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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6:03:21

용담검무


1. 개요2. 상세

1. 개요

龍潭劍舞.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책으로 남아있었던' 목검을 쓰는 칼춤이다.

2. 상세

최제우는 쇠(서양)와 반대되는 개념인 나무(동양)를 상징으로 서양과 맞선다는 뜻으로 목검을 들고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검무를 추었고, 동학의 추종자들이 이를 따라했다.

1864년 최제우가 사형당한 이후 최시형 천도교단은 기존 동학의 신앙행태에서 삼칠주(三七呪) 주문 독송을 제외하고 주술적인 부분을 제거했는데, 이때 검무 역시 사라졌다. 현대에 와서 사라진 검무를 복원하겠다고 하여 용담검무가 나왔으나, 과연 최제우가 추던 검무를 복원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기본동작은 삼칠주 주문 뒷부분에서 명칭을 딴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13개이며 이 동작들을 보면 직접적인 싸움을 하는 무술이 아니라 액살베기 검무, 쌍검무와 같이 '신(동학에서는 한울)'을 영접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자연을 감상하며 서양의 침략과 탐관오리를 물리치는 의식에 가깝다.

목검을 하늘에 찌르는 동작, 옆으로 후리는 동작, 한 바퀴 도는 동작, 옆구리에 칼등을 갖다 대는 동작, 큰 원을 그리는 형태 등이 계속 이어져 시에서 주까지 조선시대에서 기녀들의 기예로 변한 쌍검무에 비해 역동적이다.

최제우가 "제자들과 나무검으로 칼춤을 추었다." 하는 기록만 있고 나머지 동작에 대한 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원에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명지대 운동학과 장효선 박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목마를 타며 배운 작대기 칼춤이 선소리꾼, 목공예 장인 등으로 이어지는 가계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목검을 선물한 장인인 장효선 박사의 고조할아버지가 배운 것이었고, 다른 수련자들은 칼춤을 잊어버렸지만 이 집안만 5대에 걸쳐 계속 전승해 왔다는 것.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얘긴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복원'이 아니다. 그냥 '재발굴'이지... [1]

천도교 행사가 진행될 때 칼춤을 춘다든가 하며 천도교와 인연도 깊다. 서울 외에 용담검무의 탄생지인 남원에 도장을 하나 장만하여 수련생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천도교 측도 대부분 용담검무를 기꺼워하고 건강운동이나 수양으로 멀리 전파된다면 모체인 천도교가 없어질 때까지 이어지게 될지 모른다. 이 검무에 대한 논문이 있는데 검무가 만들어진 의도, 형태, 역사, 건강운동으로서 가능성을 다루었다

용담검무와 별 연관없는 내용인데 확실한 연구논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효선 박사는 신라시대의 황창랑 쌍검무가 본인이 연구하여 복원되었다고 주장하며 1.5 kg짜리 환도 두 자루를 들고 공연해왔다. 그래도 쌍검무는 가벼운 칼이 좋다면서 1 kg짜리 칼이 적격이라고 한다. 황창랑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칼을 쓰고 칼을 뿌리는 형태가 전통적인 '기' 발산형 칼춤이긴 하지만, 실제 황창랑과 형태가 많이 다를 수 있다.
[1] 복원이란 한 번 실전된 기술을 문헌 등의 자료를 통해 원형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5대째 한 가문이 이어온 것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실전된 적이 없으므로, 복원이 아니라 숨어있던 기술을 재발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