마사루(昌涉)가 한국 이름인 '창섭'의 한자와 같은 것으로 보아 아예 뿌리를 거부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한국에서 살았을 때처럼 도쿄에 철저히 은거하면서, 동네 공원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자신의 글을 프린트해서 나눠주는 옆집 할아버지처럼 여생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1976년에는 유맹과 봉술랑을 연재하기도 했고, 1988년에는 김동리로부터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오라는 요청을 받자 잠시 한국에 오기도 했다.

문예지인 현대문학 에선 매년 초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작가들의 주소를 게재하였는데, 손창섭의 주소는 소재가 밝혀지기 전인 2009년 2월까지 滯日中(체일중; 일본에 머무름)이었다.

그러다가 2009년 2월에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가 손창섭의 소재를 찾았다. 기자가 손창섭의 소재를 찾았을 때, 지병으로 몸져 누워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의 아내를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그동안의 행적이 밝혀졌다. # # # #

2010년 6월 23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방민호(方珉昊)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소설 전공 교수에 따르면 2010년 6월 23일 오후 11시 23분에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도쿄 무사시노다이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유골은 니가타 현에 있는 절에 안치되었고, 부인에게는 "그동안 잘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3. 작품 성향

1950년대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과 자조, 극도의 절망과 궁핍 등 부정으로 가득찬 시각으로 인간의 실존세계를 다룸으로써 종래의 한국소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한 작가이다.

주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정체된 운명을 살아가다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을 그려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몇 시간 동안은 충격과 무력감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여러 모로 문제적이다. 작가 자신부터가 꿈도 희망도 없었던 성격으로 보인다.

4.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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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소학교 시절에는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후로는 기억할 필요가 없어 잊어 버렸다. 때문에 성장한 후로는 자신의 생일을 몰라 기념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아버지가 없는 유복자이기도 했는데, 언제 죽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

그가 죽기 며칠 전 한 기자가 그를 찾으려고 가다가, 동네에 살고 있던 어떤 노인에게 혹시 손창섭이 아니냐고 묻자 "나는 아니다, 이 근처에 있다"라고 말했다. 잠시 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방금 말한 그 노인이 바로 손창섭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기자는 다시 그 노인을 찾아가 왜 부인하셨는지 묻자 몸 상태를 이유로 며칠 후 다시 찾아오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 며칠 사이 손창섭은 타계했다.

한편 그가 타계했을 때, 그의 대표작인 잉여인간의 제목 때문에 부고 기사에 잉여인간들이 몰려들어 애도하는 댓글이나 원망하는 댓글을 달았다. 일종의 고인드립으로 자제해야 할 일이었지만.

6. 뉴스 기사

아래 링크에 걸린 기사는 전부 국민일보에서 취재한 기사이다.

‘잉여인간’ 쓴 손창섭 日에 생존… 국민일보,도쿄 병원서 투병 생활 확인
[전후세대 최고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上) ‘손창섭 200九.2.15.’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中) 마침내 밝혀진 은둔 30년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하) 손창섭 문학의 진실 밝혀지다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우에노 여사의 흑석동 시절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잃어버린 30년 증거할 작품 아쉬워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36년만에 찾아간 움막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손창섭 문학적 터전 ‘바라크’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續) 제자 노윤기씨 증언 渡日 직전 행적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취재 후기] 2005년 탐사시작… 지난달 주소 확인


[1] 1998년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아내의 성을 따랐다. [2] 유년 시절에 집을 나가버린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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