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청주 북해국 사람으로 광화 연간에 도술을 좋아해 이로 인해 스스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어렸을 때 손옹이 그를 따랐고 왕화평이 죽자 동도에 장사지냈으며 책 100여 권과 약 수 포대를 모두 장례에 사용했다. 왕화평이 시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손옹이 왕화평의 보서와 선약을 취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조비는 전론에서 왕화평을 비롯해 여러 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유항이 적은 홍보의 설에 미혹되고 유향의 말에 현혹되었으니 고금을 통틀어 멍청하고 황당한 사람이 어찌 한 사람 뿐이겠냐고 비판했다.
왕화평이 시해가 되었다는 부분은 이현이 주석으로 신선이 된 것으로 몸은 남겨두고 혼백이 따로 다닌 것이라 설명하는데, 시해는 왕화평이 한 방법 이외에도 환골탈태의 방법으로 영약을 복용하는 것,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로 먹는 것, 복기 등을 수련을 해 육신을 간직한 채 불로장생이 되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