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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22:44:04

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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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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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連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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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며 자는 문의(文儀)로 형주 남양군 사람.

2. 생애

유장이 익주목일 때 촉군으로 들어가 재동현의 현령이 되었으며, 유비가 가맹에서 병사를 일으켜 남쪽으로 진군하자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았다. 유비는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무리하게 핍박하지 않았으며, 성도가 유비에게 평정되자 십방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가 광도현으로 옮겨졌고 임지마다 공적을 세웠다.

이후 사염교위로 관직을 옮겨가 소금과 철의 이익을 따졌으며 이익이 들어오는게 매우 많아서, 국가의 쓰임에 도움이 되었다. 사염교위(司塩校尉)는 한자의 뜻 그대로 소금(塩)을 담당하는 벼슬(司)인데 이게 엄청 중요하다. 왜냐면 사염교위는 촉한의 통치 기반이 되는 국가재정의 확보를 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 왕련은 유능한 사람을 선발해 속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선발한 인물 중에 여예, 두기, 유간 등은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며, 왕련은 승진해 촉군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되었지만 소금을 관리하는 일은 이전과 같이 했다.[1] 유비 사후, 승상 제갈량은 부를 열어(開府) 실질적인 나라의 통치자 역할을 하게 된다. 왕련은 223년에 둔기교위로 임명되어 승상장사[2]를 겸임했다가 평양정후에 봉해졌다.

당시 남방의 여러 군이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직접 정벌하려고 하자 한 나라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해서 제갈량을 만류해 가지 못하게 했다. 그의 말이 아예 틀리지 않을 뿐더러 유비 생전부터 염철 산업 관리에 공이 많은 중신의 간언이고 왕련의 말이 매우 간절해 보니 이 때문에 남정군의 출정은 제법 오래 연기되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많은 검토를 거치면서도 역시 자신이 가야겠다는 결심을 꺾지 못했다. <왕련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제갈량이 '뭇 장수들의 재능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함'을 염려했다고 하는데, 숙장 중의 숙장인 조운이나 뛰어난 진압 실적을 보유한 이엄 등이 건재한 마당에 아직 군사적 재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이런 생각을 한 것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제갈량의 본의가 단순 무력 진압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익주 본토 못잖은 남중의 생산력을 필요로 했고, 잦은 분란으로 인해 싸움에 익숙한 남중 주민들의 전투력을 탐냈다. 제갈량의 남방 원정은 반란을 진압하고 본래의 통치력을 회복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현지의 경제적 기반을 재건하여 촉한의 재정과 군사력에 보태겠다는 뜻도 있었다. 어찌 됐건 제갈량, 마충, 이회 등이 지휘하는 촉군이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남정을 개시했다. 촉한의 연호로 건흥 3년(=225년) 봄의 일이었다.

이후 왕련이 세상을 떠나자 왕산이 뒤를 이었다.

계한보신찬에서는 왕문의를 찬함(贊王文儀)이라는 글에서 둔기교위(屯騎, 왕련)는 옛 주인을 존중하고, 절개를 굳게 지키며 마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장이 항복하여 나아가 임명을 받았을 초기에는 마음을 다해 세상의 모범이 되었고,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라고 했다.

3. 창작물에서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왕련.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1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는 손가락을 올린 상태에서 제갈량을 말리고 있으며 능력치는 통솔 17, 무력 9, 지력 69, 정치 82, 매력 66이다. 개성은 절약, 조달, 진흥, 안목,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4, 진형은 방원, 충차, 전법은 치료, 친애무장은 여예, 혐오무장은 없다.

3.2. 삼국지: 한말패업

군사 43, 무용 22, 지모 55, 정무 66, 인사 68, 외교 67의 능력치로 169년생으로 나온다.


[1] 촉군태수의 중요성은 말할것도 없고 흥업장군은 이엄이 역임했던 장군호다. 엄청난 요직으로 승진한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금 관련 업무는 그의 소관으로 있었다 하니 얼마나 능력을 인정받았는지(혹은 제갈량이 사람을 얼마나 험하게 부려먹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2] 장사는 고위관료에게 소속된 속관(屬官)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다.